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62)
제62화
수도에 계속 남아 있었다가는 귀찮은 일들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귀찮은 일은 클레이디크로 온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여러 귀족들에게 날아온 편지들. 처음 몇 글자들만 읽어봐도 모두 내가 예상한 대로 비슷비슷한 내용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번 일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느니, 황족으로서의 격을 느꼈다느니 애써 내 기분이 좋으라고 돌려 말하고 있었지만 그 속뜻은 모두 하나였다. 혹시 모르니 내게도 우선은 잘 보여두겠다는 것.
“에휴.”
그중에서는 직접적으로 나를 지지하겠다고 나서는 가문들도 있었다. 이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제껏 1황자와 2황자가 황위의 계승자 후보로 강력하게 꼽히고 있었지만 비로소 나도 그 후보 정도는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인정받는 것 같았다.
딱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쁠 건 없었다. 눈치를 살펴 가며 이리저리 옮겨가는 뱀 같은 자들이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필요할 때 내 편으로 이용해 먹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나는 대충 그럴싸하게 고맙다는 뜻을 담아 일괄적으로 답장을 보내두었다. 축하를 핑계로 찾아오겠다는 이들은 굳이 만나주지 않았다. 귀찮은 것도 있었고 현자의 조언 때문도 있었다.
“전하. 급한 일은 모두 끝났으니 당분간은 쉬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 말을 듣고 문득 전생에서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가 떠올랐다. 선잠을 자던 중 갑자기 숨이 멎었으니 내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었지만 과로에 의한 급사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래. 바쁜 건 맞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이러다가 또 젊은 나이에 요절하면 이토록 억울한 일이 있을 수 없었다. 내가 아득바득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데.
“알았어.”
뭘 할까 고민하다 잠이나 자기로 마음먹었지만, 지금까지처럼 내가 찾아오는 걸 거부할 수 없는 손님이 나를 찾아왔다.
“3황자.”
이번에 내게 큰 도움을 주었던 황태자였다.
“덕분에 큰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상황이 다급해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던 것 같습니다.”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건 3황자 덕분이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힐데스하임은 물론이고 발칸 제국의 병력도 몰살당했겠지. 방어선이 뚫렸다면 두 제국은 정말로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을지 가늠도 되지 않는군.”
설마 힐데스하임과 발칸 제국의 멸망까지 이어졌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대다수의 병력이 서부 왕국 연합과의 전쟁에 동원되었던 것은 맞지만, 제국이 가진 병력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미 패전을 거듭했었던 서부 왕국 연합군의 잔존 병력이 제국을 멸망시키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내가 봤던 미래에선 분명 두 제국은 멸망했다. 중간 과정이 생략되어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서부 왕국군에게 숨겨둔 병력이 있었던 걸까?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 그랬으면 마지막 전투에서 그 병력들을 동원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비장의 수. 아마도 왕국군이 감추고 있는 무언가가 더 있는 것 같아 찝찝했다.
그래서, 비록 전쟁이 끝났더라도 왕국군에 대해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성황에게 슬쩍 언질을 줬다. 성황은 알겠노라 답하기는 했지만 그다지 성의 있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발칸은 서부 왕국과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황태자에게 발칸 쪽의 상황은 어떤지 조심스레 물었다.
“서부 왕국? 모든 게 마무리되지 않았는가.”
전쟁도 끝이 났고 전후 처리 문제도 모두 마무리를 지은 상태였다. 그러니 이제 와서 이야기를 꺼내 봐야 무슨 의미가 있냐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 뒤통수를 쳤으니 두 번 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내 말의 뜻을 이해한 황태자가 가볍게 웃었다.
“꼭 황족 같지가 않다는 말이 정말인 것 같군.”
“예?”
“혹시 기분 나쁘게 들렸다면 사과하겠소. 나쁜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오.”
그건 알고 있었다. 황태자의 웃음은 비웃음인지 아닌지 정도는 판가름할 수 있었다.
“이 복잡한 권력 다툼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은 것 같아서 그랬소. 한동안 잠잠하기는 했지만 국가 간의 전쟁은 언제든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오. 명분이야 대충 그럴듯하게 만들어 내면 그만이고.”
그는 서부에 위치한 왕국들이 연합하여 제국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 딱히 대단한 일은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 간의 관계 역시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고. 발칸과 힐데스하임도, 아주 잠깐이었지만 이번 일로 손을 잡았지 않소.”
그의 말대로 서로 죽일 듯 이를 가는 관계임에도 두 제국은 등을 맞댔다. 마찬가지로, 원수 관계였던 서부 왕국들이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을 했고.
“발칸은 언제나 준비하고 있소. 누구와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고, 누구와도 손을 잡을 준비 역시 되어 있지.”
황태자가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번엔 아주 잠깐이었지만 언젠가 발칸과 힐데스하임이 더욱 가까워질 날이 올 수도 있지. 나는 왠지 그날이 기대되는구려.”
황태자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가운데 커다란 보석이 박혀 있는 목걸이였다. 보석에서는 보랏빛의 알 수 없는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순간 섬뜩함을 느낀 나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가슴 속의 성력이 요동을 쳤다. 성력이 빨려 들어가거나 고리가 확장되는 것과는 또 다른 감각. 그보다 훨씬 더 불쾌한 감정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이게 뭡니까?”
여전히 회전하고 있는 고리를 애써 억누른 채로 조심스레 물었다.
“발칸 제국의 귀중한 물건이오. 깊은 마력이 담겨 있지. 잠재된 마력이 언제고 그대를 지켜줄 거라 생각했는데…….”
내 반응이 영 심상치 않았는지 황태자가 눈치를 살폈다.
“많이 불편한 모양이오.”
“마력과 성력은 상극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몸이 받아주질 않는군요.”
마력에 대해서도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성력이 신체의 재생과 항상성 유지를 돕는 역할을 한다면 마력은 반대로 신체를 파괴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각각 저마다의 효능을 가지고 있었고 이 목걸이가 가진 마력을 이용할 수 있다면 내게도 장차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지만, 사실 말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힐데스하임의 사제가 마력을 다룬다니. 상극인 성력과 마력을 한 몸에 같이 두었다간 큰일이 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읽은 듯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발칸 제국이 어떻게 브레멘을 차지하게 되었는지, 알고 있소?”
현 발칸 제국의 수도이자, 과거 힐데스하임의 수도였던. 그리고 빼앗긴 성소가 잠들어 있는 곳이 브레멘이었다.
“……아르데타인이라는 사제가 큰 역할을 했다 들었습니다.”
아르데타인. 부흥기를 겪으며 발칸보다도 더욱 우세한 힘을 갖고 있던 힐데스하임이 발칸에 밀리게 된 계기를 만든 작자였다.
당시 힐데스하임을 이끌던 성황 밑에서 오른팔 역할을 하던 대주교. 성황의 신임을 두텁게 사고 있던 그가 힐데스하임의 뒤통수를 친 덕분에 발칸 제국은 힐데스하임의 수도, 브레멘을 수복할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황자의 입장에서 듣기 불편한 이야기일 수 있으나 그대를 불편하게 만들기 위함은 아니니 양해해주길 바라오. 그대의 말처럼 아르데타인은 힐데스하임을 배신하고 발칸 쪽에 붙었지. 그리고 그가 성국을 배신했던 이유는 마력을 손에 얻었기 때문이었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르데타인은 막대한 성력을 부여받는 고위 귀족가 중 하나였고, 당시 대주교였던 자 역시 4성 이상의 성력을 보유한 자였다.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과정까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최고의 대마법사들이 수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마력을 이 목걸이에 담아낼 수 있었소.”
목걸이에 담긴 마력. 그것에 매료된 아르데타인 대주교가 결국 발칸 제국 쪽으로 붙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역사라는 것은 원래 승자의 입장에서 왜곡되기 쉬운 것이었다.
“나도 그대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소. 하지만 나는 그걸 허황된 것이라 생각하지 않소. 이 목걸이가 가진 힘이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비범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황태자의 손에 들린 목걸이는 그 순간에도 계속해서 온몸이 찌릿찌릿해질 정도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대가 신화에서처럼 이 목걸이에 담긴 힘을 다루지는 못한다고 하여도, 그대가 위기에 처했을 때 큰 도움을 줄 것이오.”
왠지 모를 거부감을 억누르고 목걸이를 받았다. 나 역시도 흥미가 동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미 전례가 있었다면 나 역시도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다만, 마력을 다루게 된다면 그 사실은 한동안은 숨겨야겠지만. 힐데스하임의 성족이 발칸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을 유쾌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귀중한 물건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목숨을 구해준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평생 잊지 못할 것이오.”
“예. 허나 모든 인간은 죽기 마련입니다. 신의 대리자라 불렸던 힐데스하임의 초대 성황께서도 결국에는 영면하셨지요. 당장의 위기를 넘기기는 했으나 황비께서는 많이 노쇠하신 듯 보였습니다.”
나이도 많이 들은데다가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서 이미 죽을 고비를 넘긴 것도 여러 번이라고 들었다. 그것 때문인지 폐렴이 아니더라도 황비의 몸에는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녹슬어 있는 부분이 많았다.
“……알고 있소.”
지나치게 차분한 음성이었지만 황태자의 눈에서는 슬픔이 엿보였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훗날 황비가 목숨을 잃었을 때 조금이나마 황태자가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를 바래서였다.
전생에서의 내 부모님은 급사하셨다.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은 채로 나는 사고로 부모님을 떠나보내야만 했고 그게 천추의 한으로 남아 있었다. 살아계시던 때에 잘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가족을 잃을 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지만, 조금이라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면 도움이 되리라. 황태자 역시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어찌 되었든 이대로 돌아가셨으면 어머니께 부끄러운 모습만 보여드린 것이 평생 가슴에 응어리질 뻔 했소. 평생 잊지 않겠소.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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