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30)
제30화
스펙터를 상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강인한 전사의 신체도, 뜨겁게 타오르는 용기도 아니었다.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
잔잔한 호수처럼 늘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스펙터의 정신 공격에 조금이나마 면역력을 보였다.
반대로 내면에 큰 상처를 지니고 있는 이들은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고 한들 스펙터에게 공격을 허용하면 오히려 같은 팀을 베어버리는 무지막지한 도살자가 되어 버릴 뿐이었다.
지금 클레이디크의 국경 지대에서 날뛰고 있는 트루드의 상황이 딱 그랬다.
늘 과묵하게 주어지던 임무를 수행하던 트루드였지만 그 속은 한없이 여릴 뿐이었다. 그건 17년의 인생을 살아오며 축적된 결과물이었다.
“네가 현자의 여식이로구나. 그를 닮아 총명하게도 생겼군.”
아버지가 현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어딜 가든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아왔으며,
“쯧. 어찌하여 현자께 이런 자식이 나왔는지. 이런 간단한 일도 해내지 못하니 어찌…….”
작은 실수를 할 때마다 그 아버지의 이름을 욕보이는 불효녀로 자라왔다.
“기사는 어딜 가든 품성이 단정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모친이 없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걸을 자랑이라도 하고 다닐 셈이냐!?”
심지어 얼굴도 본 적 없는 어머니를 욕보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고, 타고난 검술의 재능과 신성력 때문에 남들의 시기마저 받아왔다. 태어난 순간부터 말이다.
그래도 그런 건 참을 수 있었다. 재능 있는 몸으로, 좋은 배경을 갖고 태어난 건 사실이니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다만.
“비단과도 같은 몸이군. 검을 잡기엔 너무도 아쉬운데. 다른 쪽으로 그 몸을 사용해보지 않겠느냐?”
소름 끼치는 말이었다.
묵묵히 버텨왔던 트루드가 그 말을 듣고 입술을 얼마나 짓씹었는지. 피가 줄줄 새어 나올 정도였다.
심지어 그 말을 한 작자는 성황의 자식이라는 황자 중의 한 명이었다. 성기사단 소속의 견습 기사인 2황자.
트루드로서도 그 혐오스러운 발언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의 불온한 표정이 2황자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오늘부터 2황자 전하의 대련 상대는 너다.”
다음 날 2황자가 그녀를 연무장으로 불러냈다.
비릿하게 웃고 있는 2황자의 얼굴을 보니 무엇을 상상하는지는 알 법했다. 갑옷을 입은 그녀의 몸을 위아래로 훑는 것을 보니 다시 한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복감.
그는 이런 식으로라도 트루드에게 정복감을 느끼려 했던 것이다. 대련이라는 명목하에 자신을 흠씬 두들겨 때리면서.
하지만 트루드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도자기처럼 매끈한 얼굴과는 달리 트루드의 손은 우악스럽게 퉁퉁 부어있었고, 그것은 그녀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왔는지 보여주는 방증이었다.
퍼억. 퍼억. 퍽!
털썩.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던 2황자가 트루드의 검을 맞고 연이어 나가떨어졌다. 2황자의 얼굴은 어느새 수치심과 분노로 새빨개져 있었다.
결국엔.
화악.
2황자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었다. 순수한 인간의 신체로는 낼 수 없는 속공.
동시에 2황자의 검과 몸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전하?”
그건 분명 성력을 사용한 것이었다. 일반 대련에서 성력을 사용하다니. 게다가 저 정도면 정말로 트루드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휘이익.
성력을 머금은 2황자의 검이 트루드를 향해 쏘아져 내렸다.
그때 가슴팍에 남은 상처가 흉터로 남아 있었으나, 그것보다 더 큰 아픔은 마음에 남은 상처였다.
뻔히 말도 안 되는 현장을 보고도 제게 해가 돌아올까 봐 모른 척 넘긴 수많은 다른 기사들.
심지어 2황자와 있었던 일을 조용히 묻고 넘어가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기까지 했다.
자신을 도와줬던 것은 부단장 챈슬러 뿐이었으나 기사단에서 퇴물 취급을 받고 있는 챈슬러라 대세에 영향을 줄 순 없었다.
“……미안하다.”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말하던 부단장에게 트루드가 담담하게 답했다.
“괜찮습니다.”
괜찮은 줄 알았다. 트루드는 정말로 그렇게 살아왔으니 익숙한 줄 알았다.
허나 그건 착각이었다. 가슴 속에 박혀 버린 굳은살은 그녀로 하여금 그러한 착각을 하게 했으나 실은 더 큰 상처가 축적되고 있었다.
스펙터의 정신 공격은 그녀의 그러한 약한 부분을 정확히 건드렸고 이미 나 있던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었다.
뒤에서 달려드는 스펙터를 놓치고 만 그녀는 스펙터에게서 이상한 기운이 전해져 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다 죽여버리면 그만이야. 다 같은 놈들이야.”
그녀의 몸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코 타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스펙터의 정신 공격 때문은 맞으나 그것은 그녀에게 부정적인 기운을 더욱 강화시켜 줬을 뿐. 그녀는 스스로 3황자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미칠 듯 벅차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이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지금껏 3황자가 보여준 모습은 분명 퉁명스러운 면은 있으나 선량하고 성실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2황자의 친동생. 타락한 신성 제국의 황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트루드가 3황자에게 검을 휘두른 이유였다.
콰앙!
성력을 잔뜩 실은 그녀의 검이 3황자에게 부딪혔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그의 성력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녀의 검이 막혔다는 사실에 다소 놀랐으나 잠시뿐이었다. 그녀는 다시금 3황자에게 달려들었다.
“트루드!”
그런 그녀를 익숙한 목소리가 불렀다.
“3황자 전하께 무슨 짓이냐! 네가 정녕……!”
답답하다는 얼굴로 소리를 질러대는 사내. 기사단의 부단장이자 그녀를 감싸줬던 유일한 성기사, 챈슬러였다.
그의 말을 듣자 그녀의 마음이 동요했다.
“검을 내려라. 네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그렇게 날뛰기만 한다면…… 전하를 지키기 위해 내가 너를 해할 수밖에 없을 터이니.”
트루드를 가로막은 챈슬러가 그렇게 말했다.
늘 자신의 편이었던 챈슬러가 그렇게 말하니 트루드는 왠지 서글퍼졌다.
가슴 속에 턱 막힌 듯한 감정이 더욱 벅차오르고, 트루드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채로 검을 휘둘렀다.
카앙.
트루드와 챈슬러의 검이 부딪히며 굉음을 냈다. 한껏 실린 성력끼리 제 힘을 겨루기라도 하듯 이리저리 발산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였다.
“됐으니까 나와.”
챈슬러가 트루드를 제압하려던 순간 뒤에서 3황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트루드의 검에 의해 피해를 입은 듯, 3황자의 입가에서 피가 조금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도 트루드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트루드는 반쯤 정신을 놓아버린 채였으며, 그녀의 검은 빈틈을 보인 3황자를 향해 다시 한번 쏘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3황자는 이번에는 똑같이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3황자에게서 뿜어져 나온 성력. 수많은 사제들을 통솔하고 그 힘을 한 데 모은 덕에 성력은 챈슬러나 트루드의 수준을 한참이나 상회했으며.
화악.
그 어마어마한 양의 성력이 트루드를 덮쳤다. 허나 성력은 폭발을 발생시키는 대신 트루드의 몸 안에 자연스레 흘러 들어갔다.
포근함.
보는 이들마저 따스한 감각이 전해져 올 정도로 온화한 기운이 주위로 발산하며. 이내 검을 쥐고 있던 트루드의 눈이 저절로 감기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들끓고 있던 수많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아래쪽으로 꾸욱 눌려버린 듯한 느낌.
그녀가 굳건히 쥐고 있던 검이 바닥에 떨어지며 점차 트루드는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좀만 쉬고 있어.”
의식이 끊어지는 중 3황자가 그녀에게 한 말이었다. 그러곤 바닥으로 넘어지려던 트루드는 따스한 품에 안기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체구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으나 3황자의 품은 생각보다도 더욱 편안했다. 어쩌면 누구에게도 안겨본 적이 없기에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으리라.
그런 무의미한 생각 속에서 트루드는 허탈하게 웃으며 자신의 몸을 3황자에게 맡겼다.
* * *
의원들과 사제들. 이번에는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었고 모두들 사전에 준비되지도 않은 상태였지만 내 지시대로 올바르게 따라줬다.
특히나 가장 능숙하게 제 역할을 해낸 것은 단연코 칼로스였다.
기존의 의원들이 비록 내가 보기엔 한심할 정도의 의술 수준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 전장에서 축적된 경험을 통해 쌓인 노하우는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피부를 드러내고 그 안에 위치한 정맥을 절개하는 것은 이곳의 그 누구도 해보지 못한 시도.
모두가 똑같은 제대로 된 의술의 시작점. 그리고 비로소 같은 조건일 때 칼로스가 다른 이들에 비해 얼마나 뛰어난 실력을 지녔는지 눈에 띄게 도드라졌다.
군더더기 없는 칼질은 물론이며 내가 굳이 설명하지 않은 부분에서도 꽤나 센스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 이상을 해내는 것.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이건 꽤 중요한 능력이었다. 실제로 의사 생활을 하면서 막 들어온 인턴을 보면 이런 놈들이 결국 크게 되곤 했었다.
의학 지식은 너무 방대하고 또 미지의 영역도 많아 결국엔 본능에 따라 움직여야만 할 때가 많으니까.
그런 녀석이 이번에 꽤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환자들을 칼로스가 능숙하게 치료를 해 두었으며 덕분에 손이 가는 곳이 확 줄어들었다.
“아 좀! 조심 좀 해서 하라니까요!”
사뭇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칼로스가 자신을 괴롭히던 의원들을 되레 타박하는 모습을 보자 꽤 우습기까지 했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마음 고생이 심했나보네.”
잠자코 누워있는 트루드를 보며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평소 워낙 과묵하게 살아온 탓에 트루드가 속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사실 어느 정도 유추할 수는 있었다.
이전에 2황자에게 쌓였던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던 것도 있었고.
애초에 어린 나이부터 엘리트 취급을 받으며 자라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 역시 대한민국에서 그러한 취급을 받았었고, 의대를 입학하고 나서 줄어들 줄 알았던 부담감은 점점 더 커져 내 목을 조르는 듯한 기분이었으니까.
형식적으로는 평등 사회인 대한민국마저도 그러한데, 하물며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트루드는 얼마나 더 했겠는가.
안쓰러운 눈으로 트루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휙 저어버렸다.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 이 녀석이 깨어나기 전에 치료부터 하는 게 급선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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