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67)
제67화
어이가 없었다. 이토록 많은 이들이 페이른 백작의 욕심에 의해 희생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마을에서 보았던 여자아이의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들을 살릴 방법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냉정하게 상황을 지켜보자면 저들을 베어내지 않는다면 우리 쪽의 피해가 늘어날 것이고 내 목숨마저 위험하게 될 수도 있었다.
챈슬러와 트루드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검을 쥔 손에는 일말의 자비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나와 같이 연민의 감정을 품고 있을 거다.
“젠장.”
얼굴을 쓸어내렸다. 죄도 없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이들이, 이제는 시체가 된 채로 싸우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 시체는 토막이 나고 있었다. 지켜보고 있기에만은 역시 마음이 영 불편했다.
확장된 네 번째의 고리까지 모두 쥐어 짜냈다. 성배에 담아두었던 성력까지도 한 방울 남김없이 동원하여 손으로 방출시켰다. 운명의 권능 때 무리를 했던 이후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고리에 통증이 전해져 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온 땅에 신의 축복이 내립니다.] [부정한 기운을 중화시킵니다.] [의지가 강한 이들에게 신이 관용을 베풉니다.] [의지가 강한 이들이 신의 곁으로 떠납니다.]온 땅을 덮은 성력의 기운 덕분에 일부 시체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망령이 그대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고리가 다시금 확장됩니다.] [고리에 성력이 차오릅니다.]쓰러진 시체에게서 회색빛의 무언가가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영혼은 내게 말을 전하지는 못했지만 한참이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게 떠나는 순간만큼은 마음 편히 갈 수 있게 해준 데 대한 고마움일까. 아니면 페이른 백작에게 복수를 하고 자신들의 원통함을 알아준 데 대한 고마움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었다.
어쨌거나 챈슬러와 트루드는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시체를 상대하느라 모든 힘을 쏟아붓고 있는 상황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을 희생시킨 것인지 또 다른 계속해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결국 이 일의 원흉인 페이른 백작을 저지하지 못한다면 죄 없는 피해자가 늘어날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페이른에게 다가갔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흑마법의 기운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했지만, 지금의 나로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결국 성력은 흑마력의 상극이었고 방금까지와는 달리 내 고리와 성배가 성력으로 넘쳐흐르고 있었으니까.
이토록 많은 성력을 다뤄본 적이 없어 생소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다. 성력을 온전히 다루기 위해 이제껏 쉴 새 없는 노력을 해 왔다. 고작 양이 늘어난다고 해서 통제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3황자.”
페이른 백작이 조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퍽 놀랍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인정하겠소. 그대는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많이 다르군. 이건 최소 4성…… 혹은 5성이라 해도 믿을 수 있겠어. 성황의 어린 시절이 딱 이 정도의 능력을 보였으니.”
페이른 백작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대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군. 내가 이 힘을 손에 넣은 순간부터 내 목표는 성국을 완전히 몰살시키는 것이었지. 비록 준비가 덜 된 상태라고는 하나 그대가 아무리 발악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말이 참 많네.”
“거만한 건 황족이 맞군. 하나같이 똑같은 놈들이야.”
거만하다고 말하는 건 상관없었지만 다른 황족과 같은 취급을 당한 건 묘하게 기분이 좀 나빴다.
“말이 심하네.”
“황족에 대한 자긍심 또한 그대가 황족이라는 증거겠지.”
백작은 여전히 오해를 하고 있었다.
“성국의 논리는 참 재밌어. 성국은 신의 선택을 받았으니 언제고 최강국인 것 같이 굴지만 실상은 발칸 제국에 패하지 않았는가. 이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지?”
“질 만하니까 진 거겠지. 신의 선택이고 어쩌고가 무슨 상관이야.”
대화가 통하는 면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놈과 친구를 먹을 생각은 없었다. 딱히 대화 상대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허면 황족이 선택받은 일족이라는 것은? 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를 지켜보며 자비를 베풀어주실까?”
페이른 백작의 손에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아까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소용돌이가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으윽.”
나를 따라온 병사 몇은 그걸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신음을 흘렸다.
“글쎄. 이미 베풀어주신 것 같기는 한데.”
사실 힘든 순간에 신이 지켜준다니 뭐니 다 개소리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위기의 순간을 여럿 넘길 수 있었던 것도 그 신이라는 작자가 준 이 힘 때문인 게 맞으니 부정할 수만은 없었다.
“그건 앞으로 지켜봐야겠지.”
나도 손바닥에서 성력을 쥐어 짜냈다.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성력을 쥐어 짜냈다. 이전이라면 이미 동나고도 남았겠지만 한참이나 확장된 고리에서 나오는 성력의 양은 페이른 백작의 흑마력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어쩌면 그대가 신성 제국의 역사를 바꿨을 수도 있겠어. 2성으로 태어나 성황의 자리에 오른다면 말이야. 충분히 그만한 능력을 지니고도 있고. 하지만.”
페이른이 씨익 웃으며 검은 기운을 앞으로 쏘아냈다.
“신성 제국의 역사를 바꾸는 건 나다. 신성 제국 힐데스하임의 역사는 여기까지다.”
땅이 거세게 흔들리며 소용돌이가 앞으로 다가왔다. 나도 방출해 둔 모든 성력을 앞으로 쏘아 보냈다.
콰아아앙.
굉음이 울리며 주변에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주변의 나무들은 물론이고 산맥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피어난 연기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다.
“쿠, 쿨럭! 쿨럭!”
바닥에 쓰러진 페이른 백작이 검은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기침만 아니었다면 이미 죽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저, 전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제일 먼저 내게 달려온 것은 트루드였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 몸 이곳저곳을 살핀 트루드가 조심스레 물었다.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능력이 모자란 탓에 전하의 곁을 지키지 못하고…….”
“아냐. 너는 충분히 제 역할을 했잖아. 나도 내 역할을 했고.”
내가 오자고 해서 온 건데 최종 보스는 역시 내 몫 아니겠는가.
페이른 백작이 쓰러진 뒤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고, 반 토막이 난 시체들을 바라보며 다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모두가 비슷하게 착작한 마음일 것이다.
“좋은 데로 잘 갔을 거야. 가여운 자들이니까 신께서 직접 데려가 주셨겠지.”
원래라면 이런 말을 결코 내 입으로 하지는 못했겠지만, 망령들이 편하게 떠나갔다는 문구를 보았으니 이런 말을 하는 데 큰 거부감이 없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 맞을 테니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 자리에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페이른 백작 쪽 사람. 아까 전 방문했던 마을의 촌장이었다. 그가 몸을 납작 엎드린 채로 벌벌 떨고 있었다.
“저는 그저 백작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 목이 달아났을 테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트루드는 나를 바라봤다. 분노로 가득 찬 눈을 봐서는 당장에라도 베어버리고 싶은 마음인 듯했으나, 내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해한다. 네 말대로 백작의 명을 거역할 순 없었겠지. 너로서는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을 거야.”
내 말에 모두의 표정이 급격히 바뀌었다. 촌장의 얼굴에는 희망이 곁은 반면, 그 외에 모든 이들의 얼굴에는 분노가 들어찼다.
“그런데 말이야.”
나는 그중에서 가장 표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이를 바라봤다. 클레이디크에서부터 데려온, 촌장에 의해 다리가 반병신이 된 농노였다. 그에게 손짓을 하자 그가 내 쪽으로 절뚝거리며 걸어왔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어? 농노들도 타 지역으로 도망치고 그러던데. 촌장도 슬쩍 빠져나와서 위쪽에 성국 쪽에 보고를 하든, 아니면 적어도 모르는 척 살아갈 순 있었잖아.”
그 말과 함께 농노의 로브를 벗겼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촌장의 얼굴은 귀신을 본 것처럼 창백해졌다.
“너, 너, 너는…….”
나는 농노를 향해 말했다.
“일단 죽이지만 마. 입도 건드리지 말고. 제국으로 끌려 가서 진술을 하게는 해야 하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인지 농노는 감동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농노가 촌장에게 다가간 순간 나는 뒤를 돌았다. 굳이 봐서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끄아아아아악!”
촌장의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한참 후에야 농노는 내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깟 놈이 이렇게 원을 풀 수 있을 줄 몰랐습니다.”
촌장의 상태를 살피니 농노와 똑같이 다리 병신이 되어 있었다.
“바보 같은 놈.”
“예?”
“달랑 저거로 되겠어? 그동안 괴롭힘 많이 당했다면서.”
내 질문에 농노는 열심히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충분합니다. 아니, 제게는 과분할 정도입니다. 전하의 은혜 평생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대대손손 전하의 성함을 잊지 않도록…….”
“됐다, 됐어.”
뭘 그런 걸 가지고. 고개를 내저으며 데려온 이들과 함께 다시 마을로 내려갔다. 모든 상황을 전하자 마을 주민들은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내가 데려온 농노의 진술을 듣고는 결국 대부분이 울음을 터뜨렸다.
“3황자 전하 만세!”
“힐데스하임 만세!”
“위대하신 3황자 전하의 은혜에 낮은 이들이 경의를 표합니다!”
그게 영 낯간지러워서 준비해 둔 거처 안으로 들어갔지만 그 소리는 밤새도록 끊일 줄을 몰랐다.
결국에는,
“가서 조용히들 하라고 해. 안 그러면 못살게 굴 거라고.”
그렇게 말을 전하도록 하자 이내 조용해졌고, 다음 날 힐데스하임의 주교가 직접 올 때까지 편안히 잠이 들 수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