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80)
제80화
힐데스하임이 지닌 성물.
힐데스하임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물건인 만큼 베일에 쌓여 있는 부분이 많았다.
선조들이 신비로운 힘들 담아 가공했다, 혹은 신께서 인간을 위해 태초부터 내리셨다. 그 출처마저도 학자들이 활발히 연구하는 대상이 되었으며.
어떤 성물이 정확히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총 몇 개의 성물이 있었고 지금 전해지는 성물이 총 몇 개인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헌데.
“현자의 말대로 성물에 비밀이 간직되어 있다고 해도, 그걸 찾을 방도가 없잖아.”
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분명 대부분의 성물들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역사서에 적혀있지만, 버젓이 성물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도록 기록된 부분도 있지요.”
그 말에 현자가 말하는 곳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브레멘?”
일전에 방문한 적 있었던 발칸 제국의 수도이자, 성소라 불렸던 과거 힐데스하임의 수도.
“예.”
“하지만 거긴…….”
“분명 쉽지 않겠지요. 전하께서는 방문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은 일일 터인데, 그곳에서 성물을 되찾는다니.”
“걸리면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겠네.”
“……부정할 수는 없군요.”
“괜찮아. 그런 거 무서워 한 적도 없고. 그래서, 현자가 이 이야기를 꺼낸 데는 이유가 있겠지?”
“예. 성국에서 발칸으로 조만간 사절단을 보낸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대표로 나서 주신다면, 성황 폐하께서도 기꺼워 하실 테고 발칸 역시 전하의 성의를 나쁘게 보지는 않을 테지요.”
현자는 조용히 나를 바라봤다. 선택은 나의 몫이라는 듯이.
성물이 지닌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는 내 심장에 흡수된 영겁의 성배를 통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 막상 간다고 하더라도 성물을 찾을 방법이 없는 거 아니야?”
그 넓은 브레멘에서 성물을 찾는다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전하께서 마음을 굳히신 거라면 먼저 들르셔야 할 곳이 있습니다.”
현자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얼굴이었다.
“슬슬 황비를 찾아가 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황비라면…….”
힐데스하임에 세 명의 황비가 있었고, 나는 현자가 누굴 말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폐위된 채로 생사가 불명한 힐데스하임의 세 번째 황비. 그리고 지금의 나를 낳은 어머니.
“챈슬러 경도 말은 않고 있지만 많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는 처음에 내게 적대적이었고 함께 지내다 보며 마음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나는 그와 한 약속을 잊지 않았다. 그는 나를 황비에게 안내할 때까지만 함께 있겠다고 말했었다.
지금의 그라면 나를 떠나지 않을 테지만 어쨌든 황비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리고 황비님께서 전하께 큰 도움을 주실 겁니다.”
“알겠어.”
한창 병력 양성에 힘쓰고 있는 챈슬러가 빠져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챈슬러는 걱정하지 않는 듯 보였다.
“트루드와 마르틴에게 맡겨두면 괜찮을 겁니다. 그들은 이미 어엿한 기사들이니.”
챈슬러만큼은 아니지만 트루드와 마르틴의 실력이 다른 정예 기사들과 견주어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병력을 양성하고 이끄는 건 또 다른 문제지만. 챈슬러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그렇게 베이언 영지를 맡겨 두고 챈슬러를 포함한 일부 병력들을 이끌고 항해에 나섰다.
* * *
힐데스하임의 서쪽 끝. 이미 버려지다시피 한 일대의 바다는 눈이 쩍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을 뽐내고 있었다.
바다를 가르고 나아가는 선박의 갑판에 서서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지금만큼은 잃어버렸던 마음의 여유를 조금이나마 되찾을 수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왔을까.
이미 전생의 기억보다 현생의 삶이 더욱 자연스러워졌지만, 새삼스레 그런 내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의사로서 사람이 눈 앞에서 죽어가는 걸 볼 때마다 익숙해지기는커녕 더욱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볼 때마다 막연한 슬픔보다는 죽음을 택한 이들의 비장함이 가슴 속을 파고들어 알게 모르게 잔뜩 흥분하고만 있었다.
“휴우.”
아무래도 이런 곳에서 살다 보니 정신이 나가버리긴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말 소름 돋게도 이런 내가 싫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만족스럽기만 했다.
남의 죽음을 보며 가슴 아파하는 일은 심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니까. 아무래도 그렇게 받았던 스트레스가 쌓여서 요절하게 된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었고.
“바다가 참 예쁩니다.”
언제 다가온 것인지 옆에 서 있는 챈슬러가 앞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게. 클레이디크에서랑은 또 다르네.”
“헌데 과거 이곳을 일컬었던 이름이 혈해血海였던 것 아십니까?”
그런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어감만으로도 대충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마물들의 침공이 있었을 때, 이곳에서 가장 격전지였고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 근처에 촌락이 형성되지 못한 것 역시 과거의 좋지 못한 기억 때문일 테지요.”
“그때의 이야기, 더 알고 있는 거 없어?”
과거 인간들이 악마와 전쟁을 벌였고, 신의 힘을 빌려 무찌른 역사적인 사건.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역시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너무도 많았다.
“방금 말씀드린 것 역시도 저희 마을에 구전되어 온 이야기라 허구가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저는 어렸을 적,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기사의 꿈을 품고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항상 무뚝뚝하게만 보이던 챈슬러의 눈빛이 그 어느 떄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혈해는 마물들의 검은 피와 인간들의 붉은 피가 섞여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참혹한 색을 띠었다고 전해집니다만. 누군가는 혈해를 어떠한 것보다도 거룩한 인간들의 징표라고 여겼다 합니다. 혈해에 빠져 죽은 선조들은 환한 빛에 휩싸여 승천했다고 하더군요.”
거룩하다. 그 말뜻을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가 있었다. 단순히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까지도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 역시 그런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챈슬러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런 챈슬러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전하가 아니었다면 감옥에서 썩다 물고기 밥이나 되었을 테지요. 그러니 저는 전하를 위해…….”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예?”
“경이 말한 것처럼 경의 목숨을 살린 건 나니까 그 주인도 나야. 결정은 내가 할 테니까 함부로 죽느니 어쩌니 하지 마.”
“……알겠습니다.”
챈슬러는 내 말을 듣고는 다시 고개를 앞쪽으로 돌렸다. 그의 옆모습에서 보이는 한쪽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있었다. 애써 감추려고 하는 듯 보였지만.
역시나.
그들의 거룩한 죽음이니 뭐니 하는 게 이해는 되어도, 내 사람을 떠나보내는 건 아직까진 받아들이기 힘든 게 사실인 모양이었다.
-휘이잉.
그렇게 시원한 바람을 쐬며 앞을 바라보고 있을 때.
-위이이잉.
점점 더 바람 소리가 거세지더니.
-화아악.
하늘이 검게 물듦과 동시에 커다란 태풍이 저만치서 소용돌이를 만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으아아악!”
“저, 저게 뭐야.”
“배를 돌려라! 우현에 붙어서 전부 노를 저어! 더 빨리!”
어마어마한 크기의 소용돌이는 이제 와서 방향을 튼다고 한들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고, 당연히 배 위에서는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는 이들을 뒤로하고 정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소용돌이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나를 맹수처럼 덮치려 들고 있었고.
[「천후天候의 권능」이 발동됩니다.]심장의 고리가 빠르게 회전하며 모든 성력을 쏟아내었다.
바로 앞에서 멈춘 소용돌이는 한참이나 나를 노려보는 듯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전하께서 또다시 기적을 일으키셨다!”
“하늘의 뜻을 바꾸셨다! 힐데스하임께서 전하를 굽어살피심이라.”
몸을 낮게 깔고 나를 올려다보는 이들. 하지만 급격히 많은 양의 성력을 사용한 탓에 그들을 상대해 줄 힘이 없었고. 실내로 들어가 잠시나마 누워있으려던 찰나에.
번뜩이는 무언가가 피부를 스쳤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장에서나 맞닥뜨리던, 아니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살기였다.
나는 황급히 뒤를 돌았다.
동시에 배가 흔들리며 자세가 무너져 빠르게 난간 쪽으로 붙었다.
기울어진 배의 끝에서 반대쪽을 올려다보니, 형체가 뒤틀린 거대한 물고기가 입을 벌린 채 선박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들고 있었다.
“젠장!”
또다시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들려왔지만, 그 음성들은 이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감각이 바래져만 가는 것은 청각뿐만이 아니었다. 시각과 촉각마저도 점점 감각을 잃고 멍해져만 가던 와중에.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정체불명의 물고기를 본 순간 어려서부터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가 밝은 빛을 냈다.
“합!”
챈슬러가 거칠게 검을 뽑아 들면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챈슬러가 마력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던 찰나, 알 수 없는 기억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치 내가 겪은 것처럼 생생한 감각들. 쉴새 없이 많은 사고가 머리를 헤집는 동안에도 눈앞의 풍경은 마치 슬로우모션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느릿느릿하게만 보였다.
[조건을 만족하여 마력의 고리가 형성됩니다.]반지의 기운이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
성력과는 분명히 상반되는 기운이었지만, 성력의 고리는 오히려 그 기운을 반기듯 안정적으로 회전하고 있었고. 그 옆에 새로운 기운이 미약하게나마 고리를 형성시켰다.
나는 그 기운이 어떤 것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힐데스하임에서는 결코 반기지 않는, 그리고 발칸 제국에서는 자신들의 주된 힘으로 사용하는 마력이었다.
[마력과 성력이 만나 상호 보완을 이루게 됩니다.] [성력의 기운이 마력을 증폭시킵니다.]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고는, 새로 얻은 고리를 강하게 회전시켰다.
성력과는 분명히 다른 기운이라 부자연스러우면서 통증도 강하게 전해졌지만, 일순간 증폭된 마력의 양은 모르긴 몰라도 보통 수준은 아닌 듯 보였다.
콰아아앙!
손에서 뻗어나간 파란 빛의 기운이, 챈슬러를 덮치려던 괴물을 향해 폭발을 일으켰다. 이내 폭발에 휩싸인 마력의 괴물은 형체도 남기지 않은 채로 사라졌다.
“전하?!”
눈앞에서 폭발을 바라본 챈슬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