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58)
제58화
성소의 여신상을 본 순간,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자연스레 내가 가진 모든 성력을 여신상에 불어넣었다.
내가 가진 성력은 여신상이 품기엔 극히 일부의 것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여신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내가 주입했던 것의 몇 배나 되는 성력을 토해냈다.
가슴 속의 성력이 쉴 새 없이 꿈틀거렸다. 처음 성력을 깨웠던 날처럼. 그리고 세 번째 고리가 탄생했던 순간처럼.
하지만 네 번째 고리는 깨어나지 않았다. 3성에 다다르며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내심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마음도 잠시.
[세 번째 고리가 진동합니다.] [고리가 더없이 증폭됩니다.]굳이 메시지가 아니더라도 성력의 양이 막대하게 증가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슴 속에 느껴지는 기운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했으니까.
[질병의 근원에 대해 판별할 수 있게 됩니다.]이어지는 문구. 그와 더불어 성력은 성배에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성배가 더욱 많은 성력에 반응합니다.] [’운명의 권능’이 깨어납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력의 양이 부족하여 극히 일부의 미래만이 주어집니다.]방금 얻은 성력 덕분에, 다른 4성의 사제들과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을 정도의 양을 갖게 되었지만, 새롭게 얻은 운명의 권능을 완전히 사용하기엔 그것으로도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전혀 아쉽지 않았다. 단순히 생각해도 미래를 보는 것이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가슴 속에서 성력이 곤두박질쳤다. 불안정하게 움직이던 성력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이전에 성력을 과도하게 사용하여 정신을 잃고 난 이후 이 정도까지 성력을 쥐어짜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슴 속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통증에 두 다리로 서 있기조차 버거울 지경. 고열에 시달리는 것처럼 극심한 두통까지 이어졌다.
“크윽.”
성력을 붙잡아 보려 했지만 조금도 통제할 수 없었다. 정신이 점차 희미해져만 가고 있었고 시야가 흐려졌다.
스르르 몸에서 힘이 빠져갈 무렵.
[’운명의 권능’이 발동됩니다.] [가까운 미래, 그중 일부만이 주어집니다.]그 메시지와 함께 눈앞에서 여러 장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꼭 영화를 빨리 감기 하는 것처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눈앞의 형체들이 뚜렷해져만 가고 있었다.
거대한 산맥부터, 광활한 숲, 그리고 넓게 펼쳐진 들판. 그리고 그 들판에 철갑을 입은 병사들이 나타났다. 고개를 크게 돌려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인원들. 그들이 들고 있는 깃발이 보였다.
힐데스하임과는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왕국의 깃발들. 서부 왕국 연맹이었다.
“으아아아아!”
선봉에서 말을 타고 있는 이들이 돌진했고, 보병들도 검을 뽑아 들곤 그 뒤를 따라 돌진했다.
반대쪽 병력들은 힐데스하임과 발칸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비록 힐데스하임과 발칸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는 하나, 상황에 따라 적대 세력과 우호 세력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두 제국군이 동맹을 하고 있는 건 쉽게 받아들이긴 힘든 장면이었다.
“왕국군을 쓸어버려라! 우리는 자랑스런 제국군이다!”
힐데스하임의 새하얀 갑옷을 입은 병사와 발칸의 칠흑빛 갑옷을 입은 병사들.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휘황찬란한 기사들.
챙, 챙, 챙!
쇠붙이끼리 맞닿는 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괴롭혔다. 사방에 피 웅덩이가 고였고 시체가 산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양쪽 모두 병력에 큰 손실이 있었으나, 전투가 길어지면서 승패가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두 제국의 연합군이 왕국 연합군보다 훨씬 많이 살아남아 있었다.
“후, 후퇴하라!”
“으아아악!”
“도, 도망쳐!”
겁에 질린 왕국군이 도망치기 시작했고 제국군은 그 뒤를 쫓았다. 추격당하는 와중에도 왕국군에는 병력 손실이 늘어가고 있었다. 비로소 좁은 계곡을 지나고 나서야 제국군은 추격을 멈췄다.
“매복해 있는 적들이 있을 수 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한다! 모두 진지로 복귀!”
제국군의 지휘관이자, 4성의 성기사, 그리고 혈육임을 인정하기는 싫지만 내 두 번째 형인 2황자가 병력을 이끌고 돌아갔다.
다시 눈앞의 형체가 흐릿해지더니, 왕국군의 진지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참담할 정도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병력이 두 배는 우세했지 않소! 그런데 이젠 제국군보다 병사가 더 적다니. 이게 말이 된단 말입니까!”
“그, 그게…… 생각한 것보다 적들이 강합니다.”
“성력과 마력의 힘이 저, 저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왕국군의 지휘관들이 모여 회의를 진행했다. 말이 회의지, 사실상 호통과 푸념과 늘어놓기에 가까웠다.
“승산이 없습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항복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려면 진작 했어야지. 이제 와서 항복한다고 받아주겠소?”
“그럼 어떻게 합니까. 이대로 가다간 모두 개죽음당하게 될 운명인데.”
회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기사 한 명이 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사, 사령관님. 환자가 발생했습니다.”
“지금 중요한 이야기 중인 것 안 보이느냐! 치료할 수 없는 중상자라면 죽게 내버려 두고 경미한 부상이라면 치료하여 병력을 보존하면 그만 아니냐!”
“그, 그것이…… 단순한 부상이 아니고 아무래도 전염병이 도진 것 같습니다.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모두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상황이 더욱 심각해진 것처럼 보였다. 병사들이 밀집된 공간에서 전염병이 전역으로 퍼지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증상을 보이는 이는 모두 죽여라. 최대한 접촉을 피하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된다 싶으면 싹을 확실히 잘라내!”
“아,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고 나가려던 기사를, 다른 지휘관이 급하게 불렀다.
“자, 잠시만 기다려 보게.”
“예, 예?”
“지체했다간 상황이 더욱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빠르게 처리해야 할 문제입니다.”
“내게 좋은 방법이 떠올랐네.”
그 지휘관은 자신이 생각해 낸 계책을 늘어놓았다.
전염병에 걸린 병사들을, 힐데스하임 쪽으로 투항시켜 전염병을 그쪽으로 퍼지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헌데 과연 병사들이 따르겠습니까? 만약 받아주지 않는다면 제국군에게 목숨을 잃을 것이 뻔한데.”
“어차피 여기에 있어도 죽을 목숨이지 않소. 고국에 있는 가족들을 챙겨주겠노라 구슬리면 괜찮을 듯한데.”
“과연 제국군이 그들의 병세를 눈치채지 못하겠습니까?”
“……그건 지켜봐야지. 최대한 증상을 감추라고 하면 되지 않겠소. 우리 입장에선 더 손해 볼 것도 없고.”
어차피 궁지에 몰린 처지. 그들에게는 마지막 방책인 듯 보였다.
결국 피까지 토하며 심각한 증상을 보이는 병사들은 제국군에 투항했고, 발칸은 반대했지만 교리상 신성 제국은 투항하는 이들까지 죽일 수 없다며 그들을 받아들였다.
이후로 두 눈 뜨고 보기 힘든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다. 전염병은 삽시간에 퍼졌고 제국군의 삼 분의 일 이상이 전염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발칸의 의원도, 힐데스하임의 사제도 전염병을 치료하지 못했다.
“저, 적군이 쳐들어왔습니다!”
“다 쓸어버려.”
“한 놈도 빠짐없이, 확실하게 죽여라!”
이윽고 제국군의 진지로 왕국 연합군이 몰려들었다. 이후로는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언제나 굳건할 것 같던 두 개의 태양, 발칸과 힐데스하임이 멸망했다. 두 제국의 황족은 왕국군의 끈질긴 수색으로 모두 목숨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아 있던 힐데스하임의 황족, 데미안 힐데스하임.
“쥐새끼 같은 놈.”
나라고 죽음을 피할 순 없었다. 왕국군의 검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허억!”
가슴이 꿰뚫리는 통증이 느껴지는 순간 정신이 번뜩 들었다.
방금까지 눈 앞에 펼쳐지던 상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느새 나는 화려하게 치장된 방 안에 누워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 전하. 깨어나셨습니까.”
시종이 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클레이디크로 돌아와 있었다.
“사제를 불러 전하의 몸을 살피게 하겠습…….”
“됐어.”
나는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안절부절못하는 시종을 뒤로하고 현자를 찾아갔다. 내가 방금 본 것이 정말 미래에 있을 일이라면, 이대로 두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가장 훌륭한 판단을 도울 사람은 역시 현자뿐이었다.
“전하!”
현자는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시종만큼 격렬한 반응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도 꽤나 놀란 듯 보였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갑작스레 나타나셔서는 오래도록 의식을 되찾지 못하여 적잖이 놀랐습니다. 상태를 보니 또 성력을 과도하게 사용하신 것 같은데…….”
“파우스트 경.”
그런 잔소리를 들을 시간은 없었다.
“혹시 서부 왕국 쪽 정황에 대해 알고 있나?”
“……서부 왕국 말입니까?”
현자의 반응을 보니 무언가를 알면서 애써 감추는 듯했다.
“숨기지 말고.”
그러자 현자가 허탈하게 웃었다.
“이미 알고 계신 것 같군요. 사실 서부 왕국군이 힐데스하임과 발칸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게 언제지?”
“두 달 전부터입니다.”
두 달 전이라면 내가 클레이디크에 있을 무렵이었다.
“왜 말은 안 했고?”
“전쟁은 상처만을 남기는 법입니다. 피할 수 없는 전쟁도 있는 법이나 구태여 나서실 필요도 없습니다. 전하께서 혹여나 참전할 생각을 품으실까 감췄습니다.”
전쟁은 공을 쌓기 가장 좋은 기회였고 황위에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은 것이라는 현자의 말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바로 가야겠어.”
지금은 피하는 게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전하.”
현자는 나를 말리려다가, 내 눈빛을 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마음을 굳히신 모양이군요.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부디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좋을 대로 해.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해줄 테니까.”
나는 급하게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