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51)
제51화
파우스트가 3황자를 따르는 이유는 분명히 그 가능성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의 3황자는 과거에 비해서 분명 입지를 많이 올려놓은 상태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두 황자들에 비해 밀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파우스트가 3황자를 따르는 이유는 3황자라면 이 세상을 올바로 돌려놓을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그 말을 결코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현자로서도 기대해 볼 만큼 3황자는 선량한 사람이었다.
허나 현자는 최근 들어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전하께서 황좌에 오르지 못하신다면…….”
차라리 쥐 죽은 듯 살았으면 황위에 오른 다른 황자가 3황자를 조용히 살게 내버려 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3황자는 다른 두 황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적도 있었기에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건 현자 본인 때문이 아닐까. 제가 3황자에게 괜한 길을 걷게 한 것이 아닐까. 스스로가 그런 걱정에 빠져 있었다.
“늙은 이 몸이야 걱정할 것이 없다지만…….”
괜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신의 뜻이 어떤 것인지 정말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난데없이 신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신이시여.”
다섯 번째 고리를 파괴하며 날아가 버린 알현의 권능. 그 이후로 현자가 신의 목소리를 들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신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며 현자에게 자신의 뜻을 전해 왔다.
이건 세상이 신의 뜻대로 굴러가지 않고 있거나 현자에게 막대한 임무를 전하기 위함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곧 당신의 곁으로 갈 제게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이어 들려온 신의 첫 음성을 들은 현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이 힐데스하임의 군주로 선택한 이는 현자가 돕고 있는 3황자 데미안이었다.
그러나 곧 이어 데미안이 어떤 사람인지 어떠한 비밀을 품고 있는지에 대해 들었을 때, 현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전하께서 정말로…….”
이곳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상. 신이 그곳에서 직접 불러온 이가 바로 데미안이었다. 이제야 데미안이 어린 나이임에도 어찌 그리 총명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의술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역시 전하께서는 전생에서도 훌륭한 분이셨군요. 타인을 돌보다 스스로의 목숨을 잃으신 분이라니.”
들어 보니 그 세상에서도 권위가 높은 인물이었다는데, 그런 사람이 제 목숨을 그리 희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현자에게는 크나큰 감명을 전했다.
“허면 제가 전하를 어찌 도우면 되겠습니까. 저는 그분이 가지신 능력에 대해서는 더없이 무지한 노인일 뿐입니다.”
신에게 전해 들은 3황자 앞에 놓인 난관들. 하나하나가 해결하기 쉬운 문제는 아니었지만, 현자 자신이 돕는다면 조금씩은 해결할 수 있을 문제들이었다.
첫 번째로는 의술.
3황자는 클레이디크에서 의술을 조금씩 드러내 보이고는 있었으나, 자신이 가진 전부를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 세상의 상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기 때문.
게다가 힐데스하임 본국에 3황자가 의술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다른 두 황자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이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선에서 3황자가 의술을 발전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며, 의술과 더불어 성력 또한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성력과 마찬가지로 의술은 만능이 아니다. 하지만 그 둘을 결합한다면 더없는 발전을 이뤄 낼 수 있다.
현자는 의술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했기에 그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지만, 신이 직접 그렇게 말했으니 성력 역시 발전시킬 필요는 있을 것이다.
3황자 역시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어렸을 적부터 스스로의 성력을 발전시키는 데 많은 공을 들여왔었고.
“전하께는 너무 힘든 길이 될 듯싶습니다.”
3황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현자로서도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마음 한편이 시원해진 것은 답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리라.
현자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고, 주어진 길도 명확해졌다. 피할 이유가 없었다.
* * *
“신께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현자는 많은 것을 들었노라며 내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지지하겠다고 뜻을 전해 왔다.
“전하께서 현재 고민이 있으신 것 또한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전하를 도울 의원들과 다크 엘프의 저주를 푸는 일.”
내 고민을 정확히 알고 있는 걸 봐서는 정말로 내가 모르는 무슨 수를 썼거나, 아니면 현자의 말대로 신이라는 작자에게 들은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경이 얼마나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온전히 받아들이긴 힘들겠지. 괜히 경까지 연루됐다가 피 볼 수도 있고.”
의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일. 사체를 해부하는 과정은 발칸 제국에서마저도 금지되어 있을 정도로 흉악한 범죄로 여겨졌다.
한국에서도 해부 실습은 기증받은 시체에 한해 진행하고, 해부가 끝이 나면 모두가 기도를 올릴 만큼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아무리 현자라 한들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일.
하지만 현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전하의 뜻에 의심을 품지 않을 겁니다. 전하께서는 전하만의 방식으로 이제껏 많은 이들을 구원하셨지 않습니까. 당사자의 동의만 구한다면 죽은 이의 몸에 손을 대셔도 의원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의 능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들이 그들이니.”
현자는 그것마저도 알고 있었으며 받아들일 수 있노라 말했다.
“……하지만 힐데스하임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없을 텐데.”
신성 국가 힐데스하임. 비록 신성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이 타락해 있었지만, 이들에게 전해져 오는 규율 몇 가지는 결코 깨지지 않고 유지되어 오고 있었다. 죽은 이의 몸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그것 역시 몇 가지 남은 규율 중 하나였다.
“전하. 힐데스하임의 사상은 모두 신께서 내리신 말씀을 토대로 초대 성황께서 정립하신 것입니다. 허나, 애초부터 인간의 해석이 포함된 탓에 그 뜻이 온전히 신의 것이라 할 수 없으며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질된 것도 있지요. 모든 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신의 뜻이라 할 수 없습니다.”
현자의 말을 듣자 힐데스하임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현자처럼 생각이 깨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현자 역시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세상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이를 듯합니다. 성국까지 전하의 뜻이 전해지는 것은 추후로 미루되, 전하의 뜻을 펼치는 데 거리낌이 없도록 제가 돕겠습니다.”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다른 건 둘째치더라도, 내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홀로 품어 왔던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다른 이들이 내게 마음을 열어 놓을 만큼 업을 쌓아야 한다는 것 아닌가.
“전하. 물론 답답하실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전하께서 당장 원하시는 것들은 4성에 이르시게 되면 모든 게 해결되실 거라 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능력을 전부 주시지 그랬대.”
“아무래도 전하께서는 다른 차원에서 넘어오셨다 보니 신께서 당장에 많은 힘을 주실 수도 없었으며, 지금도 악의 무리들의 방해 공작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고 계십니다.”
“악의 무리?”
“예. 흑마법사들입니다. 이전에 만나 보았던 이들과는 차원이 다를 만큼 가혹하고 파괴적인 힘을 가진 이들입니다. 대악마의 봉인 역시 그들이 풀어내고 있으니, 결국 전하께서는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고리를 다섯 개까지 늘리게 되실 겁니다. 또한 고리가 다섯 개에 이르면, 전생의 전하께서 이루지 못한 한을 풀어내실 수 있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전생에서 이뤄 내지 못한 한이라. 딱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현대 의학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했던 것들.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꾸준히 연구를 진행했던 것들 말이다.
성력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만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고리를 더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성력의 경지를 급속도로 올리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성력은 많은 이들의 신념을 끌어모을수록 더욱 강해집니다만, 당장에 큰 효과를 보기는 힘듭니다. 언젠가 전하께서 성황이 되시어 불쌍한 이들을 돌보신다면 초월의 경지에까지 이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물론 성황 정도 된다면 정말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 좋으니 꽤 큰 발전을 이룰 수 있다 치더라도, 클레이디크에서 숨어 살다시피 하는 나로서는 크게 효과를 볼 수 없는 방법이었다.
“둘째로는 성소로 가는 것이지요. 신께서 직접 힘을 하사하기 수월한 곳이니.”
“성소라.”
현자의 반응을 봐서는 그곳 역시도 쉽게 갈 수는 없는 곳인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니 딱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브레멘?”
“알고 계시는군요.”
현 발칸 제국의 수도. 그리고 힐데스하임이 처음 싹을 틔웠던, 과거 힐데스하임의 수도.
“역사서에서 봤어.”
수백 년간 이어진 제국 간의 전쟁 끝에 힐데스하임은 발칸 제국에 수도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래서 성소라 불리던 브레멘. 그곳에 많은 성물과 힘을 놓아둔 채로 도망치게 되었다고.
“참 난감하네.”
지금이야 힐데스하임과 발칸이 휴전 중이지만, 언제 또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적국의 황자를 자기네들 수도로 발 들이게 해 줄 리 없었다.
성황끼리의 대면이라면 몰라, 나 같은 떨거지 황자는 본 체도 하지 않을 거다.
“걱정 마십시오. 신께서 그걸 갑자기 말씀하신 데는 다 이유가 있으니.”
현자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내게 작은 구슬 하나를 내밀었다.
“이번 대업에 꼭 필요하실 겁니다. 가급적이면 쓸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신께서 직접 하사하신 것이니 언제나 품에 가지고 계십시오. 전하의 목숨을 지켜 줄 겁니다.”
* * *
그렇게 말한 현자가 사라지고, 아르민 후작이 나를 찾아온 건 그로부터 며칠 뒤의 일이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급하게 찾아오셨습니까?”
“전하. 몇 시간 전 저희 제국에서 황태자 전하의 전언이 도착했습니다.”
“발칸 제국이요? 근데 왜 저한테…….”
“그게…… 황태자께서 전하를 직접 알현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말입니까?”
발칸 제국과는 전혀 연이 없으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르민 후작 역시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꺼림칙합니다. 필시 좋은 일은 아닐 듯하니, 제가 그럴싸한 핑계를 대어…….”
“괜찮습니다.”
발칸 제국의 황태자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부른 것이든, 나는 가서 얻을 것만 얻어 오면 그만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