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37)
제37화
힐데스하임의 귀족이라고 해서 특정 황자를 지지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누군가를 지지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자신이 지지한 황자가 성황의 자리에 오른다면 그 가문은 훨씬 더 입지가 올라갈 것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현 상황이 유지될 뿐이니까.
그럼에도 바이에른 가는 특정 황자를 지지하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외적으로 지지의 뜻을 밝히고 있지 않았을 뿐, 가주 마르코를 비롯한 몇몇 이들은 3황자를 밀어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허나 지금 그들이 지지의 뜻을 밝힌다면 3황자의 처지가 더욱 난처해질 것은 분명했다.
바이에른이 성황의 미움을 사고도 일정 규모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워낙에 무력이 뛰어난 가문이었기 때문이고, 그 힘이 장차 특정 황자에게 실린다면 결코 무시하지 못할 정도이리라.
그런 바이에른이 3황자에게 힘을 실어주려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3황자에게 가해지는 견제가 더욱 늘어나게 될 것이었다. 게다가 힐데스하임에서 바이에른에 대한 인식이 좋지만은 않기에 3황자가 더욱 불리한 처지가 되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데 황궁에서 만난 3황자가 다짜고짜 바이에른 백작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백작은 내심 3황자가 자신을 스쳐 지나가길 바라고 있었지만……
“잘 지냈나?”
3황자는 자신을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주위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바이에른과 3황자. 그 둘과의 친분을 의식하게 된 이들이 벌써부터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바이에른과 3황자가 엮인다면 여러모로 3황자가 불리하게 될 것이다. 특히나 이미 성황에게 불충한 가문이라 지적받은 적이 있는 바이에른이기에, 물고 늘어진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3황자는 아직 어려서 그런 정치적 상황을 모르고 자신에게 말을 건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에른이었다.
그런데.
“그쪽도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잖아? 옳은 말 한 게.”
3황자의 말에 바이에른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잘한 일이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 성황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올리며 스스로 다짐했던 바이에른 백작이건만……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좌절하고, 후회하고 있었다.
굳이 그렇게 나서지 않았다면 바이에른의 위상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선조들이 물려 주신 가문이 이 꼴이 나지 않았을 텐데, 하면서.
그런 바이에른의 생각이 틀렸다며 바로잡아주는 것이 다름 아닌 3황자였다.
가주로서 살아 온 세월이 수십 년인데, 고작 16살밖에 안 된 3황자가 오히려 자신보다 더욱 어른스러웠다.
“뭘 그렇게 봐?”
3황자의 말에도 바이에른은 감탄 어린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 언제는 황족에게 미움 사는 것을 두려워했던가.
역사를 되짚어 봐도 각 가문들의 위세는 쉴 새 없이 변화했고, 특히나 바른말을 하는 바이에른의 경우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백작가를 유지해 오고 있었고, 그 배경엔 고결함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꺾이지 않는 신념이 있었다.
바이에른의 무력이 손에 꼽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었다.
옳은 일을 위해서라면 목숨마저도 아끼지 않는 용맹한 기사들이 포진하고 있었으니.
그리고 지금까지 바이에른은 주인 잃은 검이라 봐도 무방했다.
누구를 지켜야 하는가. 누구를 위해 싸워야 하는가.
지킬 힘은 있는데 정작 지킬 대상이 없으니 그들의 검은 목적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는데. 그 해답이 비로소 보이는 듯 보였다.
“3황자 전하.”
“왜.”
“혹여나 바이에른의 힘이 필요하시거든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3황자 데미안.
그가 2성의 보유자이든, 저주받은 황자이든, 아니면 근래에 퍼지는 소문처럼 생각 외로 능력 있는 성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힐데스하임의 성황에 본질적으로 가장 적격한 인물이라 여겼을 뿐이다.
* * *
[백작가 바이에른이 충성을 맹세합니다.] [충분한 양의 경의가 모여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검劍의 성지, 바이에른에서 그 열쇠를 찾을 수 있습니다.]참회의 숲에서 장남을 살려준 이후로 바이에른이 내게 좋은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바이에른이 ‘신성’이라는 이름에 가장 걸맞은 가문이라는 걸 알고는 훗날 내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지지해 올 줄은 몰랐다.
“바이에른이 벌써 나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피곤할 텐데.”
“전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역시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3황자 전하 같은 분을 도울 수 있게 되어 영광스러울 뿐입니다.”
단순히 말뿐만이 아닌, 직접 내게 보여 온 충성의 맹세.
대외적으로 지지 사실을 공표하는 것이며, 쉬이 거둘 수 없는 결정이고, 언젠가 후회하게 될 선택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살아남기 위해, 성황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있는 힘껏 발버둥을 치고는 있으나 성공할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지금도 얼마나 수많은 이들의 적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가. 사방에서 노려보는 뜨거운 시선 때문에 몸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도 부끄러워할 일은 한 적이 없었고 그들의 기세에 밀려날 필요는 없었다.
화악.
가슴 속에서 고리를 공명시키며 나를 위축시키는 기운들을 몰아냈다.
은근히 기세를 보내던 이들의 눈동자가 커지는 것을 보았다.
직접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들 중에 누가 1황자의 편인지, 누가 2황자의 편인지 알고 있었다. 나와는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
이제부터는 결코 약해 보여서는 안 된다.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보호받던 시절은 이미 지났고, 지금은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개척해 나가야 하는 시기였다.
“재밌군. 그새 성력이 꽤 커졌어.”
그런 내게 어느새 다가온 이가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럼에도 전혀 반갑지가 않은 1황자였다.
“어렸을 적엔 실력을 숨겨뒀던 건가? 후천적으로 이 정도까지 발전시키는 건 쉽지 않을 텐데.”
“직접 해보고 얘기하지?”
불가능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고위의 성력을 사사 받고 현실에 안주하고 있을 때 머리가 돌아버리는 것 같은 고통을 인내하고 얻어 낸 성과였다.
“재밌군. 참회의 숲 이후로 참 많이도 자랐어. 그때 네 덕에 내가 망신 좀 당했었지?”
1황자의 말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 가슴 속에 이질적인 기운이 차올랐다.
막대한 양의 성력이었다.
성력은 성력인데 내가 알던 것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기운을 품고 있었다. 날카로운 예기를 품은 듯 그의 성력이 내 고리 이곳저곳을 찔러대고 있었다.
1황자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씨익 웃고만 있었고, 나 역시도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허나 실상은 내 가슴 속에서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세 개의 고리를 있는 힘껏 가동시키며, 그리고 성배에 담아두었던 비상 성력까지 쥐어 짜내어 몸속으로 들어오는 1황자의 성력을 밀어냈다.
“……!”
1황자는 자신의 성력이 밀리고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이 새끼가…… 어떻게!”
하지만 놀란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힐데스하임의 수도에서, 그리고 중립 지역 클레이디크에 성력을 키우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 왔고 현자조차 놀랄 만큼 뛰어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성배가 가진 뛰어난 잠재력. 현자의 방대한 지식. 그리고 나를 도와주는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이루어 낼 수 있는 기적이었다.
그런데 나는 가지고 있는 성력을 모두 쥐어짜 내고도 부족해서 성배에 있는 것까지 모두 꺼내야만 했다. 고작 1황자의 가벼운 장난을 뿌리치기 위해서 말이다.
“현타 오네.”
“혀, 현타? 그건 무슨 개소리야?”
“있어. 파우스트 타임이라고. 알 건 없고.”
내가 1황자의 뒤쪽으로 슬쩍 고갯짓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은근 슬쩍 이쪽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방금 거 알려져서 좋을 건 없잖아? 망신당하기 전에 그냥 가는 건 어때?”
1황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자신이 불리한 상황이란 걸 깨닫고는 애써 태연한 척 사라져 버렸다.
“혹시 방금 뭐 하신 건지 여쭤봐도…….”
“안 돼.”
바이에른 백작이 궁금한 듯 물었으나 구태여 알려주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국의 주인, 성황이 나타났다. 그는 오랜만에 보는 아들들을 본 체도 하지 않고 맨 앞 쪽으로 나아갔다.
“성황 폐하를 뵙습니다!”
“성황 폐하를 뵙습니다!”
“성황 폐하를 뵙습니다!”
수많은 인사를 받으면서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저 자태.
다른 건 몰라도 저거 하나만큼은 군주의 자리와 딱 맞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것. 외과 조교수가 되고 나서도 나를 축하한답시고 모인 자리가 얼마나 불편하던지.
그리고 이어지는 성황의 축사는 겉멋만 잔뜩 들어 있는 지루한 것들이었다.
“……하여 클레이디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고 판단, 3황자에게 진실의 경을 선사한다.”
“……!”
“……!”
허나 마지막 이어진 성황의 말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국이 보유한 열 개 남짓의 성물. 그중에서 가장 가치가 낮다고 여겨지기는 하나 성물은 성물. 성황으로서는 정말 큰 인심을 쓴 것이었다.
내가 성물까지 얻고 나자 은근슬쩍 또 몰려드는 박쥐 같은 놈들이 많았지만, 그들을 떼어내 주는 건 바이에른의 역할이었다.
“황자 전하께선 갈 길이 바쁘십니다.”
막 엄청 바쁘게 가야 하는 건 아닌데, 가야 할 곳이 있기는 했다.
백작 마르코 바이에른의 본가가 있는 검의 성지 바이에른. 분명 새로운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열쇠가 그곳에 있다고 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새로운 권능일지, 잠들어 있는 성물일지, 아니면…… 새로운 고리의 개방일지 말이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