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81)
제81화
이그네아 가문.
힐데스하임에서는 유력한 가문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위용이 넘치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 가문이 가진 힘의 바탕은 마력이었다. 이그네아의 혈족들은 마력에 어마어마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고, 과거 힐데스하임의 최전성기에도 분명 막대한 힘을 제공했었다.
하지만 그건 역사의 단편일 뿐.
아니, 이제는 역사도 아니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 뿐이었고 이그네아 가문은 승전국에 속해 있었음에도, 힐데스하임 내의 권력 투쟁에서 명백한 패자였다. 선조가 이루었던 업적들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력도. 모두 황족에 의해 말살되었다.
그나마 귀족 가문으로서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 그들에게 남은 전부였다.
그렇게 입지가 떨어진 이그네아 가문의 장녀, 엘라 이그네아는 가문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 가문의 반발에도 자발적으로 택했던 길이었다.
힐데스하임에서 누구도 가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조각 같은 미모를 지녔던 엘레나였기에 성황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시들지 않는 꽃은 없는 법. 물론 떨어진 꽃봉오리조차 아름다울 수 있지만, 황궁에서의 혹독한 생활은 엘레나를 초췌하게 만들었고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은 금세 빛바래졌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녀가 낳은 성황의 세 번째 아들, 데미안 힐데스하임이 2성의 성력을 지닌 채로 태어났다. 안 그래도 성황의 눈에서 멀어져만 가던 엘레나를 내칠 좋은 계기가 되어버렸다.
“……흐흑, 흑.”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힐데스하임에서 멀리 벗어나 숨어 살고 있는 처지에도.
엘레나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아들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황궁에서의 고된 삶을 지탱하게 해주었던 유일한 존재. 뱃속에서 열 달 가량을 품었음에도, 정작 얼굴은 한 번밖에 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어여뻤던가.
아직까지도 꿈속에서 그 아이의 얼굴과, 유난히 점잖았던 울음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아들에게 남길 수 있는 것은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반지뿐이었다.
그 반지가 아들이 자신에게 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줄 수는 있을 테지만, 그것만으로는 쉽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챈슬러에게 특별히 부탁을 해 두기도 했다.
기약 없는 기다림.
그녀는 매일 섬의 동쪽 끝자락에서 보이지도 않는 대륙을 향해 목이 빠져라 가만히 서 있었다.
“미련한 것. 괜한 기대일랑 하지 말거라.”
자신 때문에 나락까지 떨어지게 된 이그네아 가문의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리곤 자신의 아들에게까지 악담을 퍼부었다.
성황의 핏줄인데 별 다를 바 없을 거라느니, 그가 이곳에 오면 이그네아 가문은 또다시 도망자 신세가 될 거라느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데미안에게 어머니의 역할을 단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고, 그가 자신을 어머니로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리고 힐데스하임의 역적이 되어버린 이그네아 가문을 가만히 두고 볼 가능성도 적었고.
그럼에도 엘레나는 내심 데미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아아…….”
그리고 마침내 바다를 가르고 서쪽으로 진입하는 선박이 나타났다. 황실의 문양이 그려진 닻을 올린 커다란 배.
마력을 통해 살펴보니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았음에도 멋드러진 미모를 자랑하는 미소년이 서 있었다. 옆에 있는 챈슬러를 본 순간 엘레나는 그가 자신의 아들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들아!”
엘레나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작게나마 쥐어 짜냈다.
“무얼 기대하는 게냐.”
그런데 어느새 나타난 이그네아 가문의 사람들이 그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이 땅에 발을 들인다면 또다시 재앙이 찾아올 것이다. 당시에 너 때문에 죽어 나갔던 이들을 모두 잊은 게냐?”
그에 대해서는 차마 할 말이 없었다. 엘레나의 탓이었다. 엘레나가 성황과 결혼했고, 그의 마음에서 어긋나기 시작했고, 아들에게 고작 2성이라는 성력밖에 주지 못했다.
모든 것이 그녀의 탓이었다.
“네 아들이 이 땅을 밟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그네아 가문의 사람들이 자신의 아들을 죽일 수도 있는데,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 안 됩니다. 제발……!”
하지만 엘레나는 다른 이들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했다.
가문의 사람들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마력으로 태풍을 일으켜 자신의 아들이 탄 배를 격침하려고 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이게 무슨.”
이그네아 가문에서도 가장 뛰어난 마력을 지니고 있는 가주의 마법이, 3황자의 성력을 통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태풍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추었다.
“힐데스하임께서 저희를 구원하시려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잠잠해진 날씨. 성력으로 저런 일을 해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3황자가 신의 선택을 받은 것이라 확신한 엘레나가 다급히 외쳤지만 가문의 사람들은 단호했다.
“신께선 이미 우리를 버리셨다. 황자는 우리를 신의 뜻에 따라 심판하러 왔을 뿐.”
그렇게 말한 가주는 다시 한번 마력을 일으켰다. 물고기 모양의 괴물을 만들어 낸 가주는 그대로 3황자가 타고 있는 배를 덮치려 하고 있었다.
‘제발!’
엘레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을 하기로 했다.
아들에게 준 마력이 담긴 반지. 아들이 자라나면서 혹여나 위험에 맞닥뜨렸을 때 보호해 줄 마법을 각인시켜 두었지만, 반지가 가진 진정한 힘은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 마력을 얻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성력의 고리가 자리 잡고 있으면 마력의 고리를 형성시키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이그네아의 보물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도록 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3황자가 마력을 깨우친다고 한들, 그게 당장에 큰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그네아의 피가 섞여 있는 것은 맞으나 마력을 다루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아무리 막대한 양의 마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데 능숙해지려면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다.
하지만.
-콰아앙.
3황자의 손에서 뻗어 나온 마력은 이그네아 사람들이 보기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모두가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성국의 황자가 마력을 익혔다고?”
마력에 한해서는 통달의 경지에 이른 이그네아 사람들이 헷갈릴 리가 없었다.
분명한 마력의 기운이었다.
엘레나는 이때다 싶어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보십시오! 신께서 저희를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거라면 황자가 어찌 마력을 익혔겠습니까? 황자는 저희를 구원하러 온 것입니다!”
이그네아의 반지가 3황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기에, 엘레나의 말을 들은 이들은 이번에는 꽤나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 * *
방금 일어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력을 사용하는 이들이 힐데스하임이라고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성력과는 다르게 마력의 고리는 후천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 때문에 일부가 국법을 어기고 그 힘을 손에 얻었다가 발각된 경우가 흔치 않게 발견되었다.
하지만 성력의 고리를 만들어 낸 이들은 결코 마력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그게 널리 알려진 정설이었다.
그게 힐데스하임에서 마력을 금기시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만약 힐데스하임의 높으신 양반들이 자신의 힘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다면, 마력은 성력을 손에 넣지 못한 이들이 얻는 열등한 힘이라느니 떠들어 댔겠는가.
“……전하.”
챈슬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힐데스하임의 황족이 마력을 익혔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의술을 행한다는 것이 알려질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파장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괜찮아.”
하지만 다행히도, 여기서 방금 내가 쓴 힘이 마력이라는 것을 파악한 이는 챈슬러 이외에는 없는 듯 보였다. 애초에 힐데스하임에서 살아가다 보면 마력은 구경하기도 힘든 것이 현실이었으니까.
챈슬러의 염려 담긴 시선을 받아내는 와중에, 어두컴컴하던 하늘이 새파랗게 열렸다. 주위를 맴돌던 따가운 기운도 완전히 걷히고 청량한 감각만이 피부로 전해져 왔다.
그 풍경에 매료되어 있던 것도 잠시였다. 이내 사방이 녹아내리듯 일렁이기 시작했다. 방금 느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양의 마력이 뒤틀리고 있었다.
“저, 저건 대체…….”
그렇게 일렁이는 공간 속에서, 텅 비어 있던 바다에 드넓은 섬이 갑작스레 나타나기 시작했다.
“……황비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챈슬러가 나지막이 말했다.
황비가 저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이토록 강력한 마법이 걸려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전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탄 배는 점점 더 섬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저만치서 로브를 입은 채로 일렬로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배를 완전히 붙이고 나서 땅으로 발을 내디뎠다.
시선들이 좋지 않았다. 그 이유야 알 법했다. 황비의 일족은 성황에게 버림을 받아 쫓겨나게 되었고, 나는 그런 성황의 아들인 탓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유일하게 따스한 눈길을 보내는 여인이 있었다.
어쩐지 연약한 듯 보이지만 젊었을 적 꽤나 아름다움을 뽐냈을 법한 여인. 그녀가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쏟아낸 탓에, 그녀가 나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3, 3황자 전하가 맞습니까?”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얼마나 목소리가 떨리는지 듣고 있는 내가 다 불안해질 정도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어머니.”
그녀가 내 어머니라는 사실이 어쩐지 와닿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태어난 이후로 그녀를 직접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고,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나도 아버지였던 자로서 그녀의 심정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고 어느 정도는 장단을 맞춰주기로 한 것이었다.
“흐윽. 흐, 흐흐흑.”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온몸을 들썩이며 울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다른 이들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그들이 내게 말했다.
“들어가서 따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