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65)
제65화
나는 페이른 백작가로 이동할 채비를 마쳤다. 만약을 대비해 챈슬러와 트루드를 포함한 호위 병력도 동행시켰다.
“……전하. 페이른 백작이 전하께 구애를 한 것은 물론 축하드릴 일이오나 페이른 백작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트루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전하께 백작가의 지지가 장차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허나 그가 소문대로 질 나쁜 이라면, 오히려 전하께서 일관되게 쌓아 오신 평판에 금이 갈 것이고 그것만 보고 전하를 따르던 이들이 뜻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진지하게 나를 생각하고 있는 거였다.
“알아. 걱정 마.”
트루드의 걱정은 괜한 것이었다. 내가 페이른 백작을 만나러 가는 이유는 친분을 쌓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그 반대지.
트루드는 내가 성의 없게 반응한 거라고 생각한 것인지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다가 작게 한숨을 삼키고는 말없이 내 뒤를 따랐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페이른 백작은 성 밖에서부터 나를 맞이했다. 날카로운 눈매와 턱. 가식적인 미소. 관상을 보는 데 소질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에 대해 들은 것이 있기 때문인지 왠지 딱 봐도 나쁜 놈처럼 생겼다.
“제가 전하를 찾아뵀어야 했는데 먼 걸음 하게 해 드려 송구할 따름입니다. 만찬을 준비해 두었으니 성 안으로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밥은 먹고 왔는데.”
내 시큰둥한 반응이 예상 밖인지 페이른 백작의 눈이 잠깐 커졌다. 하지만 곧바로 표정을 관리한 백작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우선 안으로 가서…….”
“나는 안이 아니라 밖을 보고 싶어서.”
“예?”
“마을 상황이 어떤지 말이야. 클레이디크 못지않게 몬스터의 침략을 많이 받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여의치 않으면 성황께 말해서 지원 병력을 좀 요청하는 게 낫지 않겠어?”
“그, 그게…… 물론 몬스터의 침략이 잦은 것은 사실이나 진작부터 체계를 갖추어 잘 대비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신경 써 주시는 것은 감사하나…….”
“내가 직접 좀 볼게.”
보기 좋게 당황한 듯한 백작의 모습. 그는 몇 번이나 괜찮다며 둘러대려 했지만 나는 뜻을 꺾지 않았다. 황자로서의 권위를 밀어붙이자 백작도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여기로 가보자고.”
나는 페이른의 지도를 보며 직접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리가 망가진 농노의 고향마을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또다시 백작은 당황한 모습을 보였지만 애써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페이른 백작과 그의 군대. 그리고 내가 이끌고 온 일행까지 꽤 많은 인원이 줄지어 이동했다.
“전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미리 기별이라도 주셨으면 더 환대한 준비를 해 두었을 텐데…….”
“괜찮아. 그러려고 온 건 아니니까.”
내가 이 마을로 오겠다고 결정을 내리자마자 백작은 사람을 보내 전달해 둔 것인지 미리 준비가 돼 있었다. 나는 마을 촌장을 보자마자 고개를 돌려 뒤쪽에 로브를 쓰고 있는 농노를 바라봤다.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다리를 병신으로 만든 게 저놈이 맞다는 뜻이었다. 당장에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걸 억지로 억눌렀다.
“괜찮으니까 다들 일어나라.”
마을 촌장의 뒤로는 수많은 주민들이 납작 엎드려 있었다. 하나같이 초췌한 얼굴들이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말라빠진 모습들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일어나래도.”
계속해서 엎드려 있는 주민들에게 몇 번이고 강권하자 눈치를 보던 이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나는 촌장이 아닌 주민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힘든 건 없지?”
“예! 없습니다. 신성 제국의 선택받은 민족으로 태어나 항상 풍족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얼굴이 영 좋지 않은데.
“정말로?”
나는 일부러 웃으며 농담조로 물었다. 촌장과 백작은 그럴수록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장난으로 묻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뭔가 알고 작정하고 온 것인지. 슬슬 헷갈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예. 정말입니다. 이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을 주민은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촌장 쪽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다행이네.”
아무래도 단단히 입단속을 시켜 둔 모양이었다. 이후로도 몇 명의 주민들에게 다가가 물었지만 하나 같이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을 늘어놓았다.
“보니까 페이른에서 클레이디크로 이주하는 주민들이 종종 있더라고. 왜 그런 것 같아?”
“그, 그들에겐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결코 페이른이 싫어서 떠난 것이 아니라는 건 확실합니다.”
로브를 입은 농노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이쯤 되니 자신도 답답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가 나설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나도 마음 같아선 그의 진술을 통해 백작에게 벌을 내리고 싶었지만 결국 그 후폭풍은 농노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가 클레이디크에 있다는 걸 안 이상 그의 거처를 알아내는 건 백작에게도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그래? 내가 들은 거랑은 많이 다르네. 페이른에서 우리 쪽으로 넘어온 이들에게 들어보니까 여기가 영 살기 안 좋은 곳이라더라고.”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말하자 페이른 백작도 따라 웃으며 대답을 가로챘다.
“아무래도 전하께서 클레이디크에 계시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한들 전하의 발끝만큼도 따라가지 못하니. 전하를 본받아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백작에게 물어본 거 아닌데.”
내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웃으며 말했더니 정말로 이 상황을 낙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저들에게 입막음까지 시킨 이 상황이 답답해서 짜증이 치미는데 말이다.
“아하하. 그, 그렇습니까. 제가 또 괜히 나섰군요.”
결국 여기서 더 얻을 수 있는 건 없다고 판단했다. 보는 눈이 없을 때 신변을 보장해주기로 약속하고 솔직한 진술을 얻어내든, 아니면 입막음 준비가 안 된 다른 마을로 가 보든 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 고생들 하고. 바로 옆 마을도 좀 가봐도 되지?”
비교적 금방 갈 수 있는 마을이라면 준비가 되기 전에 도착할 수도 있을 거라고 판단해서 빠르게 말머리를 쥐었다.
“예, 예. 그런데 전하. 먼 거리를 연달아 이동하셨으니 우선은 성으로 들어가 피로를 푸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 바로 가자.”
단호하게 대답하곤 고삐를 당기던 그때였다.
“전하!”
카랑카랑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얼마나 큰 소리였는지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볼 정도였다. 나 역시도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
갈라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고작 10살이나 됐을까 싶은 앳된 여자아이였다. 모두가 그 당돌함에 당황하고 있었다.
“얘, 얘. 뭐 해. 얼른 와.”
아이와 친분이 있는 듯한 주민 한 명이 그 여자아이를 잡아당기려 했지만 아이는 꿋꿋이 제자리에 선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얘기할 게 있나 본데. 좀 들어보지 뭐.”
그러자 아이를 말리려던 주민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뒤로 빠졌다.
“제국의 황자님이라고 들었어요. 어질고 총명하신 분이라고.”
“어질고 총명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황자는 맞는데. 할 말이 있나?”
“어질고 총명한 분이 아니라면 말씀드리지 못하는걸요.”
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로 당돌한 모습이었다.
“그래. 그럼 그런 사람이 맞다고 치지 뭐.”
“그런데 저희 엄마가 말씀하시기를, 본인 입으로 착하다는 사람 중에 착한 사람은 없다고 했어요.”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아이는 내 대답 대신 옆에 서 있던 트루드를 바라봤다.
“혹시 전하와는 잘 아는 사이세요?”
트루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사님의 눈에 전하는 어떤 분인가요? 정말 전하는 마음씨가 좋은 분인가요?”
트루드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 모습에 왠지 서운하기도 하고 내가 못 한 게 있었나 돌아보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잠시 후 트루드의 대답을 듣자 또 바보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누구보다도.”
“정말이에요?”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전하를 따르지도 않았겠지. 전하는 누구에게나 냉정하고, 누구에게나 따뜻한 분이시다. 낮은 곳에 있는 이들도 편견 없는 눈으로 보살피시지.”
“고맙습니다.”
그게 만족스러운 대답이 되었는지 아이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사라지셨어요.”
“뭐?”
아이의 말에 바라보던 이들이 일제히 흠칫했다. 입을 떡 벌리며 대놓고 경악하는 이들도 있었다.
백작과 촌장은 특히나 더욱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이 한 명씩 사라졌어요. 저희 엄마도 사라졌구요. 엄마는 뒷산에서 귀신이 잡아가는 거라고 절대 가지 말라고 했어요.”
이 세상에서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직접 스펙터를 두 눈으로 본 적 있었으니까. 하지만 귀신은 실체가 없는 사념체일 뿐이었다. 강제적으로 인간을 납치할 만한 물리적인 힘 따위는 지니지 못했다.
“촌장은 저것에 대해 들은 적 있어?”
“없습니다. 처, 처음 듣는 말입니다.”
그러고는 얼른 수습하려 했다.
“아무래도 어린아이다 보니 헛소문처럼 떠도는 괴담을 과하게 믿는 모양입니다.”
“헛소문 아니에요! 저희 엄마도 그렇게 말했고, 아저씨도 그렇게 말했단 말이에요.”
“아저씨? 그게 누군데?”
“그게…… 그건 말할 수 없어요. 아저씨는 자기가 알려지는 걸 싫어하거든요. 아무튼 착하고 강한 분이에요. 모르는 것도 없고요. 그런 아저씨도 저한테 뒷산에는 절대 가지 말라고 했어요.”
뒷산이라.
이게 정말 촌장이 말한 대로 헛소문인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마을에서 감추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는 직접 그곳에 가서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혹시 거기가 어디인 줄 아나?”
촌장은 애써 핑계를 만들어 내며 나를 만류했다.
“물론 마을에서 괴담이 떠드는 곳이기는 하나 실제로 몬스터가 자주 출몰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혹여나 전하께서 잘못되실까 두렵습니다.”
“그럴 일은 없을걸.”
나는 뒤에 서 있는 트루드와 챈슬러를 바라봤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목숨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실력 있는 기사들이었는데 작은 마을에 출몰하는 몬스터 따위야 전혀 두려울 리가 없었다.
“안내해.”
단호한 명령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촌장이 발걸음을 떼었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