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61)
제61화
“사령관님. 출정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서부 왕국 연합군. 그들은 가장 최근에 있었던 전투에서 큰 패배를 겪었고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전세가 기울어졌다고 낙담에 빠졌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전염병에 걸린 병사를 적군에 투항시킨다는 묘책을 떠올렸고 그건 적들에게 큰 타격을 입힐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멍청한 놈들. 투항군을 그렇게 쉽게 받아주다니.”
힐데스하임의 교리 때문에 투항군을 죽이지 않고 받아들일 것은 예상하고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전염병에 걸린 병사들이 그들에게 성공적으로 잠입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그게 무려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이 정도면 아주 난리가 나 있겠지.”
왕국군은 조금이라도 증상이 보이는 자들이나, 전염병 환자에게 접촉했던 이들을 빠르게 죽여버렸고 덕분에 전염병이 확산하는 걸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국군은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살상에 대해 엄격한, 힐데스하임의 멍청한 교리가 또 한몫했을 것이다.
최근의 패배로 인해 왕국군은 많은 병사를 잃었다. 전력의 격차를 무시하고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유일한 기회.
남은 병력을 최대한 끌어모았다. 이 정도면 혼란에 빠진 제국군을 몰살시키기엔 충분하리라 믿었다.
“가자!”
선봉으로 나선 사령관이 말을 몰았다. 그 뒤를 따라 잔존한 병사들이 줄지어 이동했다. 늦은 새벽, 방심하고 있을 놈들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이기 위해 제국군의 진지가 보이자마자 일제히 돌격했다.
“우와아아아!”
“죽여라. 전부 다 죽여.”
하지만 자신만만하게 돌진하던 왕국 연합군은, 눈앞에 닥친 상황에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적군이다!”
생각보다도 더욱 많은 수비 인원. 전염병이 퍼져 정신이 없는 와중인데다가 이런 야심한 시각에도 이렇게까지 삼엄한 대비를 하고 있다니. 이건 분명 예상 밖의 일이었다.
게다가,
뿌우우우우!
뿔나팔 소리와 함께 적군은 체계적으로 수비에 돌입했다.
“적군이 쳐들어왔다. 일제히 공격에 대비하라.”
마치 이들이 공격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철저한 대비가 되어 있었다.
“제, 젠장. 더욱 빠르게 진군하라. 아직 제대로 준비가 안 되어 있을 것이다.”
희망이 섞인 사령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챙!
이미 많은 수의 제국군의 공격에 대응하고 있었고, 전투가 길어질수록 잠에서 깨어난 제국군들이 수비에 가담하면서 상황은 더욱 불리해져만 가고 있었다.
이전에 있었던 압도적인 패배. 사령관의 머릿속에 그날의 악몽이 떠올랐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령관에게도 그 충격이 남아 있었는데 일반 병사들은 어떻겠는가.
“으아아악!”
“사, 살려주십시오. 항복하겠습니다!”
검에 꿰뚫리며 쓰러지는 병사들이 늘어날수록 전의를 상실하는 이들 역시 많아졌다.
“멍청한 놈들!”
사령관은 검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전열의 가장 앞에서 달려드는 병사들을 수도 없이 베어냈다. 그럼에도 그 수가 줄지를 않았다.
“그대가 지휘관인가.”
그런 사령관의 앞에 범상치 않은 기운의 남자가 나타났다.
“나는 발칸 제국의 기사 아르민 후작이다.”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 기사가 검을 살짝 내려놓았다. 사령관에게도 소개를 바라는 것처럼 보았다. 하지만 그런 멍청한 기사도 따위, 저버린 지 오래였다.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나도 제국군에 항복하겠소.”
쉽게 상대할 수 없는 기사라는 걸 직감했으니 조금 비열한 수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힐데스하임의 교리에 따르면 투항하는 이들의 목숨은 함부로 앗아가지 않는다 들었소.”
아르민 후작은 발칸 제국의 사람이니 모르는 체 자신을 죽이려 들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그 옆에는 힐데스하임의 문양이 박힌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꽤 높은 직위를 가진 남자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르민 후작은 힐데스하임 소속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듯 보였다.
사령관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이얏!”
이미 많은 이들이 대처도 하지 못한 채 목이 달아나게 만든 쾌검. 고개를 돌리고 있는 아르민 후작이 반응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콰앙!
하지만 사령관의 검을 쥔 손에 살을 베는 부드러운 감각 대신 얼얼한 감각이 느껴졌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아르민 후작의 옆에 서 있던 힐데스하임의 사제가, 반원 형태의 새하얀 기운으로 자신의 검을 막아낸 것이었다. 그리곤 사령관 자신을 바라보며 그가 씨익 웃었다.
“미안한데, 나는 그런 거 모르는 망나니라서.”
이제껏 수많은 이들이 반응도 하지 못하도록 빠르게 베어버린, 쾌검의 사령관.
이번만큼은 그 반대였다. 사령관은 자신의 목이 달아난 줄도 모르고 한참이나 서 있다가 고꾸라지고 말았다.
“와아아아아!”
“3황자 전하 만세!”
“황태자 전하 만세!”
승기를 잡은 병사들이 일제히 고함을 내질렀고,
“뭐, 뭐야?!”
뒤늦게서야 병사를 이끌고 온 2황자는 이미 끝나버린 상황에 황당해하는 중이었다.
* * *
서부 왕국 연합과 두 제국의 연합에서 승리를 거머쥔 건 제국 쪽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항상 그렇듯, 승자 쪽도 패자 쪽도 피해를 본 것은 마찬가지였다. 단지 그 피해 규모가 왕국 연합 쪽이 훨씬 클 뿐. 게다가 패전 후 협상의 결과를 통해 앞으로 볼 손해는 계산이 힘들 정도로 막대했다.
전쟁이 끝나고 힐데스하임의 성황은 직접 전쟁터로 위문을 나왔다. 고된 전쟁 기간동안 고생했던 병사들은 그것만으로 큰 마음의 위안을 얻었고, 목숨을 잃은 병사들 역시 조금이나마 편하게 세상을 뜰 수 있을 것이었다.
“신께서 저희를 보살펴 주신 덕분에 악의 무리들로부터 성국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불가피하게 신의 곁으로 떠난 이들에게 쭉 축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성황을 비롯한 여러 황족들. 그리고 힐데스하임의 귀족과 참전했던 병사들. 모두가 묵념한 채로 가엾은 영혼들을 위로했다.
묵념의 시간이 끝나고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이가 있었다. 3황자였다.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그리고 신실함과 가장 거리가 멀다는 3황자가 성황을 의식하고 잘 보이기 위해 저러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고 3황자의 진심 어린 마음에 감명을 받은 이들도 있었다.
툭.
고개를 숙이고 있는 3황자에게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게 애써 눈물을 감추기 위함이라는 걸 눈치 빠른 몇몇은 금세 알아차렸다.
현자가 3황자에게 다가가 등을 다독여줬다. 그로부터 한참 후에야 3황자는 고개를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3황자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것은 색맹이 아니고서야 알 수밖에 없었다.
위로의 과정이 모두 끝나고 성황은 3황자에게 다가갔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많은 적을 베어낸 2황자도, 많은 이들을 살려낸 1황자도 아니었다. 자칫하다간 모두가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게 해 준 3황자였다.
그는 모두가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현명한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투항군이 사실은 전염병 환자들이었다는 것도 알아차렸고, 적군이 기습할 것도 알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지원 없이도 결국 왕국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결국엔 전염병에 걸렸던 병사들을 치료하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4성의 사제들이 어찌하지 못한 병을 대체 3황자가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따라오거라.”
성황이 3황자를 따로 불러내는 것은 그의 공을 인정하기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둘만의 자리를 마련한 성황이 3황자에게 물었다.
“이번에 큰일을 했다지.”
“굳이 겸손한 척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큰일이 날 뻔한 걸 막았으니 그것이 큰일을 한 것은 맞겠지요.”
“듣기로는 2황자가 병력 지원을 거절했다던데.”
“클레이디크에서 사귄 인연 덕분에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발칸의 병사들이었다지?”
성황으로서는 유일하게 못마땅한 부분이었다.
두 제국의 연합에서도, 어떤 제국이 더 큰 역할을 했느냐에 따라 협상을 자신 쪽에 유리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결정적인 때에 발칸의 병사를 이용했다는 건 모양새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걸 3황자에게 따질 셈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 대책을 마련한 건 3황자였고 그것 덕분에 협상의 결과가 꽤 만족스러웠으니까. 하지만 성황이 알고 있는 부분이 맞는지 명확하게 하기 위해 묻는 것이었다.
“저로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형들이 도무지 제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데, 그렇다고 상황이 반전될 위기를 지켜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더 좋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느냐.”
“떠오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없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도움을 줬던 이들 중에는 발칸의 황태자도 있었습니다.”
“뭐라?”
“그리고 그가 옆에서 지켜본 덕에 큰일이 날 뻔했다는 것을 발칸에서도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협상할 때 있어 발칸도 한발 물러난 것일 테고요.”
3황자의 말을 듣자 비로소 이해가 됐다. 어째서 발칸이 생색을 내지 않는지. 힐데스하임이 만족할 만한 협상의 조건을 그토록 쉽게 받아들였는지 말이다.
결국 모든 것이 3황자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잘했다.”
성황은 자신의 입에서 나갈 수 있는 최선의 칭찬을 내뱉었다. 그렇게 말하고도 성황은 뭔가 어색해서 고개를 휙 돌리고 말았다.
“혹시 원하는 게 있느냐.”
당근을 줄 때는 확실하게 주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큰 이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성황은 다소 과한 요구라고 하더라도 들어줄 요량이었지만,
“없습니다.”
3황자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은 없습니다. 허나 앞으로는 이런 불합리한 일이 없도록, 다른 두 형들 때문에 옳은 일에 나서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흐음.”
그건 3황자가 자신의 입지를 올려달라는 걸 현명히 돌려 말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알겠다.”
3황자가 성황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1황자와 2황자가 싸지른 똥이 워낙에 많은 지금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차라리 3황자가 황위를 물려받는 것이 나을 수도 있지 않겠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것이었다.
“내가 말해둘 테니 그 부분은 염려하지 말도록. 그리고 이번 일을 통해 수도로 복귀할 명분 정도는 생긴 것 같은데. 어떠냐.”
유배지나 다를 바 없는 곳이 클레이디크였기에 3황자가 당연히 돌아오겠노라 말할 줄 알았지만,
“계속 남아 있겠습니다.”
3황자는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알겠다.”
3황자는 점점 더 성황의 예측을 빗나가고 있었다. 그럴수록 흥미가 동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