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32)
제32화
“16년 전. 성배를 통해 측정한 전하의 성력은 분명 2성이셨습니다. 그 현장에 제가 있었으니 반박의 여지가 없지요. 헌데 어떻게 고리가 늘어나셨는지…….”
“어떻게 그렇게 된 건지는 나도 몰라.”
알 턱이 없었다. 내게도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었고, 지금의 현자만큼이나 나도 한참을 당황했었으니까.
“아무튼 성배의 힘이 전하께 전해졌다는 것, 그리고 그 성배가 전하에게 새로운 고리를 하사하였다는 것은 성국의 수많은 것을 뒤엎을 정도로 엄청난 사실이며.”
현자는 여전히 자신이 놀란 데는 더 큰 이유가 있다는 듯 동그란 눈으로 말했다.
“각 고리가 어떠한 분야에서 더욱 뛰어난 역할을 하는지. 그것을 알고 있는 자는 얼마 없지요. 그것을 전하께서 깨우치신 것만 해도 저는 차마 웃어넘길 수 없군요.”
“그렇게 대단하게 여길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직접 각 고리를 회전시켜 성력의 발산을 통해 임상 실험을 하다 보면 얻을 수 있는 정보니까.
대부분의 사제들이 귀차니즘 혹은 매너리즘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떤 치료를 하든 간에 모든 고리를 전부 사용하니 그걸 알 턱이 없었지만, 일부 열정적인 사제들은 분명 어렵지 않게 얻어낼 수 있을 만한 정보였다.
하지만 현자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알 수 없는 소리를 해 댔다.
“3황자 전하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나, 분명 전하께서 고리의 운용에 워낙 타고난 재능이 있는 덕에 알아내실 수 있으셨을 겁니다.”
“뭐?”
“1성의 고리는 기력을 회복시키는 데 가장 큰 효력을 보이며, 2성은 신체의 재생에 큰 효용을 보이고, 3성은 정신의 치유에 우월한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알려져 봐야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건 말도 안 됐다. 고리 한 개에 집중하여 필요한 능력만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큰 효율을 보이는지는 이번 스펙터와의 전투를 통해 몸소 느낄 수가 있었다.
허나 현자는 내가 반박하기도 전에 내 표정을 읽고는 선수를 쳤다.
“일반적인 사제들의 경우에는 각 고리를 개별적으로 회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하지요. 세 번째 고리가 정신적 안식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안다고 한들 마땅히 활용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헌데 전하께서는…….”
현자가 계속해서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건 꼭 내가 엄청나게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말하는 듯해서 괜히 억울한 심정이 들었다.
이것에 대해선 나도 할 말이 있었다.
이 세계로 들어온 지 꼬박 10년이 넘었고, 그 10년 이상을 성력의 운용에만 집중해왔다. 남들이 하등 쓸모없는 짓이라며, 타고난 성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법이라며, 그렇게 내게 손가락질을 해 댈 때도 나는 머리를 뜯어가며 성력과 씨름을 해 댔다.
순수한 흥미에 의한 것도 있었으며, 그것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한 것 때문도 있었다.
지금 성력을 이토록 유연하게 다룰 수 있는 것은 그 각고의 노력 덕분이라고 볼 수 있었다.
헌데 그걸 누구보다 오랫동안, 바로 옆에서 지켜봐 온 현자가 타고난 재능인 양, 거저 얻은 능력인 양 여기는 것을 보니 더욱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 형은 다섯 개의 고리에 겉보기에만 번지르르한 성력을 채워 넣는 데 급급했고, 둘째 형은 검술 훈련을 깔짝하는 것이 전부였지?”
“아.”
거기까지만 듣고도 현자가 탄식을 내뱉었다. 자신이 무얼 착각하고 있는지, 무엇이 내 기분을 상하게 하였는지 단숨에 눈치를 챈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내 그의 눈이 또다시 동그래졌다.
“허면…… 처음부터 이 모든 걸 예상하시고 성력의 제어를 연습하신…….”
“그럴 리가.”
피식 웃었다.
그럴 리 없었다. 2회차 인생이라고 해서 이 세상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성력은 대한민국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나는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뿐이고 그 결실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욱 좋게 맺어졌을 뿐이다.
“황국에는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내가 고리의 개수가 늘어났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면 분명 난리가 날 테고, 귀찮은 일이 잔뜩 생겨나게 될 것이다. 현자는 그에 대한 배려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 딸아이가…… 초월의 경지에 가까워진 것 역시. 알리지 않는 것이 전하께 도움이 될 것이겠지요.”
“……알고 있었어?”
트루드가 다섯 번째 고리를 만들어 낸 것. 현자는 그것마저도 알고 있었고, 그 사실 역시 묻겠다는 의지를 엿보였다.
생각에 깊이 잠겨 있던 현자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 정도라면…… 신께서도 제 실수를 인정하시고 새로이 모든 것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시는 거라 봐도 되겠지요.”
나로선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 * *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지금, 꽤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성배가 과부하되어 빛이 희미해집니다.」
「권능의 대부분이 수마에 빠져듭니다.」
이번에 너무 무리를 한 것인지, 바닥을 드러낸 성배는 더이상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성물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대부분 떠도는 소문에 불과하지만, 성물이 힘을 잃었다는 것에 대해선 들어본 적도 없었다.
“흐음.”
당장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줄었다. 3개의 고리, 그중 하나는 제대로 활용하기엔 아주 미약한 기운뿐이다. 그런 내가 이곳에서 나름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성배라는 무지막지한 도구가 있었기 때문.
“큰일이군요.”
그것을 알고 있는 현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검이 대악마의 심장을 찔렀을 때나 천칭이 신을 강림시켰을 때. 성물이 잠시 그 힘을 잃었었다 전해집니다.”
“듣고 보니 억울하네. 나는 뭐 그만큼 대단한 데 쓴 것도 아니잖아?”
“그렇긴 하나, 지속적으로 오래 사용하셨지요. 게다가 전하의 성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가능케 해 준 것도 수 차례이니 분명 무리가 전해졌을 테지요.”
“그럼 어떡하나. 뭐,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 되나?”
3성의 성력으로도 많은 것들을 해낼 수 있다. 물론 성배가 있을 때처럼 기적적인 일들을 해낼 순 없을 테지만 어쩌겠는가.
“생각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군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되니까.”
그리고 그 ‘할 수 있는 일’이 줄었다. 그건 오히려 내게 주어진 의무가 덜어진 것 같아 한결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성물은 절로 제 힘을 되찾게 될 테지만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진 모르겠군요.”
“차라리 잘 됐어. 안 그래도 부담스러웠거든. 기적을 불러오는 건 내 힘이 아니라 성배의 힘인데, 모두 오해를 하고 있으니.”
“오해는 전하께서 하고 계십니다.”
“뭐?”
현자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그리 말하더니 흐뭇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되물으려던 찰나.
똑똑.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사. 챈슬러였다.
“전하.”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평소와 달리 사뭇 진지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나와보셔야 할 듯합니다.”
“무슨 일인데?”
내가 되묻자 챈슬러는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을 회피했다.
“직접 확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뭐.”
큰일이 난 것만 아니기를 바라며 챈슬러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큰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총원 차렷!”
이후에야 앞에 놓인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일렬로 죽 늘어선 힐데스하임과 발칸의 병사들.
몇 달간 동고동락하며 대부분이 눈에 익었기에 그들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줄은 끝이 없이 늘어져 있었으며 병사들 뒤로는 평민들까지 서 있었다.
“……이게 뭐 하는 거야?”
내가 옆에 서 있는 챈슬러에게 묻자 그는 대답 대신 양쪽으로 갈라진 행렬 한 가운데로 이동했다. 그리곤 그가 외쳤다.
“힐데스하임의 위대하신 황자이자 이번 수호 임무의 주역이신 데미안 전하께 대하여!”
거기까지 들은 순간 비로소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경례!”
“충!”
외마디의 구호를 병사들이 일제히 외쳤다. 그 무수한 목소리 속에는, 나는 단번에 익숙한 이의 음성을 찾아낼 수 있었다.
“트루드.”
잔뜩 상기된 얼굴로 경례를 올리고 있는 트루드. 아까도 얼굴을 봤었지만 이제 완전히 회복된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힘찬 모습에 안도감이 들었다.
다만 안도감 뒤에 떠오른 감정은 썩 좋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뭐하러 이런 짓을 해.”
“감사의 표현이지요.”
내 말에 현자가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답했다. 그럼에도 나는 영 이러한 자리가 불편했다.
나 때문에 이런 거창한 자리를 만든 것은 둘째치더라도,
“일 났네, 일 났어. 내가 아니라 성배의 힘이었는데. 이젠 성배도 없잖아.”
나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커져 버린 것. 저들이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은 필시 이번 일에 대한 감사의 표현보다도 앞으로에 대한 당부 때문이리라.
헌데 현자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동경하는 것은 결코 황자 전하의 성력이 아닙니다.”
“……?”
“기다리는 이들이 많으니 우선 이동하시지요.”
나는 현자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가운데 놓인 백마에 올라탔다. 그리곤 말허리를 박차 행렬 한 가운데를 따라 쭉 이동했다. 양쪽으로 늘어선 이들이 일제히 자세를 낮췄다.
“가장 높으신 이께서 가장 낮은 이들을 손수 돌보심에, 더할 나위 없는 경의를 표합니다.”
“저분이 힐데스하임의 황자라고? 행색은 꼭 평민 같은데…….”
“예끼, 이 사람아. 밤낮 할 거 없이 전장에서 은총을 내리셨다지 않은가.”
“오히려 병사들은 해가 넘어가면 쉴 수 있는데, 저분은 부상자를 돌보느라 정말로 밤낮 구분이 없으셨다지.”
들려오는 말소리를 듣고서야 현자가 한 말의 뜻을 알 것만 같았다. 그러던 중 힐데스하임의 사제들이 눈에 띄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고생 많았다. 어찌 보면 그대들도 이번 토벌의 주역인데.”
그 공을 빼앗은 것 같아 불편하다, 굳이 그렇게까지 온전히 말하지 않아도 내 말의 뉘앙스가 충분히 전해진 듯했다.
“굳이 따지자면 전하의 공이 가장 큰 것도 사실이요, 더 깊숙이 따지자면 이 자리에 공이 없는 이가 없지요.”
우문현답을 듣고는 말문이 턱 막혀 씁쓸하게 웃고만 말았다.
“헌데…… 전하의 성력에 문제가 생기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제 한 명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다른 사제들도 눈을 번뜩이며 내 대답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가감 없이 사실대로 답했다.
“내 수준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정도로 오랜 시간 사용한 탓에 과부하가 걸렸다더군. 시간이 지나면 복구된다고 하니 기다려봐야지.”
그 기다림에 기약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했다. 사제들 역시 그것을 눈치챘는지 다소 어두운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처음 봤을 땐 도무지 사제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던 우락부락한 덩치의 남자가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그거 잘 됐군요! 전하의 빛에 가려 제 능력을 온전히 보여드릴 수 없었는데, 이참에 이 몸이 실력 발휘를 좀 하겠습니다!”
그가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치며 말하자 사제들의 표정도 한결 가벼워졌다. 또 다른 사제가 나섰다.
“황자 전하께서 온 뒤로 사상자 및 부상자가 눈에 띄게 줄기는 했으나, 그 이전에도 이곳의 생명을 지키던 건 저 폴스였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 나는 단지 저들의 힘을 한데 모으고, 그저 조금 증폭시키는 보조적인 역할을 했을 뿐이고 본질은 저들에게 있었다.
나는 그 당연한 사실을 잊고 과한 걱정을 하고 있던 거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