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43)
제43화
쿵.
트루드의 심장은 어느 순간부터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뛰고 있었다.
긴장과 전율. 그것이 꼭 달갑지만은 않았다. 이전에 느껴본 적 있는, 데자뷰 같은 감각이었다.
클레이디크의 월식 때. 스펙터에게 정신을 잠식당한 적 있었고 무기력하게 그에 휘둘린 적이 있었다. 아예 정신을 잃고 아군을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군인 3황자에게 검을 휘두르기까지 했다.
그날 트루드에게 남은 수치심은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자 끊임없이 마음을 다잡았다.
힐데스하임의 성기사로서, 그녀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실수를 두 번이나 반복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런 일이 되풀이된다면 그녀는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끊어 버리리라. 차라리 그게 마지막 남은 그녀의 자존심을 지킬 유일한 방법이리라.
흑마법. 그리고 그 상위에 있는 대악마의 힘.
그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면서도, 그녀는 앵거바딜을 손에 쥐면서부터 느껴졌던 형용할 수 있는 힘을 불러냈다. 그러지 않고서는 앞에 있는 악마를 차마 상대할 수가 없었다.
앵거바딜이 지니고 있는 금단의 힘의 아주 일부. 고작 십 분의 일이 될까 말까 한 정도만으로도 트루드의 온몸에서 힘이 넘쳐흘렀다.
콰앙.
트루드는 앞에 있는 어린아이처럼 가볍게 상대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더욱 파괴적인 힘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악마를 처리한다고 처리했지만, 루시퍼가 지닌 힘이 트루드의 정신을 갉아먹는 속도는 훨씬 더 빨랐다.
그녀의 귓가를 간질이는 유혹들. 평소라면 전혀 흔들리지 않았을 테지만 악마의 힘에 의해 심지가 약해진 트루드는 점점 더 흔들리고 있었고.
“오지 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들에게 간신히 정신을 차린 후 소리쳤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의 전신은 쉴 새 없이 요동을 쳤다. 대악마의 기운이 그녀의 몸을 잠식하려 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무기력한 것일까.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기로 했는데. 그렇게 다짐했고 다짐했던 그녀의 결의가 한순간에 무너지려 하는 것일까.
심지어 흑마법에 잠식되었을 때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때야 다른 기사들에 의해 제압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루시퍼의 힘을 얻게 된 트루드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이 자리에는 없었다.
만약 이대로 트루드가 이곳을 빠져나간다면 무자비한 살상이 얼마나 이어질지 몰랐다.
결국 트루드는 온몸에서 힘을 쥐어 짜내며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꺼내 들었다.
모든 이들이 두려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선지 모를 만큼 트루드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마 이대로 루시퍼에게 정신을 빼앗길 거라고 생각할 터. 이미 흑마법에 휘둘린 적이 있으니 더욱 그녀를 믿지 못하리라.
그날의 치욕을 씻고, 앞으로 보일 추태를 미리 막기 위해. 그녀는 스스로의 심장에 검을 찔러넣기로 했다. 성력과 루시퍼의 힘이 공존하고 있는 그녀의 심장을 향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 순간, 문득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전하. 죄송합니다.’
자신을 믿고 받아 준 데미안 힐데스하임.
단순히 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가 떠오른 것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이런 악몽을 겪고 있던 상황에서, 자신을 깨어날 수 있도록 해 준 것이 데미안이었다.
신에 대한 믿음. 흑마법에 의해 그것이 잠시 약해진 상태였지만 3황자는 그녀에게 직접 그 심지를 굳건하게 되돌릴 수 있도록 도와준 적이 있었다.
트루드는 자신의 입술을 꾸욱 씹었다.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면 정말로 그녀는 떳떳해질 수 있을까? 신의 앞에 서서, 당신을 믿지 못해 이런 결정을 내렸노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그렇게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그녀를 나지막이 부르는 이가 있었다.
“트루드.”
그녀는 깜짝 놀라 기절할 뻔했다. 순간 그녀의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오기까지 했다.
트루드는 자신의 앞에 있는 3황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간파하기는 어려웠다. 워낙에 생각이 깊은 터라 그의 심정을 파악하는 건 그녀로선 항상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순간 그의 얼굴에서 답지않게 감정이 엿보였다. 연민이었다.
“네가 항상 너무 많은 걸 짊어지려고 해.”
그 말에 그녀의 가슴이 울컥거렸다. 아무도 알아준 적 없었다. 아무도 말해준 적 없기에, 당연하다시피 살아오고 있었지만 실은 그녀로서는 너무 힘든 삶이었다.
현자의 딸로서, 성기사단의 최연소 단원으로서, 4성의 성기사로서.
받는 기대들이 너무 많았다. 루시퍼의 기운이 그녀의 마음에 있는 그런 균열들을 찾아내어, 그 부정적인 감정들을 더욱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로서는 큰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이 자신이 모시는 3황자라는 사실이 더욱.
[데미안 힐데스하임이 당신에게 따스한 손길을 건넵니다.] [심지가 더욱 굳건해집니다.] [대악마 루시퍼의 힘에 맞설 수 있는 강단이 피어오릅니다.]그녀의 온몸이 불타오르는 것 같던 고통스러운 기운들이 사라지자, 전신이 포근해졌다.
지칠 대로 지쳐 있던 터라 조금은 쉬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트루드는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등을 치는 바닥의 딱딱한 감촉 대신, 한층 더 부드러운 감각이 전해져 왔다.
트루드는 간신히 눈을 떠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자신에게 다가온 3황자가 그녀를 품에 안고 있다는 사실을.
* * *
트루드가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기사의 서약을 통해 그녀와 심적으로 연결된 부분이 있었고, 애써 감춰 왔던 그녀의 감정들이 루시퍼의 힘이 발현되면서 극대화되었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안쓰러웠다. 원래도 알고는 있었지만 어린아이가 짊어지기에는 너무 무거운 감정들이었다.
“에휴.”
성인의 정신을 갖고 있는 나조차도, 그녀가 갖고 있던 감정의 극히 일부를 느꼈을 뿐인데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였다.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대견했다. 사실 그 순간, 트루드로서도 나서는 것이 몹시 두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트루드의 선택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었다. 트루드가 루시퍼의 힘을 통해 악마를 막지 못했다면 그 곳에 있던 이들은 전멸하게 되었을 것이다.
“잘했어.”
그래서 나는 트루드가 깨어나자마자 일단은 따스한 말부터 건네주었다.
그리고 어쨌거나, 대악마의 힘을 통해 잠시 오락가락 하는 듯 보이기는 했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의 의식을 빼앗기지 않았다. 스펙터에게 정신을 빼앗겼던 것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런 식으로 정신력을 키워 나가다보면 트루드는 어느 정도는 자유로이 루시퍼의 힘까지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건 정말로 큰 힘이 될 거라는 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잘하긴 했는데 말이야. 당분간은 내 허락 없이 그 힘 꺼내는 거 금지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직 온전히 다룰 수 없는 힘이다. 만약 내가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고, 성력으로 조금이나마 위로를 건네지 않았다면 결과가 이렇게 가볍게 끝날 수 있었을까.
“……죄송합니다.”
트루드도 그렇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어. 이번엔 분명 잘한 거니까. 그래도 지금 당장은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그것에는 트루드 역시 동의하는 것인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럼, 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어.”
할 말이 좀 더 많기는 했지만, 말하지는 않기로 했다. 트루드는 자존심이 센 아이였고 그 자존심 덕분에 이렇게 훌륭한 기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아챈 것들. 그걸 말하면 트루드가 가진 자존심에는 금이 가게 될 것이다. 나는 그녀를 지켜주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걸 아는지, 트루드는 감동받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트루드가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말에 올라타 있는 병력을 보고는 트루드 역시 신속하게 말 위로 올랐다.
“돌아갈 힘 정도는 있지? 쉬더라도 돌아가서 쉬자. 여긴 위험하니까. 양해 좀 해 줘.”
“예. 괜찮습니다.”
일단 흑마법사들과 악마를 처치하기는 했지만, 흑마법이 워낙 미지의 힘인지라 이곳에 계속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찝찝했다.
* * *
클레이디크로 돌아가는 길.
옆에 있던 트루드가 말을 내 쪽으로 붙이며 귓속말을 하려고 했다. 나는 손짓으로 그걸 저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어떻게 할까요?”
아까부터 우리 일행을 뒤따라서 거슬리게 미행하는 존재가 있었다. 처음엔 우연인가 싶어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쯤 되니 정말 작정하고 따라붙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저대로 따라오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으니까 네가 가서 뭐 하는 놈인지만 확인해 줘.”
“알겠습…….”
트루드가 그렇게 대답하고는 말머리를 돌리려고 할 때.
슈우욱.
화살 하나가 내 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고,
챙.
트루드가 어느새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아 화살을 쳐냈다.
다그닥, 다그닥.
트루드는 어쩐지 잔뜩 화가 난 듯한 얼굴로 빠르게 말을 몰아 그쪽으로 향했다.
난데없는 그녀의 역주행에, 미행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이들은 의아한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트루드가 맞이한 존재를 확인한 순간, 놀라지 않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엘프?”
“미친. 정말 엘프란 말이야?”
이미 이 세상에선 멸종했다고 알려진, 다재다능한 종족 엘프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