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53)
제53화
발칸 제국의 황태자가 나를 부른 이유를 아르민 후작에게 전해 들었다.
“전하와 마찬가지로 심성이 훌륭하신 분입니다. 제가 감히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것이 퍽 우스우나, 황태자께서는 꼭 보답할 테니 이번 일을 간절히 부탁하셨습니다.”
아르민 후작이 제법 정신이 바로 잡힌 귀족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르민이 이렇게까지 칭송하는 황족이라면, 적국에 있는 이라도 만나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혹시나 일이 잘 풀린다면 황위를 쟁탈하는 데 있어 발칸 제국이라는 막대한 지원군이 생길 수 있었다. 물론 어떻게 써먹느냐에 따라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일 테지만. 더군다나 내가 향해야 하는 성소 ‘브레멘’에 출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고민하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이 일이 잘 풀렸을 때 주어질 혜택이라는 점이었다.
“아르민 후작. 경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라고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경이 알고 있다고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전생에서 유독 겪었던 지독한 기억들이 떠오르며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당신이 그러고도 의사야?’
‘이거 의료 사고 아니냐고. 내가 고소할 거니까 두고 봐! 사람을 죽여놓고 그렇게 뻔뻔하게 말할 수 있어?’
‘이 살인마. 네가 죽인 거야. 다른 병원에선 별문제 아니라고 했는데, 어제까지 멀쩡했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돼!’
고인이 된 환자의 가족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당시에는 그렇게 따지는 유가족들에게 침묵하며 그 슬픔을 위로해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세상에 와서까지 그런 심란한 일을 겪고 싶지는 않았다.
젠장. 이게 똑바로 된 생각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래, 이번 생은 좀 편하게 살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던가.
마음을 정리한 뒤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아르민 후작을 향해 말했다.
“그분의 생각은 다를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황태자께도 일러두었습니다. 전하께서도 손 쓸 수 없는 지병을 앓고 계실 수 있다고. 황태자께서도 그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지하셨으며 혹여나 상황이 잘못되더라도 받아들이겠노라 약조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르민 후작이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무리한 부탁인 줄 알고 있습니다. 힐데스하임의 힘을 발칸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전하께 어떠한 해가 갈지도. 허나 부디…….”
그 눈빛을 보고도 차마 모른 척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그렇게 고개 숙이지는 마시고요.”
“예? 그럼 혹시…….”
“상태 정도는 확인해 드릴 테니까 저도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아르민 후작의 얼굴이 밝아졌다. 제 일도 아닌데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면 황태자와의 유대감이 얼마나 돈독했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고, 제 선에서 되지 않는다면 황태자 전하께 부탁드려 보겠습니다.”
“그건 제가 황태자를 만나서 말씀드릴 테니 경께선 신경 쓰지 마십시오. 곧바로 떠날 채비를 할 테니 길안내를 할 병사 하나만 붙여 주십시오.”
그 말에 아르민 후작은 직접 호위를 맡겠노라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다고 몇 번이나 일러두었음에도 아르민 후작이 뜻을 꺾지 않아, 결국 함께 발칸 제국의 수도로 향하게 되었다.
“의원들은 어째서 데려가시는 겁니까?”
그리고 내가 칼로스를 비롯한 의원들을 여럿 거느리고 출발하자, 아르민 후작이 의아함을 표했다.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도움 말입니까?”
“예. 이번 치료가 성공한다면 이들도 보고 배우는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클레이디크에서 질병으로 죽어 나가는 이들의 수도 줄어들겠지요.”
“……허나 이들은 저희 발칸 제국의 의원들 아닙니까.”
“제가 발칸의 의원들을 멋대로 써먹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찮으십니까?”
내가 웃으며 말하자 아르민 후작이 당황한 채로 열심히 손을 내저었다.
“그, 그런 뜻이 아니옵고…….”
“알고 있습니다. 좋은 뜻으로 하신 말인 거.”
내가 어째서 발칸 제국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인지. 왜 내 사람도 아닌 발칸의 의원들을 성장하도록 돕는 것인지 의아할 터였다.
“모르겠습니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발달되지 않은 의학에 자괴감을 느끼고, 살리고 싶은 이를 살리지 못하는 이들이 좌절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클레이디크가 발전하면 양국 모두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은 저들이 사제들에게 밀려 마음고생 하는 것을 보는 게 여간 가슴 아팠습니다.”
“좋은 지도자시네요.”
“전하께 그런 말을 들으니 부끄럽습니다.”
아르민 후작은 썩 간지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낯간지러워서 괜히 고삐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이랴!”
* * *
발칸 제국의 영토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힐데스하임의 황자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겨야만 했다.
외교적인 문제로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황태자의 사적인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가는 것이었으니, 나나 황태자나 이 사실을 감추는 편이 좋았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소.”
마중 나온 황태자의 모습은 가히 일국의 군주라 하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풍당당했다. 힐데스하임의 다른 황자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닙니다.”
나를 바라보는 황태자의 시선 역시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애써 숨긴다고 숨기고 있었지만 간절함과 조급함이 엿보였다.
어머니가 사경을 오가고 있는 상황이니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나 역시도 전생에서 부모를 잃는 슬픔을 경험한 적 있으니.
“그대에겐 미안한 말이나 가신들이 그대를 만나보길 바라오.”
황태자가 원해서 그러는 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힐데스하임과 발칸, 두 제국의 관계를 생각하면 가신들이 분명 난리를 부렸을 것이 분명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해해 줘서 고마울 따름이오. 다소 까칠한 면이 있는 자들이라 그대를 불편하게 할 것이 염려스럽소만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길 바라오. 물론 정도를 넘는다면 내가 나서 제지할 테지만…….”
“염려 마십시오.”
귀족이 어떤 자들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황족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듯하면서도, 국력이 기우는 순간 적국으로 달라붙는 교활한 자들이다.
또한 황족이 귀족의 우위에 있다고는 해도 그것이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기에 황태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황태자와 아르민 후작을 봐서라도 어지간한 건 넘어갈 요량으로, 황태자의 뒤를 따랐다.
넓디넓은 황태자의 궁궐 내에서도 유독 화려한 접견실로 들어가자, 이미 앉아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힐데스하임에서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환대하는 척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나는 경계심과 적대감으로 온몸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반갑습니다. 힐데스하임의 셋째 황자 데미안 힐데스하임입니다.”
황태자를 따르는 가신들이 자신의 영토와 작위를 하나둘 밝혔다. 공작과 후작, 그리고 서열이 높은 백작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흠흠. 아무튼 이 자리로 인해 미래의 발칸과 힐데스하임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질 수 있을 듯하여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하는 말과 내비치는 눈빛이 완전히 다른 발칸 제국의 공작이었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황태자 전하께서 황위에 오른 뒤에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앉아 있던 다른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3황자께서는 성국에서 입지를 쌓아가셔야 하는 입장 아니십니까. 혹여나 3황자 전하께서 저희를 도왔다가는 가뜩이나 어려운 처지에 더욱 난처해지실까 두렵습니다.”
“신분을 숨긴 채 황비께서 계신 궁으로 들어가시는 것도 여간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의원의 신분으로 들어가신다 하여도, 신성력을 사용하시면 필히 눈치채는 이들이 생길 것입니다.”
나를 위하는 척하면서도 목소리에서는 은근히 나를 압박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알아서 하겠소. 그런 것 정도야 어련히 알고 있으니.”
괜히 저들의 기운에 밀렸다가는 얕보여 내가 원하는 대로 치료하는 데에도 지장이 생길 수 있었다. 어느 정도의 선에서 잘라낼 필요는 있었다.
“흠흠. 걱정돼서 드리는 말씀인 겁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거요.”
노련한 정치꾼들일 가신들도 나와 말다툼이 되지 않았다. 적잖이 놀란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걸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오. 내 나름대로 지킬 건 지키면서 방도를 찾아보겠으니 괜히 간섭해서 일을 그르치진 않길 바라오.”
그렇게 휙 내던지고는 황태자에게 말했다.
“그럼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황비의 상태를 바로 살펴봐야겠습니다.”
황비가 위급한 것도 위급한 거였지만, 이 숨 막히는 공간에는 일 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이미 힐데스하임에서도 지긋지긋하게 겪은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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