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64)
제64화
여러 귀족들에게서 날아오는 편지에 대충 답장을 건네줬더니 꼭 만나보고 싶다며 들러붙는 이들이 생겼다. 모두 거절했지만 정말 끈질기게 매달리는 이들도 몇 명 있었다.
“페이른?”
그 중 왠지 낯이 익은 백작가의 이름도 있었다.
“예. 클레이디크 영지 서쪽에 바로 맞닿아있는 백작가입니다.”
페이른이라. 그 이름에는 꽤 흥미가 동했다.
“원래는 아무 쪽에도 붙지 않았던 사람 아닌가?”
“예, 맞습니다.”
종종 페이른 백작의 이름에 대해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꽤 큰 백작가의 수장임에도 지금껏 어떤 황자에게도 구애하지 않은 것 때문이었다. 일찍부터 황자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던 다른 고위 귀족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가 있는 클레이디크와 바로 맞닿은 곳에 있는 만큼, 그쪽에서 넘어온 영지민들이 우리 쪽에도 꽤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페이른 출신의 영지민이 있으면 몇 명 정도만 불러와 봐.”
그러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살다 클레이디크로 이주하게 된 이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런데 참 특이한 점이 모두가 자발적으로 클레이디크로 넘어왔다는 것이었다.
냉정히 보자면 클레이디크는 꽤 살기 좋은 곳이 아니었다. 중립 지역이라 분쟁이 많고, 쉴 새 없이 몬스터가 몰려오기도 하며 실제로 제국에서 죄를 짓고 유배를 온, 질 나쁜 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런데 그런 모든 걸 커버할 수 있는 것이 아르민 후작의 존재였다.
클레이디크를 분할 통치하고 있는 아르민 후작은 이 세계에선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적국의 황자인 내게는 물론이고,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도 인정을 베풀었다. 그것만으로 클레이디크의 거주민들은 자신의 삶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지인들에게 클레이디크에 대해 퍼져 있는 소문은 실제와 많이 달랐다. 몬스터에게 하루에도 수십 개의 마을이 불타는 위험천만한 곳. 많은 죄수들이 모여 쉴 새 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곳.
당장 나만 해도 클레이디크에 대해 그런 오해를 갖고 있었으니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하기 힘든 하층민들에게 클레이디크는 지옥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페이른의 거주민들이 이토록 많이, 그것도 자신의 발로 클레이디크에 찾아오게 되었을까. 여러 추측들이 머릿속을 오갔지만 모두 지워버렸다. 괜한 오해를 한 것일 수도 있으니 직접 들어봐야 할 문제였다.
“클레이디크로 온 지는 얼마나 됐지?”
“이, 이제 막 2년이 되었습니다.”
“그대가 원해서 넘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정말인가?”
“그, 그렇습니다.”
“긴장하지 말고.”
황자라는 신분이 이럴 땐 참 불편했다. 나를 과하게 어려워하는 모습에 잠시 숨을 고를 기회를 주었다. 퍽 감격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항상 존경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직접 만나 봬니 워낙 긴장한 탓에…….”
“내가 뭘 했다고 존경까지 해.”
“클레이디크의 백성들은 전부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이 땅으로 오신 이후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개선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입꼬리가 괜히 씰룩거렸다. 솔직히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이러려고 부른 건 아니었다.
“됐고. 클레이디크로 넘어온 이유가 뭐였지?”
내 말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남자가 잠시 나를 바라봤다가 다시 눈을 피했다. 그 잠깐의 사이에 나는 남자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던 걸 놓치지 않았다.
“힐데스하임에서 살 땐 클레이디크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말이야.”
“그, 그게…… 아닙니다. 중립 지역으로 와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롭게 살고 있고…….”
“그러니까 그건 알겠는데 여기가 네 생각과는 꽤 다른 곳이었을 거 아니야. 이런 곳인 줄 알고 왔던 거야?”
여전히 망설이는 태도였다. 그가 쉽사리 털어놓지 못하는 게 이해는 됐다.
나 역시 황족이었고 다른 귀족들과 한패일 가능성이 높으니 나쁘게 말했다간 자신의 목이 달아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할 터였다.
“정말 궁금해서 그래. 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다른 귀족들과 친분도 없어. 굳이 그런 놈들과 잘 지내볼 생각도 없고. 그냥, 잘못된 걸 바로잡고 싶을 뿐이야.”
그를 한동안 진지한 눈으로 바라봤다. 후로도 한참이나 입을 벙긋거리던 그가 이내 낮은 음성으로 털어놓았다.
“페이른은 제게는 살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차라리 지옥 같은 곳이라고 알려진 클레이디크로 이주할 결심을 할 정도로?”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높은 세율 때문에 곡식을 수확하면 제게 남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것도 풍년일 때 기준이지, 흉년이라도 들었다가는 관가에 끌려가 매질을 맞았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다거나 하는 불가피한 이유 때문이라면?”
“그것 역시 신앙심이 부족하여 신께서 제게 베풀어주지 않으신 거라며 제 탓이 되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울먹거리고 있었다. 진지한 눈으로 그 말을 계속해서 듣자 점점 더 그의 목소리가 달아올랐다.
“그렇게 매질을 당하고 끝난다면 차라리 나았겠습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아내와 아이들이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었습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었지만 무너져버린 몸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한 눈빛이었다. 아까까지는 애써 감추려던 그가 이제는 차오르는 울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열하는 아이들 앞에서 멀쩡한 척도 하지 못하는 제가 한심했습니다. 가족들이 굶어가는데, 몸이 낫는 동안 일도 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는 제가 한심했습니다. 대체…… 농노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큰 죄이기에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이를 꾹 깨문 그의 눈이 벌게져 있었다.
“어떻게 하고 싶은데.”
최대한 담담한 척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머리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나와는 관계가 없는 그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오지랖이라면 오지랖일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감정이 이입되는 건 가장으로서의 삶이 아직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는 탓일까.
“예?”
“복수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복수라니요. 제가 어찌 그분께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일개 농노일 뿐인데. 지금의 삶에 만족할 뿐입니다. 좋은 곳에 와서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으니.”
그런 것 치고는 그의 눈빛에서 분노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해도 돼. 네가 말한 대로 농노로 태어난 게 무슨 죄야?”
그의 목울대가 몇 번이나 움직인 후에야 조심스레 입이 열렸다.
“저는 그때 입었던 부상으로 제대로 걷지 못합니다.”
그제야 남자가 들어올 때 절뚝거렸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바쁜 일상 중에도 빠짐없이 성당에 나가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일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다리가 낫게 해 달라고. 그러다가 욕심이 과했나 싶어, 이대로만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하기도 하고요.”
그가 입술을 깨물고는 작게 말을 이었다.
“……또 그러다가 문득 욕심이 다시 과해지곤 합니다. 제 다리를 이렇게 만든 분께 딱 똑같이만 해 달라고. 농노의 다리 한쪽과 귀족이 다리 한쪽의 가치는 큰 차이가 있으니 신께서 들어주지 않으시는 거겠지만요.”
“그런 게 어디 있어.”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 나갔다. 사실 이 세상에선 당연한 거였고, 농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결코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황족으로 태어나 신분제의 수혜를 받은 것도 맞으니까.
그럼에도 페이른 백작은 선을 많이 넘었다. 다른 이들이 봤을 때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서, 신분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한 내가 봤을 때도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다. 그럼 돌아가 봐.”
“……알겠습니다.”
농노는 내게 그렇게 털어놓은 것만으로도 속이 후련한 듯한 표정이었다. 절뚝거리며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 더욱 안쓰러운 마음이 몰려들었다.
“혹시 말이야.”
나는 그런 그를 붙잡았다.
“잠깐 시간 되면 나랑 같이 어디 좀 안 갈래?”
“……예?”
“따라오면 후회는 안 할 거야.”
조금 더 속이 뻥 뚫리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 * *
“아버지. 대체 왜 3황자입니까?”
페이른 백작의 장남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물었다.
“뭐가 말이냐.”
“아버지께서 3황자에게 계속해서 서신을 전달하고 계신다 들었습니다. 3황자의 편에 서겠다는 뜻 아니십니까?”
페이른은 이제껏 그 어떤 황자에게도 전혀 마음을 표현하지 않은 가문이었다. 고위 가문 중에서는 몇 없는 드문 경우에 속했다.
“3황자의 편에 선다니. 내가 그런 꼬맹이에게 말이냐?”
페이른 백작의 날카로운 음성. 그 목소리만큼이나 눈빛에도 날이 서 있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장남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페이른 백작은 금세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네 입장에서 이해가 안 가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 가문이 구태여 황족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으니.”
페이른이 그토록 튼실한 가문인가 물으면 고개를 내저을 이들이 많았다. 페이른은 간신히 백작의 직위를 유지하고 있는, 고위 귀족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가문이었다.
“이 힘만 있다면 말이지.”
하지만 백작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는 검은빛의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찬란하던 신성 제국은 이제 지도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대신 우리 페이른의 이름이 자리 잡고 있겠지.”
페이른 백작은 큰 야망을 갖고 있었다. 고작 세력이 작은 백작가 주제에 반란을 꿈꾸는 것이냐며 미쳤다고 반문할 이들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지만 그는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허면…… 구태여 3황자에게 잘 보이려는 이유가 무엇이십니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하였다.”
페이른 백작은 자신이 얻은 놀라운 힘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자만할 생각도 없었다. 상대가 신성 제국인 만큼 자신의 계획을 위해선 완벽한 준비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머저리 같은 3황자는 기세가 등등해져 있겠지. 이제껏 이런 적이 없었는데,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귀족가들이 생기기 시작했으니 말이야.”
그러니 몇 번 튕기는 척하던 3황자도 페이른 백작과의 대면을 수락한 것일 테고.
“다음 주에 3황자가 직접 이곳으로 오기로 했다.”
“예? 여기로 말입니까?”
“그래. 물론 그와의 친분을 쌓는 것이 주목적이나, 혹여나 일이 수틀릴 때를 대비해 병력을 준비해 두거라.”
“차라리 아버지께서 3황자를 만나러 가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가 이곳으로 온다면…….”
“그래 봐야 애송이일 뿐이다. 제깟 놈이 온다고 해도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기는 힘들겠지. 그리고 내게 잘 보이려는 것 때문인진 몰라도 구태여 그놈이 여기로 온다고 하더군.”
페이른 백작은 기분 좋게 웃었다. 점점 더 그의 계획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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