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48)
제48화
아르민 후작은 발칸 제국의 귀족 사이에서 특출난 사람이었다.
손에 꼽힐 정도의 무력을 보유한 것은 물론이고, 바른 성품과 높은 인망으로 제국민들이 우러러보는 고위 귀족이었다.
법보다 칼이 훨씬 가까운 세상에서, 낫을 들고 일어난 농노들이 아르민 후작을 따른다면 제국의 주인이 바뀌는 것도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
때문에 귀족들과 황제에게 많은 견제를 받고 있었고, 아르민 후작이 클레이디크의 수비를 맡게 된 것도 제국 내의 세력 싸움에서 낙오시키고자 하는 황제의 계략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군.”
헌데 굴러가는 꼴이 점점 더 아르민 후작에게 유리해져만 가고 있었다. 클레이디크의 전장에서 몸소 활약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발칸 제국 전역으로 퍼지고 있었다.
아르민 후작을 견제하기 위해 클레이디크로 보냈던 발칸 제국의 황제로서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에는 아르민 후작이 적국의 황자와 어울려 지낸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자긍심을 가져야 할 발칸인이 미개한 신성 제국 쪽 사람과 어울려 지낸다니요.”
“틀림없이 역모를 꾸미는 걸 겁니다. 심지어 클레이디크에서 양쪽 병력이 한 제국민처럼 가깝게 지낸다고 합니다. 그 병력을 일으켜 언제 우리를 향해 달려올지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클레이디크는 워낙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었기에, 단지 양국 병력이 화합한다는 것만으로 아르민 후작을 벌하기엔 명분이 부족했다.
“꼭 군사를 일으켜 벌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고민하던 발칸 제국의 황제 앞으로 나선 건 중앙 지역을 관할하는 백작이었다.
과거부터 빼어난 암살자들을 여럿 배출해 온 백작가였다.
“저희 쪽에 있는 암살자 세 명이면 충분할 겁니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아르민 후작의 숨통을 끊어놓겠습니다.”
조금은 과한 처사가 아닐까 싶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명분이 부족해서였을 뿐. 아르민 후작의 암살에 성공한다면 황제의 입장에선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으니 최고의 그림이었다.
“……허나 세 명으로 아르민 후작을 처리할 수 있겠는가?”
빠르고 신속하게 처리하면서도 은밀히 행해져야 하는 일이었다. 사람의 수가 더 늘어난다면 그것도 곤란하겠지만, 발칸 제국 제일의 기사라 불리는 아르민 후작이라면 암살자 셋으로 부족할 수 있었다.
“믿어 주십시오. 기사들은 제 힘이 최고라 믿는 거만한 자들입니다. 허나 그들의 강점은 적을 앞에 맞닥뜨렸을 때나 발휘되는 것이지, 뒤에서 달려드는 적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말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미 자신의 가문에서 골로 보낸 기사들만 몇이던가.
그리고 실제로 그 기사들과 암살자가 정면으로 붙었다면 상대가 안 됐을 테지만, 암살자는 자신의 기척을 숨기고 오랜 시 간동안 기회를 엿본다.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을 기다리며, 기회가 찾아오면 놓치지 않고 붙잡는다.
백작의 가문에서 이미 수많은 암살을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 황제는 그를 믿어 보기로 했다.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르민 후작과 같이 적국에 마음을 넘긴 파렴치한 작자를 베어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나, 암살자들의 수고로움도 있으니 그의 영지에 1할만 주십시오.”
“아르민 후작의 영지라.”
“예. 후계자가 있으니 모든 영지를 제국에서 거둬들이는 것은 불가능할 테지만, 아르민 후작이 죽고 나면 1할 정도를 빼앗을 명분 정도는 생기지 않겠습니까?”
잠시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 보던 황제는 그것이 퍽 합리적이라 생각했는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단, 실패할 경우 위험 부담이 큰 일이라는 것만 알아두게.”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
아르민 후작에게 보낸 암살자 셋은 어려서부터 백작가로 영입되어 오랜 수련을 거친 이들이었다.
수많은 시험을 통과하며 자신의 역량을 입증해 낸 이들. 실제로 지금까지 여러 어려운 의뢰를 성공적으로 해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이 귀환할 날짜가 되어도 돌아오지를 않았다.
백작은 점점 불안해지기는 했으나 그들이 실패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체의 증거도 남기지 않고 아르민 후작을 처리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 최고의 상황을 기다리느라 지체되는 것뿐이리라, 그렇게 믿으며 계속되는 제국의 독촉을 돌려보냈다.
그로부터 보름을 더 기다리고서 돌아온 소식은 백작이 그려 놓은 그림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암살자 하나. 임무를 실패하고 살아나오는 것이 고작이었단다.
“뭐?! 무슨 짓을 했길래 너희 세 명이서 실패를 했다는 거냐?”
백작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단순히 아르민 후작을 죽이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제국의 황제의 눈에 들고, 아르민 후작의 영지를 빼앗아 후작의 작위를 부여받을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그런데 자신만만하게 성공할 수 있을 거라 했던 암살은 실패로 돌아갔고, 심지어 나머지 암살자 둘은 잡히고 말았단다.
“어째서 자결을 하지 않았더냐!”
임무에 실패했다고 판단되는 순간, 적에게 잡히게 된다면 암살자의 진원지가 어딘지 밝혀질 수가 있었다. 그러니 그 상황에서는 스스로의 숨을 끊는 것이 암살자가 가지고 있는 기본 행동 강령이었다.
“그, 그게…… 신성 제국의 힘 때문입니다.”
“뭐?”
“저희도 수 차례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아르민 후작이 무장도 하지 않은 채 홀로 출거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달려들었으나……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근처에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이냐? 네 놈이 지금 명을 늘리기 위해 거짓부렁을 내뱉는 것이라면…….”
“결코 아닙니다. 당장 제 목숨을 앗아가셔도 좋으나, 암살자로서의 불명예만은 피하게 해 주십시오.”
“불명예야 네놈이 실패한 순간부터 피할 수 없는 것이지. 게다가 아르민 후작이 알고 있었다는 것 또한 네놈들의 실력이 부족하여 기척을 드러냈다는 것 아니냐?”
최고의 암살자들이 철저히 기척을 숨겼다면 아르민 후작이라 하여도 결코 느낄 수 없었을 거다. 그런데 이들이 달려든 순간 알아차린 것도 아니고, 미리 병력을 대기 시켜 놓았을 정도라면 암살자들이 방심하고 그 전에 실수를 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 것 또한 아닙니다. 세 명 중 누구도 단 한 번도 기척을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틀림없이 신성 제국 쪽 놈들의 짓이 분명합니다.”
“신성 제국 말이냐?”
“예. 적국의 3황자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자들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자결을 하려고 하니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저야 간신히 빠져나왔으나 그 둘은 결국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네놈이 한 말 중에 분명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당장 제 목을 치셔도 좋으나 제가 목숨을 구하기 위해 거짓을 고한다는 불명예는 거두어 주십시오.”
백작은 자신의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가 암살자들을 거둘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충성심과 의리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애써 키운 암살자들이, 주인을 베는 검으로 변질되어 버릴 테니까.
“젠장!”
그렇다면 이 자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이 사실을 어떻게 황제에게 전해야 할지, 백작의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 * *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아르민 후작은 내게 고개를 숙였지만 감사 인사를 받을 건 내가 아니었다.
“그 말은 이 아이한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가 후작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건 순전히 엘프 미아의 덕이었다.
미아는 아직 어려서 엘프가 가지고 있다는 권능의 대부분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정령 역시도 스스로의 힘 대부분이 봉인되어 있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눈치챈 낌새 덕분에 아르민 후작의 암살을 막을 수 있었다.
“고맙다.”
“……아니에요.”
후작의 인사를 들은 미아는 부끄럽다는 듯 그 시선을 피했다.
이렇게 순수한 엘프가 어떻게 전부 그렇게 다크 엘프로 타락하게 된 것일까. 악마의 저주라는 건 참 무서운 거였다.
그리고 지금 다크 엘프가 된 이들을 전부 엘프로 돌려놓는다면 더없이 좋을 테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고, 최소한 미아가 다크 엘프가 되는 것만은 어떻게 해서든 막고 싶었다.
지금 내가 가진 성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
엘프의 신체 구조를 조금 더 명확히 이해하고, 성력의 경지를 올리든 의술을 사용하든, 내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서 미아를 지키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막연한 선행을 베푸는 일에 벗어난 내가 어째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걸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내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 정답을 알 수가 없었다.
엘프의 순수함이 내게 전해져 오는 것 때문일까, 아니면 미아를 보니 꼭 전생의 내 아이들이 생각나서 유독 잘해주고 싶은 것 때문일까.
괜한 생각은 치워버리기로 했다. 지금 이런 고민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자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아르민 후작을 해하려 했던 두 명의 암살자들이 꽁꽁 묶여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배후를 밝히지 않았고, 자신들을 죽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신성 제국의 사람들이 신에 대한 신념이 있고, 기사들은 기사도에 대한 신념이 있듯, 저들도 자신만의 신념이 있었다. 저 정도라면 무슨 수를 써도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십니까.”
저만한 암살자들이라면 신성 제국의 사람들은 아닐 것이고, 발칸 쪽에서 일어난 정치 싸움에 의한 것일 터였다.
나와는 무관한 일.
선택은 아르민 후작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내게 의견을 묻는 이유는 알 수 있었다.
“허나 제 뜻대로라면 전하께서 반대하실 수도 있는 일입니다.”
“상관없습니다. 뜻대로 하시죠.”
“……알겠습니다.”
아르민 후작이 검을 꺼내 들고는 암살자들에게 다가갔다.
과거의 나였다면. 의사로 살아가던 나였다면. 아르민 후작의 뜻에 분명 반대했을 거다.
흉악한 범죄자가 병원에 실려 오더라도 살려야만 했고, 그게 당연한 거라고 배워 왔다.
하지만 내심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반대되는 감정들이 있었고, 이 세상에선 굳이 그 감정들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죽어야 할 자들은 죽어도 마땅하다.
아마 전생에서 친하게 지냈던 바보들이 들었다면 기를 쓰며 반대했을 말.
나는 달라졌다.
그 사실이 가슴 속으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아르민 후작이 검을 들어 올렸을 때,
“저기 좀 봐. 숲이 참 예쁘네.”
엘프 미아의 몸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렇게, 아직 달라지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