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82)
제82화
이그네아의 가주라는 사람은 냉혈한이었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칼과 수염은 온통 하얀색이었지만, 그게 오히려 그의 인상을 더욱 딱딱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이를 독대하고 있자니 역시나 불편한 것이 사실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전하께서 이곳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어머니를 뵈러 왔습니다. 또 앞으로 제가 나아갈 길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왔습니다.”
나보다 지위가 낮은 이라지만 역시 이렇게까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다, 내 외할아버지라고 생각하니 말을 놓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전하께서 걷고자 하시는 길이 무엇입니까?”
“말해 뭐하겠습니까. 힐데스하임의 성황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내가 성황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면 나뿐만 아니라 내 주위의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잃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 대답이 불만족스러웠는지 가주의 이맛살이 꿈틀거렸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직접적으로 물었다.
“무엇이 못마땅하십니까?”
“기왕 힐데스하임에서 버림 받은 입장에서,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게 저도 편합니다.”
“성국은 부패했습니다.”
그 말에 나는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다. 그 말에는 적극적으로 공감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 나조차도 감히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해서 답답했던 말을 이그네아의 가주는 시원시원하게 내지르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어차피 성국에서는 사라져 버린 가문이 되어서일까.
당연하게도 나는 그의 발언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주어서 속이 시원하달까.
“저 또한 신을 오래도록 믿고 따라왔습니다. 지금도 완전히 그 끈을 놓은 것은 아니나, 솔직히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녕 이게 신께서 바라시던 세상인가 싶어 회의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해합니다.”
단 한마디. 그 한마디만으로 이그네아 가주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그래졌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저는 이런 나라의 군주가 되어 떵떵거릴 생각도 없고. 그저 성황이 되어서 모든 걸 바로잡고 싶을 뿐입니다.”
그는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가주가 고민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안쪽으로 들어가 커다란 구슬 모양의 수정을 가지고 나왔다. 그가 내 앞에서 수정에 마력을 주입하자, 실내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전하께서 바라시는 세상이 제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에서 사라진 진실의 일부를 엿보실 수 있을 겁니다. 대화는 그 이후에 나누는 것이 편할 테지요.”
나는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에 집중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백. 그 속에서 빛이 나타났다.
“힐데스하임이 최전성기를 맞이하던 시절입니다.”
성황으로 보이는 남자는 지금의 성황과도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빛을 뽐내고 있었다. 그가 지닌 성력 역시도 이 시대에선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힐데스하임의 이름으로!」
초대 성황이 검을 휘두르는 족족 마물들이 쓰러졌다.
대악마를 비롯한 막대한 어둠이 휘몰아치고 있을 때도, 성황이 이끄는 대종족 연합은 한치 도 물러서지 않은 채로 앞으로 나아갔다.
마력과 성력.
그 두 힘은 균형을 이루며 서로를 보완하고 있었고, 그 힘이 없는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모두가 자신만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마력은 성력으로 할 수 없는 많은 부분을 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성력 역시도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부분에서 활용되고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나는 머릿속을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활용할 방안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혁신적인 의료 논문을 마주했을 때처럼 시야가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현재는 힐데스하임에서 배척받는 의술 역시도 충분히 활용되고 있었다. 비록 내 눈에는 많이 모자란 수준임에도, 성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많은 환자들을 보살피기에는 충분했다.
헌데 지금의 힐데스하임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성력이 신이 내리신 힘이고, 마력은 그에 상충되는 힘이라는 게 현 힐데스하임에서 떠도는 정설이지요.”
그게 말도 안 된다는 사실은 나 역시도 알고 있었다.
굳이 눈 앞에 펼쳐지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아까 얻은 마력의 고리가 가슴 속에 버젓이 자리를 잡은 것 때문이었다.
“허나 두 힘 모두 신께서 내려주신 것입니다. 선조들께 마력이 없었다면 대악마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조만간 찾아올 위기를 인간들의 힘만으로 넘기는 건 사실상 쉽지 않을 테지요.”
이그네아의 가주가 말하는 위기는 루시퍼의 부활을 뜻하는 것이었다. 나야 트루드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이그네아의 가주가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가주는 그런 내 눈빛을 이해하고는 입을 열었다.
“예로부터 이그네아는 인간들의 길잡이가 되곤 했습니다. 어느 정도 앞날을 내다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요.”
“허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내 질문에 가주의 대답은 단호했다.
“이그네아는 더 이상 길잡이의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현 성황에게 받아온 핍박에 대해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것 치고는 이그네아가 자리 잡은 곳이 영 심상치 않군요.”
가주가 내 말에 움찔거렸다.
힐데스하임 대륙의 서쪽 너머.
대악마를 비롯한 마물들이 깨어났으며, 수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던 곳.
그리고 지금은 어둠이 잠들어 있지만 그들이 깨어나게 될 곳이었다. 루시퍼가 부활한다면 이그네아가 자리 잡은 이곳이 가장 먼저 무너지게 될 것이었다.
“성국을 돕지 않을 뿐. 저희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사명은 지킬 예정입니다.”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까?”
“글쎄요.”
가주는 확실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답이 완고한 부정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내심 안심이 되었다.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걸로 보였으니까.
“전하께서 정말 저희와 뜻이 같으신 거라면…… 그리고 전하께서 정말로 성국을 이끌게 되신다면. 재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윽고 나로선 충분히 만족할 만한 대답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가주가 내게 그리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래간만이군요.”
이그네아 가주의 방에 들어선 챈슬러가 고개를 숙였다.
“경께서는 못 본 새에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군.”
“그렇습니까?”
“그렇다마다요. 성황 폐하의 밑에 있을 때보다 훨씬.”
그 말에 챈슬러는 움찔거렸다. 그 시절의 일은 챈슬러에게도, 이그네아에게도 악몽 같은 기억이었다.
“어쨌거나 경께는 항상 미안할 따름입니다. 제 딸아이를 살려주어 그렇게 되었으니.”
“……아닙니다. 제게는 오히려 좋은 기회였지요.”
“기회라면?”
“제가 진심으로 따를 주군을 만날 기회 말입니다.”
“그게 혹시 3황자 전하를 뜻하시는 게요?”
가주의 질문에 챈슬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투옥되지 못했더라면 저는 3황자 전하를 따르는 일도 없었을 테고, 성황 폐하의 밑에서 불명예스러운 기사가 되었을 테지요.”
이그네아의 가주는 한참이나 챈슬러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소. 3황자 전하는 정말로 믿고 따를 만한 분이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가주가 질문을 던진 이유는 간단했다.
방금 3황자가 자신의 앞에서 보인 모습이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그네아의 힘을 빌리기 위해.
이그네아는 오랫동안 힐데스하임에서 떨어져 있었고 성국 내의 상황을 접하지 못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3황자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
챈슬러의 대답은 단호했다.
“3황자 전하를 모시게 된 것은 제게 축복과도 같은 일입니다.”
가주는 챈슬러의 반응을 보고는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셨소?”
“……제 표정이 어때서 말입니까?”
“꼭 자랑할 생각에 신난 어린아이 같더군.”
“흠흠.”
챈슬러는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굳혔다.
“성황 폐하께서도 그리되실 줄 누가 알았겠소. 파우스트 경께서도 그리되실 줄 모르고 주군으로 모셨던 것이 현 성황 폐하인데.”
힐데스하임 내에서라면 목이 당장 나가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말이지만, 이그네아는 이미 힐데스하임에서는 죽은 사람이 되어 있으니 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습니다. 3황자 전하께서는 결코 지금의 성황과 같지 않으리라고.”
“……경께서 그리 말한다면 보통 분은 아니신 게로군.”
“아무래도 전하의 그 인품은 외가 쪽의 영향을 많이 받은 덕일 테지요. 황비님께서 워낙 훌륭하신 분이셨으니.”
“황비라니. 폐위된 지가 언젠데 그런 소리를.”
챈슬러를 나무라듯 말하는 가주였지만 그건 자신의 경박스러운 감정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가주 역시도 딸아이의 아버지로서, 자신의 딸을 치켜세우는 데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바보처럼 양보만 하면서 살긴 하더이다. 혼쭐을 내도 그 성격이 변하지 않으니 원.”
그것이 챈슬러가 보기엔 영락없는 딸바보의 모습이라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가주님께서 전하께 힘을 보태주실 수 있다면 바라시는 건 뭐든 하겠습니다.”
챈슬러는 이그네아 가문이 지닌 힘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분명 이그네아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함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성황도 그토록 이그네아를 견제했을 테고.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생을 이어가고만 있는 처지에 바라는 것이 뭐가 있겠소만. 경은 3황자 전하가 성국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거라 보시오?”
챈슬러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니.”
그리고는 이내 말을 이었다.
“허나 이것 하나만큼은 장담 드릴 수 있습니다. 3황자 전하께서 군주가 되시면 힐데스하임은 성국의 이름에 걸맞은 곳으로 뒤바뀔 겁니다.”
가주는 챈슬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신에 찬 얼굴과 목소리였다.
진정한 성국의 모습.
이그네아가 꿈꾸던 이상이 갖춰질 수 있을지. 가주는 아주 오래전 지워버린 줄로만 알았던 희망이 자신의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