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47)
제47화
마력은 성력의 우위에 있다. 신성 제국이 내세우는 신성력이란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것마저도 허황된 소문이었군.’
아르민 후작은 흑마법사의 소굴로 들어와 그 생각을 더욱 철저하게 느끼고 있었다.
중립 지역을 오랫동안 지켜오면서 사제들이 가진 힘을 보아 왔다. 그 덕에 성력이 생각보다 아주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나, 기사로 살아온 그에겐 언제나 무력이 우선이었다.
사제들이 가진 성력은 단지 의술보다 조금 더 즉각적인 치유 효과를 낼 뿐이다. 몬스터를 상대할 때는 큰 가치가 없다. 눈앞에 닥친 위기에 선제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다.
그것이 아르민 후작이 가진 생각이었으나……
“클레이디크에는 성기사가 없는 탓에 제가 큰 오해를 하고 있었군요.”
19살 된 여기사 트루드는 자신도 어찌하지 못한 적들을 가벼이 쓰러뜨리고 있었다.
검술의 경지도 꽤 놀라웠으나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성력이 가진 진정한 힘이었다.
마력은 결코 성력의 상위호환 격이 아니었다. 때때로는 마력보다도 더욱 강한 면모를 드러내는 신성한 힘.
그리고 3황자가 보인 여러 기적을 통해 그 힘이 가진 다양한 면모를 지금껏 봐 올 수 있었다.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웠다.
왜곡된 역사와 소문에 속아 잘못된 편견을 갖고 있지 않았던가.
올바른 힘이 올바른 사람을 만나 일으킨 기적. 지금까지 아르민 후작이 보아 온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적이었다. 그 기적 앞에서 후작은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 힘으로 충분할 거라 믿었건만, 오만이었습니다.”
죄책감이 몰려들었다.
알게 모르게 신성 제국의 이들을 얕잡아 보고 있지 않았던가. 아무리 3황자가 여러 기적을 펼쳐 보였어도, 결국 신성력은 파괴력이 부족하다고 섣부르게 결론짓지 않았던가.
“미안할 건 또 뭡니까.”
3황자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무심한 듯 따스한 그의 말투는 여전했다.
“경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데. 그리고 경도 충분히 도움을 주실 수 있고요.”
그렇게 말하는 3황자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그럴수록 더욱 자신이 작아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더욱 큰 기적이 아르민 후작의 눈앞에 펼쳐졌다.
[성자께서 당신을 어루만집니다.] [일시적으로 성력이 제공됩니다.]3황자가 손을 내뻗자 아르민 후작의 검에 새하얀 기운이 피어올랐다. 성기사 트루드가 사용하고 있는 성력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아르민 후작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생긴 변화는 더욱 근본적인 부분에서도 이어졌다. 그의 가슴 속을 꽉 메우고 있는 다섯 개의 마력 고리가 무언가에 빨리듯이 깨끗이 게워졌다. 그리곤 이내 이질적인 기운이 들어왔다.
평생을 함께 살아온 마력 대신 생소한 성력이 자리를 잡았음에도 어색한 감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온몸에서 활력이 돋고 마음이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발칸 제국 소속으로서 이런 생각을 품는 것이 불경한 일일 수 있으나…… 일시적인 효과라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아아.
이 청량한 기운은 분명 3황자에게서 비롯된 것일 터.
“정녕 성국에서는 이런 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그렇게 묻기는 했으나 아르민 후작도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비록 발칸에서 살아왔음에도 힐데스하임에 대해 듣기는 했고, 다소 편파된 소문일지라도 이런 게 성국에서 가능할 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3황자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고개를 휙 돌렸다. 홀로 괴물들을 상대하는 트루드가 보였다.
아르민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곤 땅을 박찼다.
파앙.
튕겨 나가며 가속도를 붙인 채 검을 휘둘렀다. 그를 좌절케 했던 마물들이 종잇장처럼 베여 사라졌다.
“……어떻게 그 힘을 사용하시는 겁니까?”
트루드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전하께서 행하신 기적입니다.”
납득이 가지 않을 법도 하건만, 트루드는 익숙한 일인 것처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민 후작이 성력을 보유한 채로 가담하자 진행은 일사천리였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마물들을 순식간에 제거해 나가면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속도로 쭉쭉 나아갔다.
흑마법사의 무서움은 곳곳에 숨겨둔 여러 함정과 소환, 저주 마법에 있었지 일대일로 맞닥뜨리는 상황에 있지 않았다.
3황자가 제공한 성력 덕에 흑마법사의 함정을 모두 파헤치자, 그 끝에는 벌거벗은 듯 두려움에 떨고 있는 흑마법사들이 있었다.
사방에 흩뿌려져 있는,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찌그러진 인간의 시체들.
아르민 후작은 자신의 영지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고, 영지민들이 이렇게 희생되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극도로 치밀었다.
머릿속이 뜨거워진 그는 자신의 검에 담긴 성력을 모두 회수했다. 이 따스한 힘은 죽는 사람마저도 안락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도울 것만 같았다.
그래선 안 된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자신들이 가했던 고통을 뼈 깊숙이 새겨주어야만 한다.
아르민 후작은 아무런 기운도 머금지 않은 검으로 흑마법사의 몸을 찔렀다. 일부러 급소를 빗겨냈다. 단번에 숨이 끊어져서는 안 될 놈이었다.
“끄아아아악!”
흑마법사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럼에도 아르민의 형벌은 계속되었다.
거의 이성이 끊길 때쯤,
“그쯤 해둬요.”
3황자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말리지 마십시오. 이놈들은 찢어 죽여야 마땅한……!”
“이미 죽었잖아요.”
3황자의 말에 앞을 바라보자 수십의 흑마법사들이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었다.
한동안 그것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르민은 이성을 되찾고는 검을 회수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성 제국의 규율대로라면 상대가 아무리 지독한 악인이라고 한들 단번에 숨을 끊어주는 것이 마땅할 터인데. 3황자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존중해주었다. 확실히 그간 보아왔던 딱딱하기만 한 신성 제국의 사제들과는 달랐다.
“돌아갈 준비나 하죠.”
3황자의 말을 듣고도 아르민 후작은 한참이나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
정말이지 놀라운 경험이었다.
* * *
돌아가기 전,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무고하게 희생당한 원혼들이 감사를 표합니다.] [수많은 원혼들의 의지가 아득하게 높은 ‘기적’을 이루어 냅니다.] [「천후天候의 권능」이 발동됩니다.]클레이디크에서 월식이 있던 날, 많은 사제들의 힘을 모아 사용할 수 있었던 ‘천후의 권능’을 다시금 사용했다.
워낙에 격이 높은 권능이라 수시로 들러서 다시 사용해야 할까 싶었지만, 원혼들의 존재 덕분에 그런 귀찮음은 덜 수 있을 듯 보였다.
[공허의 균열에 빛이 차오릅니다.] [신성한 기운이 다크 엘프의 정화를 돕습니다.]그리고 혹시나 싶어 사용해 봤던 천후의 권능은 다행히도 내가 바라는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눈에 띄는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저들도 찬란한 과거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럴 수가.”
다크 엘프들은 스스로의 몸에 찾아오는 변화를 직감하고는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처음 만났을 때의 싸늘한 눈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직은 엘프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지 못했지만 당장에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우선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결할 문제였고. 어쨌거나 당장 저들의 상태가 악화되는 것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고맙다.”
그렇게 말하던 다크 엘프가 한참이나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럴 입장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할 수 있겠나?”
다크 엘프의 앞에는 엘프 미아가 서 있었다. 얼굴이 눈물에 범벅 된 채로.
그 부탁이 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 아이는 여기 있기 힘들겠지?”
“……전에 있던 곳은 흑마법의 기운이 약해서 큰 상관이 없었는데 여기는 좀 위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미아는 가족들과 떨어지는 것이 정말 싫은 것처럼 보였지만 아무래도 내가 더 공감할 수 있는 쪽은 부모의 마음이었다.
저렇게 말하는 다크 엘프도 속으론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겠는가를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으아아아앙.”
미아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는 다크 엘프의 다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지만 다크 엘프는 미동도 않은 채로 차갑게 말했다.
“어리광부리지 말고 얼른 가.”
그렇게 말하는 다크 엘프가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것을 보고는, 결코 그녀가 나쁜 부모라 생각할 수 없었다.
미련을 떨쳐내기 위해 미아를 데리고 균열을 빠르게 나왔다. 미아는 나이에 비해 꽤 성숙한 아이였고 금세 울음을 그친 채로 잘도 뒤를 따라왔다.
클레이디크로 돌아가는 길, 미아에게 귀를 가릴 모자를 씌우고는 신신당부를 해 두었다.
“웬만하면 네가 엘프라는 사실은 감추는 게 좋을 거야. 마을로 들어가면 모자는 절대 벗으면 안 돼. 알았지?”
“답답해요.”
“그래도.”
“정령이 뭐라고 말하는지도 잘 안 들린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미아가 허공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어? 뭐라고?”
그렇게 정령과 한참동안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미아가 내게 손짓을 했다. 손짓의 의미를 알아차린 나는 자세를 낮추어 귀를 그녀의 입에 가져다 댔다.
“뒤를 따라오고 있는 사람들이 있대요. 한참 전부터.”
그녀가 내게 속삭였다. 트루드와 아르민 후작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궁금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아에게 물었다.
“한참 전이면…… 언제부터?”
“처음 이 아저씨를 만났을 때부터요.”
미아가 손가락을 가리킨 건 다름 아닌 아르민 후작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