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46)
제46화
아르민 후작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신성 제국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역사를 바꿨던 것처럼 발칸 제국은 그들에게 유리하도록 역사를 바꾸어 놓았고, 그 때문에 아르민 후작은 악마의 존재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긴 설명과 함께 간단한 증거 몇 가지를 보여주자 아르민 후작은 비로소 다크 엘프들에 대해 경계심을 풀었다.
“……그런 일이 있으셨던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진정한 영웅들이시군요.”
그리고 아르민 후작은 다크 엘프들에게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됐어. 그런 인사 받으러 온 거 아니니까.”
다크 엘프들의 속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듯 보였다. 저주를 받으면서 감정이 굳어 버린 것이 맞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런 사과로는 풀리지 않을 깊은 앙금이 쌓여 버린 것이거나.
“그래서 말인데. 후작께서 저들을 조금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제 능력이 닿는 선에서 선대 영웅들을 돕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나 과연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마 도우실 수 있을 겁니다. 말씀드렸듯이 저들에게는 흑마법사들이 만들어 놓은 마법진이 필요하니, 후작께서 흑마법사들을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발칸 제국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흑마법에 관용적이며 때때로 그들을 중요한 일에 사용하기도 한다. 그것이 신성 제국에 퍼져 있는 중론이었으나,
“저희가 흑마법사들과 친화적이라 생각하시면 크나큰 오해입니다.”
그것 역시 발칸 제국을 깎아내리기 위해 만든 헛소문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보고도 못 본 척 넘어가기도 하며 흑마법의 실용성만을 바라보고 알게 모르게 이용하는 이들도 있지요.”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게 아르민 후작의 설명이었다.
“다만 저는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얻어내는 힘인지 알기에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제 관할 지역 내에도 흑마법사들이 숨어 있다는 제보를 들어 수색해 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숨는 데는 워낙에 도가 튼 이들이라.”
나 역시도 얼마 전 흑마법사들이 쳐 둔 결계를 성기사들이 해체하기 전까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으니, 아르민 후작이 저리 말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곳으로 안내해 줘.”
그렇게 말한 건 다크 엘프였다.
“예?”
“흑마법사들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는 곳 말이야. 근방으로만 가면 우리가 찾아낼 수 있으니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허나 말씀드렸듯이 저는 흑마법사들을 보고도 모르는 체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귀인들께서 영웅이라 하셔도…….”
“그건 상관없어. 죽이든 끌고 가든 맘대로 해. 우린 그들이 만들어 둔 결계 속으로만 들어가면 되니까.”
힐데스하임에서는 성기사들이 아예 결계를 휘저으며 내부를 파괴시켜 버렸기에 다크 엘프들이 더이상 머무를 수가 없던 거였다.
“예. 그런데 아직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아르민 후작이 제시한 문제는 내가 내심 걱정하던 것과 정확히 동일했다.
흑마법사들이 사용하는 흑마법은, 많은 생명을 투자하는 만큼 강력한 위력을 보인다.
힐데스하임에서야 다수의 성기사들이 함께했었고, 그들이 사용하는 성력은 흑마법에 상극이니 비교적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다크 엘프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 모인 인원들로만 흑마법사들을 처리해야 한다.
게다가 모르긴 몰라도 발칸 제국에 있는 흑마법사들은 결코 힐데스하임에 있던 이들보다 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힐데스하임에서는 수시로 흑마법사들을 소탕해 왔으니 그들이 오래도록 터전을 잡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발칸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랐으니까.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 것은 뒤에서 눈치만 보던 엘프, 미아였다.
“저기…….”
미아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령이 할 말이 있다고 하는데.”
미아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봤다. 그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정령이 서서히 형체를 드러냈다.
엘프와 함께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는 미지의 존재였다.
「이 아이를 살려줘서 고맙다는 말부터 전하고 싶군.」
듣기만 해도 정신이 확 맑아지는 듯한 정령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 보답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다.」
엘프가 뚜렷하지도 않은 형체의 팔을 내 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녀의 팔에서 쏟아져 나온 기운이 온전히 내게로 들어왔다.
[일시적으로 가지고 있는 힘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또한 보유한 힘을 동료들에게 전이할 수 있습니다.]보유한 힘, 그러니까 내게 가진 성력을 여기 있는 이들에게도 나눠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 아이가 아직은 한없이 연약한 탓에, 나 역시도 극히 일부의 힘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오래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짧은 전투를 지속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정령은 다시 흐물거리며 형체가 점점 옅어져 갔다.
「꼭 이들을 되살려 주기를 바란다. 나 역시 이 아이와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으니.」
그 말과 함께 정령은 사라졌지만 그가 전해 준 힘은 내 몸속에 남아 있었다.
“희망이 좀 생긴 것 같네. 바로 가보자고.”
오래 지체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힘이 언제 사라질지 몰랐으니까.
곧바로 아르민 후작의 뒤를 따라 들판을 달려 나갔다.
* * *
사실 흑마법사들의 거처를 찾는 데 다크 엘프들의 도움까지도 필요가 없을 뻔했다.
이미 힐데스하임에서 한번 겪은 적 있는 것 때문인지, 흑마법사가 있을 거라 추정되는 곳에 가까워질수록 그때의 메스꺼운 기운이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그건 트루드 역시 마찬가지인 듯 보였고, 여기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르민 후작이 유일했다.
“여기가 제보받았던 곳입니다. 근방의 숲까지 병사들과 함께 샅샅이 뒤졌으나 흔적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굳이 숲까지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아르민 후작이 서 있는 곳에서 새까만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으니까.
“우리는 직접 발을 들일 수 있지만 그대들과 함께 가기 위해선 그대가 손 써 줘야겠군.”
다크 엘프 한 명이 내게 말했다. 나는 그 뜻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나와줘요.”
나는 아르민 후작을 뒤로 보내고는 그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고리를 가동시켜 성력을 흩뿌리자, 흑마법의 기운과 쉴 새 없이 뒤섞이더니 공간에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아르민 후작은 자신이 딛고 있던 곳이 흑마법사의 거처라는 것이 차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로소 균열이 모두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졌을 때.
“슬슬 들어가 보죠.”
“이쯤이면 흑마법사들은 우리가 잠입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대비하고 있을 것이다.”
다크 엘프의 말에 모두가 경계심을 더욱 끌어올렸다.
굳이 그녀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와 트루드는 이미 흑마법사를 상대해 본 적 있었기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아르민 역시 균열 내로 들어오자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지독한 냄새가 나는군요.”
확실히, 힐데스하임에서 만났던 흑마법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압박감.
성력을 통해 그것을 조금이나마 떨쳐낼 수 있었다.
어둡게 깔린 길을 향해 막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
파바박.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흑마법사들이 촉에 저주를 발라 놓은 트랩이었다.
파앙.
성력을 넓게 펼쳐 화살을 모두 막아내자 검을 뽑아 든 트루드와 아르민이 무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화살 외에도 여러 가지 트랩들이 깔려 있었다. 정신 공격을 퍼붓는 망령부터, 허상을 보게 만드는 결계, 수만 개의 손이 튀어나와 대상을 끌어당기는 늪지대까지.
허나 지금의 내 수준으로는 시간은 조금 걸릴지언정 해결하는 것 자체에 큰 문제는 없었다.
“전하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조금은 창백해져 있는 얼굴로 아르민이 말했다.
“이런 곳에 병사들을 이끌고 오려 했다니…….”
일반 병사들이, 거기다 성력을 보유한 자도 없이 왔다면 분명히 큰 피해를 입었으리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았다.
아르민 후작이 나를 바라보다가 문득 눈을 날카롭게 떴다.
시선을 정면으로 옮긴 그가, 난데없이 검을 뽑아 들고는 정면으로 거세게 도약했다.
콰악!
아르민의 검이 어느새 나타난 괴물의 배에 꽂혔다. 새빨간 몸집의 거대 괴물. 아르민의 검이 꽂힌 자리에서 핏물이 튀어나왔다.
“키야아아악!”
괴물은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지르며 발작을 일으켰다. 허나, 그것은 아르민의 검에 중상을 입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
사방으로 튄 혈흔 파편이 꾸물거리며 새로운 형체를 만들어 냈다.
순식간에 수가 다섯으로 불어난 괴물이 채 발을 떼기도 전에 아르민은 화려하게 검을 휘둘렀다.
슉,슉, 슈욱-
괴물의 비명 소리와 아르민의 검명만이 이 공간에 울려 퍼졌다.
놈의 몸집을 산산조각 내다시피 한 아르민이 검을 집어넣으려 할 때였다.
“……젠장.”
아르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베어낸 몸집들이 또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무한으로 자가재생, 복제하는 건 아닐 테고, 흑마법사들이 직접 손을 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흑마법의 원천은 살아있는 생명. 고위 흑마법이라면 살아 있는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르민이 입술을 꾸욱 씹었다.
“역겨운 놈들……!”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재료로 준비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고한 생명이 그렇게 받쳐지는 걸 볼 수만은 없었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나지막이 말한 트루드가 검을 뽑아 들었다.
“아르민 경. 이번엔 제게 맡겨 주십시오.”
트루드의 검이 하얗게 불타올랐다.
평소보다도 더욱.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트루드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짐작해볼 수 있었다. 스스로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던 일로 인해 얼마나 성숙해져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신이시여. 추악한 자들을 파멸시킬 힘을 주시옵소서.”
트루드가 검을 크게 대각선으로 베어냈다.
콰아앙!
그녀의 검에서 쏘아진 성력이 꿈틀거리는 괴물의 파편마저 모두 소멸시켰다.
5성의 성기사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검기였다.
“……어떻게.”
아르민 후작은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