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75)
제75화
[’운명의 권능’이 발동됩니다.] [피할 수 없는 미래 중 일부가 주어집니다.]마르틴에게 대답하려던 찰나, 자동으로 운명의 권능이 발동되었다.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운명의 권능은 내 모든 성력을 바닥까지 쥐어 짜냈다.
익숙해지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운 통증이 전해져 왔지만 집중을 해야만 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으로, 이렇게 권능이 저절로 발동되었다면 내게 꼭 필요한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봐야만 하는 미래가 있다는 것.
주변에 있던 수많은 오우거와 병사들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이내 사방으로 어두운 기운이 들이닥쳤다.
“전하! 피하십시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트루드가 미래의 나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트루드에 의해 미래의 나는 넘어졌고 그 위로 새까만 마기가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미래의 나는 나답지 못하게 당혹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는 나 역시도 비슷한 감정이었다.
모든 세상이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파란 들판은 폐허가 되었고, 많은 이들이 죽거나 마기에 잠식되어 있었다.
다크 엘프가 엘프를 죽이고, 흑마법사들이 인간을 죽이고, 그 외에도 수많은 종족들이 동족을 학살하는 잔인한 광경. 세상은 완전히 멸망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경까지 이르게 만든 장본인. 보통은 아닌 기세를 보이고 있는 악마가 거대한 창을 휘둘렀다.
“크윽……!”
챈슬러가 검으로 막아냈음에도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그가 나자빠진 곳의 바닥이 음푹 파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위력. 게다가 수많은 마기가 챈슬러의 주위를 맴돌며 그를 잠식시키려 하고 있었다.
대악마 루시퍼. 결국 그의 부활을 막지 못했고, 이 세상으로 강림한 루시퍼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성국의 기사단장도, 성황도, 다른 두 황자들도.
루시퍼에게 대항하기 위해 신성 제국 뿐만 아니라 발칸과 모든 왕국이 손을 잡은 듯 보였지만 항전하고 있는 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처참히 바닥에 뭉개져 있는 시체들과, 부러져 버린 그들의 깃발만이 초라하게 남아 있었다.
애초에 아무리 강한 무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성력이 없는 한 악마의 군단을 상대하는 데 큰 기여를 하지 못할 것이다. 흑마법에 정신이 잠식되어 버릴 테니까.
콰앙!
대악마 루시퍼가 창을 바닥에 내리찍자 바닥에 쓰러진 채로 발작을 일으키던 챈슬러가 검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성국에서 버림을 받아 쉽게 이름을 올리지는 못하지만. 현 힐데스하임에서 가장 강한 기사를 꼽으라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후보 중 한 명.
그런 그가, 그 어떤 이를 상대로도 쉽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던 챈슬러가,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다, 단장님!”
트루드는 그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울분 섞인 비명을 질러댔다. 그녀 역시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실체가 아닌, 앞으로 일어난 미래를 보는 것뿐인데도, 그녀의 눈은 꼭 온전히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할 정도로 심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미래의 나는 그 광경을 허탈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한 듯한 얼굴이었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루시퍼는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나와 트루드를 바라보았다.
「너였군. 진정한 신의 대리인이라는 인간이.」
그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기괴한 웃음을 흘려댔다.
「그런 인간이 나의 힘을 부여받은 인간과 함께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우연인가.」
루시퍼가 말하는 것은 트루드가 가진 힘에 대한 것이었다. 트루드는 앵거바딜을 통해 악마의 힘을 깨워냈고, 정신이 빼앗기지 않는 선에서 그 힘을 적절히 활용한 적 있었다.
「나의 대리인이여. 그대 덕분에 빠르게 깨어날 수 있었으니 특별히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 반대되는 두 명의 신을 섬기는 인간은 있을 수 없지. 그대의 신을 버리고 내게로 오라.」
루시퍼가 트루드를 향해 새까만 팔을 내밀었다.
챈슬러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트루드가 입술을 꾸욱 짓씹었다.
“너는 악마다. 진정한 신은 오로지 성국에서 모시는 분뿐이지. 그리고 나는 너의 대리인이 아니다.”
그 말에 악마의 표정이 일렁였다. 그의 눈이 새빨간 빛으로 물들었다.
「버러지 같은 인간 주제에 감히! 네게 기회를 주려 했더니 그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는구나!」
루시퍼는 귓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크게 호통을 쳤다.
「뼈까지 잘근잘근 씹어주지. 죽은 뒤에도 고통에 몸부림치도록 지옥으로 넣어주마.」
“결코 그럴 일이 없다. 신께서 나를 구원해주실 것이니.”
트루드는 악마의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은 채로 당당하게 말했다. 그것은 악마가 원했던 반응이 아닌 듯 영 아쉬운 듯한 얼굴이었다.
「……멍청한 인간 같으니.」
악마는 그런 트루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챈슬러까지 손쉽게 죽여버린 루시퍼가 트루드를 제거하는 건 손쉬운 일일 텐데도.
잠시 후 루시퍼가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그래, 좋아. 네가 그토록 굳건히 지키는 신념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는지 지켜보도록 하지.」
루시퍼가 트루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에 빠르게 반응하고 허리춤의 검에 손을 얹은 트루드가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트루드의 깊은 내면에서. 네 개의 신성한 고리 속에서. 조그맣게 자리를 잡고 있던 대악마 루시퍼의 기운.
앵거바딜을 통해 때로는 그녀를 절망에 빠뜨리기도 했지만, 분명 큰 도움이 되기도 했던 양날의 검이 루시퍼에 의해 증폭되고 있었다.
검을 쥔 트루드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트루드!”
미래의 내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채고는 트루드에게 다가가 성력을 부여했다. 그러자 그녀의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던 루시퍼의 힘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귀찮은 힘이군. 하지만 적당히 나대야지.」
루시퍼가 손을 휘두르자 허공에 생겨난 창 형상의 마기 수십 개가 나를 향해 쏘아졌다. 나는 얼른 성력을 펼쳐 실드를 생성해 냈다. 지금으로부터 얼마나 지나 있는 시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성력의 양을 보면 5성에 이른 듯 보였다.
그럼에도 루시퍼의 공격을 온전히 막아낼 순 없었다.
콰앙!
실드가 부서지며 미래의 내가 나가떨어졌다. 간신히 숨은 붙어 있었지만 더이상 루시퍼에게 저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전하!”
트루드가 악마의 힘에 잠식되는 와중에도 쓰러진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죽이진 않았다. 살려둬야 하니까.」
루시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숨통은 네가 직접 끊어야 하니까. 질긴 인연은 확실하게 끊어야 미련이 안 남지 않겠어?」
루시퍼가 손을 들어 올리자 트루드가 반강제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뜬 트루드는 고개를 휘저었지만 그녀의 몸은 악마의 손을 따라 계속해서 걸었다.
그녀가 멈춰 선 곳은 쓰러져 있는 내 앞이었다. 트루드는 불안한 얼굴로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지만 그런 반응이 오히려 루시퍼를 즐겁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내 사도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해라.」
트루드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이미 이성을 잃었어야 정상인 상황에서 트루드는 어떻게 해서든 정신을 부여잡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하를 지키겠노라 다짐했거늘.”
트루드는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쥐어 짜내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트루드가 검을 들어 올렸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녀의 검에는 검붉은 기운이 어려 있었다.
푸욱.
하지만 그녀의 검은 나를 향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심장을 찌른 트루드는 쓰러지기 직전까지 나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전하.”
들려온 목소리에 환상에서 벗어났다.
“……트루드.”
현실에서 멀쩡히 서 있는 트루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 환상일 뿐이었는데.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충분히 바꿀 수 있는 일인데.
지금 이 순간 트루드가 멀쩡히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만큼 트루드와의 유대가 깊어진 것일까. ‘서약’이라는 것이 단순히 형식상으로 주종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닌, 심적으로도 많은 것을 공유하는 사이라는 현자의 말이 떠올랐다.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뒤처리는 저희가 마저 할 테니 오우거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만 결정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트루드의 옆에는 마르틴도 서 있었다. 그가 분명 내게 오우거를 살려주고 싶다고 말했었지.
“저들이 앞으로도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수 있다고 확신하나?”
내 말에 마르틴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표현하는 방법이 다소 거칠고 투박하나 결코 비열하지는 않은 놈들입니다. 예전부터 먼저 피해를 입은 쪽은 오우거였지요. 인간들에게 말입니다.”
사실 운명의 권능이 발동되기 전까지는 별생각이 없었다.
오우거가 무고한 인간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으면 살려줘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날뛰던 루시퍼를 봉인했던 과거. 설화에 따르면 그건 인간들이 홀로 이룬 업적이 아니었다. 수많은 종족들이 인간과 합세하여 마족에 대항했다고 알려져 있었고, 이번에도 그게 열쇠가 될 수 있었다.
다크 엘프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고, 그들을 엘프로 되돌리려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오우거 역시도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특히나 이들은 흑마법에 영혼을 팔아넘기고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특이한 종족이니, 악마를 상대로도 제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럼 그 부분에 있어서는 마르틴 경이 오우거들에게 확실히 인지를 시켜 둬. 인간들에게 또다시 피해를 줬다가는 이번처럼 끝나지는 않을 거라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르틴은 뭐가 그리 고마운 것인지 기쁜 얼굴로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댔다.
“그리고 저들로 인해 피해를 입은 마을에 복구 작업을 해야 하는데, 오우거들도 나서서 돕도록 하고.”
“예. 힘쓰는 것을 원체 좋아하는 놈들이니 거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르틴의 말을 듣고, 나는 주저앉아 있는 오우거 족장에게 다가갔다. 그 이유가 결코 마르틴에게 져서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마르틴의 힘에 오우거들은 순수한 감탄을 흘리고 있었다.
다만, 힘으로서 오우거들을 통솔해 오던 족장이 팔 한쪽을 잃은 채 살아가야 하니 그것이 허탈할 것이다. 다부진 근육을 가지고 저렇게 움츠려 있으니 왠지 모르게 안쓰러웠다.
“아까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어떤 것 말이냐.”
“네 팔 붙여줄 수도 있다고 했던 거. 가능성이 낮긴 한데, 혹시 잘린 팔이 있으면 내가 붙여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내 말에 오우거의 눈빛이 어린아이처럼 빛나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