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57)
제57화
“어, 어머니!”
발칸 제국의 황태자는 황비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갔다.
“제국의 황제가 될 자가 어찌 방정맞게 구는 것이냐. 행동 하나하나에 엄숙함이 담겨 있어야 하거늘.”
쌀쌀맞게 구는 황비의 모습을 지켜보는 황태자의 안색에는 서운함보다는 더없는 기쁨이 벅차오르고 있었다.
“몸은 좀 괜찮아지신 겁니까?”
아직 기력이 없어 보이기는 했지만,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고 있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안색이 회복되어 있었다. 그것이 3황자의 치료 덕분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성국의 황자께 신세를 졌다.”
그렇게 말하며 황비가 흘깃 3황자가 서 있는 쪽을 바라봤다.
“정말 고맙소. 이제 어머니의 병이 완치된 것이오?”
그렇게 묻는 동안에도 그는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근본적인 치료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회복된 것일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푹 쉬면서 기력을 회복하시면 건강에 큰 문제는 없으실 겁니다. 허나 이전처럼 활발히 활동하시기는 벅찰 수 있습니다. 황비께서 무리하시지 않게 황태자께서 잘 지켜보시고, 식사도 제때 잘 챙겨주십시오.”
“허!”
황태자는 그제야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도 모르게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평소라면 황비의 호통이 귓가에 요동쳤을 테지만, 지금은 황비의 눈가도 씰룩거리고 있었다. 애써 눈물을 참는 모습이었다.
황태자는 그런 황비의 모습이 더욱 안쓰러웠다. 황비는 언제나 약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빈틈없는 사람처럼, 강인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써 왔다. 그건 오로지 황태자를 황위에 올리기 위해서였다.
‘저는 황위고 뭐고 다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었다. 발칸 제국에서 황위에 오르지 못한 황자가 대부분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만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라면 얼마든 감내할 수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피해가 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소. 어머니께서 원체 나를 이리 키워오셨기에.”
스스로의 감정을 속이고, 속마음을 감춰야만 이 냉혹한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며 혹독한 가르침 밑에서 자라왔다. 그럼에도 황비는 누구보다 마음이 따스한 사람이었고, 그 유전자가 황태자에게 전해졌으니 황태자 역시도 올곧은 사람으로 자라왔다.
“누구보다 훌륭한 분이 되셨는데 뭐가 어떻단 말입니까.”
3황자가 피식 웃으며 황비 쪽을 바라봤다. 황비는 허공을 바라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무튼 여기 길게 있어 봐야 좋을 건 없을 테니 약속해 주신 것만 받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는 황태자도 동감이었다. 3황자가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발칸의 다른 황자들에게 그의 존재가 발각될 가능성이 높아졌고, 그게 아니더라도 황태자는 해결해야 하는 급한 일이 있었다.
“보답으로 약속한 게 있었나요?”
황비가 고개를 돌리며 3황자에게 물었다.
“그, 그게…… 어머니.”
재빨리 황태자가 끼어들어 3황자가 대답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힐데스하임 사람이 성소에 발을 들이도록 해 준다는 것은 발칸에서 중범죄에 가까울 정도로 심각한 일이었다. 그러니 적당히 둘러댈 핑계를 생각하고 있을 때.
“그건 뭐 황태자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그 사실이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거라.”
그러고는 말았다. 그리고 이내 황비가 뭐라 말할 것이 있는 듯 눈치를 보더니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튼 3황자께는 고마워요. 이미 늙을 대로 늙은 몸이라 미련은 없지만, 아들놈이 황위에 오르는 걸 직접 두 눈으로 봐야 불안하지 않을 것 같아서.”
황비 나름대로의 감사 표현에 황태자는 피식 웃고 말았다. 3황자는 주변 사람들을 변화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황위에 올라 훗날 군주로서 맞이한다면…… 발칸과 힐데스하임은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괜히 그런 생각까지 해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감사제라도 벌이고 싶으나 그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알려질 수 있으니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좋겠소.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고 보답하겠소.”
황태자는 나를 더 챙겨주지 못하는 것이 진심으로 아쉬웠지만 황태자는 그에 대해 아무런 감흥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럼 말씀하신 곳으로 안내하겠소.”
황태자는 지체없이 3황자를 데리고 황궁의 지하 깊숙한 곳, 성소의 입구로 이동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고생들 하는군. 안에 잠깐 들어가 봐도 되겠나.”
“예. 그런데 뒤쪽에 계신 분은…….”
성소를 지키고 있는 병사가 뒤쪽에서 로브를 둘러쓰고 있는 3황자와 그의 조수를 흘깃 바라봤다.
“황궁을 방문하신 귀인이신데 잠시 안을 구경시켜드리려 한다.”
애초에 병사들에겐 황태자의 행동을 제약할 권한이 없었기에 그 정도 말만으로도 쉽게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어두운 입구와는 달리 성소의 안을 들어가자마자 환한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성소는 힐데스하임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했던 성스러운 힘이 담긴 공간. 하지만 발칸 제국이 수도를 탈환하고 나서 성소는 힘을 잃었다. 혹여나 발칸인들이 힐데스하임의 전유물, 신성력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기대하며 온갖 시도를 해 봤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심지어 힐데스하임에서 투항한 사제를 통해 성력을 불어넣어 보았으나 역시 이전과는 달리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성소는 발칸 제국의 손에 들어오면서 그 성스러운 힘을 잃었다고 결론짓게 되었다.
그럼에도 힐데스하임은 협상을 할 때마다 성소가 있는 수도 지역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발칸은 그 이유를 단지 상징적인 의미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성소는 힐데스하임에게 있어서 더없이 성스러운 공간이었고, 기적을 일으키는 공간이었다.
힐데스하임의 신성력은 인간과의 전쟁에 있어서만큼은 발칸의 마력에 비해 비효율적이었다. 그럼에도 힐데스하임이 끝까지 발칸에 대항할 수 있는 건 그들이 자국에 대해 갖고 있는 신념 덕분이었다.
신에게 선택받은 국가라는 믿음이 만들어 낸 응집력. 그것이 가장 강하던 시기에는 실제로 발칸이 힐데스하임에게 밀리기까지 했었다.
그러다 발칸은 막대한 손실을 감안하고 빈틈을 노려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상황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성스러운 장소가 발칸에게 빼앗겼다는 것이 힐데스하임의 입장에서는 크나큰 충격이었고 그것이 굳건한 믿음에 조금씩 균열을 만든 덕분이었다.
성소가 힘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힐데스하임이 성소를 되찾으려는 이유는 상징성이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어떻습니까.”
황태자는 3황자가 성소에 들르고 싶어 하는 이유도 자신이 모시는 신을 조금 더 깊게 영접하기 위함일 뿐이라고, 과거에 그토록 성스러운 장소로 여겨졌던 곳을 방문해 보기 위함일 거라고 생각했다.
3황자는 황태자의 질문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잠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던 3황자가 앞으로 쭉 걸어갔다.
가운 위에 놓여있는 여신상. 이전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빛을 잃어 단순한 조각상이 되어버린 그것.
3황자가 그 여신상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이내 3황자의 몸에서 희마하게 빛나는 기운이 흘러나왔다.
성력이었다.
3황자의 손을 통해 여신상에 성력이 스며들었고, 그걸 지켜보던 황태자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처음엔 미약하던 성력이 이윽고 거세지더니 곧 막대한 양의 성력이 성소 전체에 뿜어져 나오며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황홀한 기분. 공식적으로 황태자에 책봉되었을 때, 모든 이에게 찬사를 받던 그 순간보다도 더욱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애써 부정해야 하는 삶을 강요받는 발칸인으로서 알 수 없는 죄책감이 온몸을 뒤덮었다.
“이, 이건…….”
황태자가 간신히 입을 벌려 쥐어 짜낸 목소리였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이오.”
성소는 이미 힘을 잃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건 과거로부터 입증된 사실이었다. 힐데스하임의 사제들을 통해 직접 확인까지 끝마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3황자를 통해 성소에는 기적이 다시금 피어오르고 있었다. 발칸의 역사서에서는 신성 제국의 모든 것을 낮추어 서술하였기 때문에, 성력이 어떠한 일을 가능케 하는지는 명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느껴지는 기운으로는 그 어떤 기적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정신이 나른해지며 온몸에 느껴지는 안락한 기운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성소의 입구 쪽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기운에 황태자는 신경이 곤두섰다. 강력한 마력을 지닌 이들이 급하게 몰려오고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저들에게 지금 이 장면을 보인다면 황태자도 3황자도 큰일이 날 수 있었다. 단순히 적국의 황자를 성소에 들인 것뿐만 아니라, 그에게 성소의 기운을 느끼게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3, 3황자. 누군가 오고 있소. 빨리 몸을 숨기…….”
벌컥.
3황자를 채 감추기도 전에 성소의 문이 거세게 열렸다. 황태자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입구 쪽으로 돌리며 그들의 존재를 확인했다.
황태자를 지지하는 가신들이라면 잘 구슬려서 모르는 척 넘어가게 할 수도 있었건만.
“여기서 뭘 하시는 게요?”
황태자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그의 동생인 발칸 제국의 2황자가 기사들을 이끌고 서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게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황태자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방금까지 성소를 뒤덮던 신성한 기운이 사라져 있었다. 문득 그것을 알아챈 황태자는, 혹여나 싶어 3황자가 서 있던 곳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다. 잠시 확인할 것이 있어 들른 것이다.”
어느새 3황자와, 그의 조수가 사라져 있었다. 최상급의 마력을 지닌 황태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조금의 기척도 없이 말이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잘된 일이었다.
자신의 동생, 2황자는 똥 씹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정보를 입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온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남겨진 증거가 전혀 없으니 그로서도 더 따지고 들 수는 없을 테고.
“젠장. 늦었군.”
그렇게 혀를 차며 2황자는 자신의 기사들을 이끌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는 3황자가 사라진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안주머니에 있던 목걸이 하나를 꺼냈다.
“선물을 주려고 했더니, 사라져 버렸군. 또 연이 닿겠지.”
막대한 마력이 담긴 펜던트. 스스로 마력을 뿜어내며, 여러 방법으로 착용자의 목숨을 구해주는 보구였다.
아쉽지만 두 번째 보답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