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44)
제44화
많은 이종족이 난무하는 이 세계에서도 엘프는 전설 같은 존재였다.
약 500년 전, 수많은 엘프가 일제히 자취를 감추었고 이후로 엘프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엘프가 멸종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시기가 공교롭게도 대악마의 봉인과 맞물려져 있으니 그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는 것이 세상에 알려진 정설이었다.
그런데 멸종했다던 엘프가 눈앞에 있었다.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을 갖고 있으며, 모든 종족에 호의적이고, 특히나 자연과 정령에 친화적이라는 종족.
“어째서 나를 따라온 거지?”
아직 어린애 티를 벗지 못한 최하급 엘프. 엘프가 인간에게도 호의적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면 나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는 아닐 듯했다.
“전하. 살려두었다간 화근이 될 수 있습니다.”
트루드는 걱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온전히 성장한 엘프는 성웅조차도 놀라실 정도로 대단한 힘을 가졌다 알려져 있습니다. 전하께서 만인에게 덕을 베푸시는 것은 알고 있으나 싹을 확실히 잘라두셔야 합니다.”
“……그런 거 아냐. 그리고 내 이름은 미아야.”
엘프 미아의 목소리는 순간 흠칫할 정도로 맑고 청아했다.
“바라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또다시 끼어들려는 트루드를 향해 가벼이 손짓했다. 내 의도를 받아들인 트루드는 말없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가족들을 구해줘.”
미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내 눈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가족? 엘프들이 더 있는 건가?”
“너희들이 죽인 인간들이 있던 곳에 우리 일족이 머물고 있어.”
우리가 죽인 인간들이라면 흑마법사들을 말하는 거였다.
누구보다 순수한 영혼을 가졌다는 엘프들이, 누구보다 타락한 인간과 한곳에서 머무르고 있었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들이 우릴 숨겨주고 있었어.”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흑마법사들이 엘프를 감춰주었다면 엘프의 종적이 흔적도 없이 감춰진 것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만……
“어째서지?”
철저히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만 행동하는, 그를 위해 어떠한 짓도 감수하는 흑마법사들이라면 필시 엘프를 어떻게든 이용해먹었을 터였다.
“나도 잘은 몰라. 그냥 우리가 그들의 연구에 도움이 된다는 것만 알고 있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 사방으로 음습한 기운이 몰려들었다.
“미아.”
미아와는 정반대로 탁하고 거친 목소리. 하지만 묘하게도 미아와 닮아 있는 부분이 있었다.
외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뾰족한 귀와 매끄러운 피부는 미아와 같은 엘프임을 연상케 했으나, 새까만 피부와 살기를 띠고 있다는 점이 그녀와는 달랐다.
다크 엘프.
사악한 기운에 타락해 버린 위험천만한 존재가 사방을 둘러싼 채 나와 트루드를 향해 활을 겨누고 있었다.
“뭐 하고 있는 거냐. 돌아와라.”
“어머니. 이들이 저희 일족을 구원해 줄 수 있…….”
“멍청한 것! 또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게냐!”
위험을 감지한 트루드는 검을 뽑아 들었다. 나 역시도 이 상황이 호의적으로 돌아갈 거라 생각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즉시 성력을 꺼내어 나와 트루드를 보호하는 수호 마법을 펼쳤다.
“검을 내려라! 못 본 걸로 하고 미아를 돌려보내면 우리 역시 없던 일로 해주겠다.”
일촉즉발의 상황. 다크 엘프들이 당기고 있는 화살촉이 검은빛을 발산해대고 있었다.
“전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검을 뽑아 든 트루드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면 죽이지는 마. 무슨 일인지나 알아보게.”
화악.
허락이 떨어지자 트루드가 땅을 박차고 다크 엘프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슈웅.
사방으로 화살이 날아들었다. 트루드는 날아드는 화살을 튕겨내며 다크 엘프를 향해 쭉 나아갔다.
그녀가 놓친 화살들이 내 쪽으로 날아들었으나, 다행히 내 힘으로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미아! 이번 일로 단단히 혼쭐이 날 테니 각오하고 있거라!”
트루드 근처의 다크 엘프들은 들고 있던 활을 내려놓고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다크 엘프들은 흑마법사들이 사용하던 것과 비슷한 힘을 꺼내어 트루드를 상대하려 했지만, 근접전에서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빠르게 도약한 트루드는 칼등으로 다크 엘프를 하나둘 제압했다.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내 쪽으로 달려오는 다크 엘프가 보였다. 미아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다크 엘프였다. 그녀의 단검에서 검은빛의 스파크가 튀었다.
“……하압!”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그녀가 검을 내 쪽으로 찔러넣었다. 빠르게 수호 마법을 펼쳐 그 검을 막으려 했으나……
“미, 미아!”
미아가 내 앞으로 튀어나와 그 검에 찔리고 말았다.
“어, 어머니.”
미아는 바닥에 쓰러져 경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백옥같이 하얗던 그녀의 피부가 빠르게 검은빛으로 물들어갔다.
챙강.
다크 엘프는 자신이 들고 있던 단검마저 내던진 채로 미아를 들어 올렸다.
“대체 왜 그런 미련한 짓을!”
모든 감정이 얼어붙어 있는 것처럼만 보였던 다크 엘프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미아를 들고 있던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눈에선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정신 좀 차려 봐라. 제발……!”
악마와 흑마법사를 통해 겪어 봤던 힘. 다크 엘프의 힘이 동일한 성질의 것이라면 미아는 수 분 내로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살리고 싶으면 도와줄 수 있는데.”
내 말에 다크 엘프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아버지였던 나로서는 그녀를 보고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남아 있는 최소한의 이성을 쥐어짜 내게 말했다.
“혹여나 이 아이를 빌미로 우리에게 과한 조건을 요구한다면 결코…….”
“그런 거 아니니까 비켜보기나 해.”
다크 엘프가 품에 들고 있는 미아를 내려놓았다.
정말 내게 맡겨도 되는 것일까, 여전히 고민 중인 눈치였지만 그녀를 안심시켜줄 여유 따위는 없었다.
빠르게 미아의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깊게 찔리지는 않았지만 미아의 몸 안으로 침투한 흑마법의 기운은 그녀를 빠르게 잠식시키고 있었다.
성기사들처럼 최소한으로 몸의 자가재생을 돕는 성력도 없었기에 악화 속도는 더욱 빨랐다.
성력을 통해 미아의 몸을 자세히 훑었다. 그런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신체 내부의 구조가 인간과는 달랐다.
생체 리듬, 몸을 이루는 기관의 구조, 그에 따른 주요 혈관의 위치까지.
조금만 틀어져도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들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어느 부분에 어느 정도로 성력을 불어넣어야 할지. 어떻게 해야 몸에 부담이 가는 것을 줄이고 성력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을지.
십수 년간 부단한 분석 끝에 얻어 낼 수 있었던 나만의 이론이 온전히 적용될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다크 엘프를 바라봤다. 아직까지도 의사로서의 습관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환자가 살아날 가능성이 점점 낮아질 때 보호자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매번 죄책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럼에도 환자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포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인간들에 비해 성공적으로 치료가 끝날 가능성은 낮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보기로 했다.
오염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에 집중적으로 성력을 모은다. 그리고 흑마법의 기운을 최대한 밀어낸다.
혈관을 일일이 훑으며 대동맥으로 추정되는 곳에 다량의 성력을 집중시켜 성력이 몸 전체에 잘 퍼질 수 있도록 한다.
기본 원리는 같았다. 다만 어디까지나 본능적인 감각으로 치유를 한 것이기에 결과도 같을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했다. 미아의 몸에 있는 흑마법의 기운을 모두 내보내고 나서 그녀를 바르게 눕혔다.
“어떻게 됐지?”
다크 엘프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어왔다.
“일단 지켜봐야지. 나도 확답은 못 줘.”
“…신세를 졌다. 마음의 짐을 가진 채로는 못 사는 일족이니 혹시나 도울 일이 있으면 말 해 줬으면 좋겠군.”
“도움은 됐고. 이야기나 좀 들어보고 싶은데. 너희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엘프와 다크 엘프. 멸종되었다는 정반대의 두 일족이 어떻게 함께 살고 있었는지.
이런 게 궁금해지다니, 나도 참 이 세계 사람이 다 된 것 같다.
고민하던 다크 엘프는 결국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500년 전. 미리 전해지던 예언대로 대악마가 부활하였고, 세계의 종말을 막기 위해 모든 종족이 힘을 모았다.
여기까지는 알려진 것과 동일했다. 하지만 이후의 이야기는 완전히 달랐다.
악마를 상대하며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씨가 말라버린 소수 종족들도 있었다.
엘프는 다행히 몇이 목숨을 부지하여 멸종만은 피할 수 있었지만 악마가 내린 저주를 피해갈 순 없었다.
다크 엘프.
살아남은 모든 엘프는 저주를 통해 다크 엘프가 되었고, 그들만의 색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쟁의 영웅이었던 엘프 일족은 대부분의 힘을 잃어버린 후 인간들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었다.
“지독한 저주지. 정결했던 모습을 잃고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새로 태어난 엘프들이 20년이 지나면 다크 엘프가 되는 것도 그 고통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태초부터 다크 엘프라면 괴로운 줄도 모를 테니.
“인간들이 미울 만하군.”
“모든 인간이 그럴 의도를 갖고 있진 않았을 테니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만 쉽지 않군.”
엘프가 가진 바다와 같은 포용력도 다크 엘프가 되면서 모두 잃어버렸다. 그들의 원망은 인간들을 향해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대도 얼른 떠나줬으면 좋겠군. 이 몸으로 있다 보면 스스로의 감정이 조절이 안 될 때가 많으니.”
알겠다며, 그냥 떠나면 될 일이었다. 인간들을 너무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서는.
하지만 이놈의 오지랖이 또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있나?”
“……뭐?”
“그대들이 갖고 있던 순수한 영혼으로 말이야.”
다크 엘프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