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84)
제84화
“과연 남다른 분이시다.”
“정녕 성국을 이끌어 갈 만한 재목이시군.”
낯부끄러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사실 이제는 어느 정도 이런 시선들에 익숙해져 버렸다.
당연한 것을 했을 뿐인데.
누구나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두려워지고, 누구나 타인의 죽음 앞에서는 경건해지는 것. 그것은 인간으로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그 당연한 것을 부정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았다.
이곳의 인간들의 뇌 구조가 다르게 태어나서 그런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니었다. 꽤 오랜 기간 살아오면서 느낀 바로는 결국 대한민국이나 이곳이나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높은 위치에 오르면 자연스레 권력욕에 취하게 되고,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도덕을 뒤로한 채로 양심을 버리며 살아간다.
힐데스하임의 성족과 귀족들이 딱 그랬다.
언제부터인진 모르겠지만 성국은 완전히 부패해 있었고, 힘없는 자들은 그 부당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안쓰럽군.”
그리고 일부 깨어있던 고위층, 이그네아 가문의 사람들은 오히려 역적이 되어 숨어 사는 처지였다.
저들이 받았던 핍박은, 분명 성국과 성족에 대한 무차별적인 적대감으로 이어졌어도 할 말이 당연한 일일 터인데.
그것 때문에 처음에 나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의 행동이 바뀌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고맙게도, 그들은 편견 없이 나라는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봐 주었다. 나보다 대단한 건 저들이었다.
“부디 전하께서 꼭 성황의 자리에 꼭 오르길 기도하겠습니다. 꼭 지금처럼 불쌍한 이들을 굽어살피소서.”
이그네아 가주는 사뭇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의 염원에는, 잘못된 성국 뿐만 아니라 이그네아의 누명을 바로잡는 것까지 담겨 있을 터.
“솔직히 관심 없었습니다.”
황위니 뭐니 하는 것들.
되면 어떠고 안 되면 어떠겠는가.
설령 형들 중 한 명이 황위에 올라 내가 부당하게 생을 마감하는 일이 있더라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전생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었기에. 내가 원하는 목표가 있었지만, 결국엔 이루지 못하고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기에. 허무한 감정들이 북받쳐 오르던 것도 분명 사실이었다. 그게 이번 생에까지 이어지면서 치열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 따위는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관심이 생기더라.”
하지만 살다 보니 그게 또 내 마음대로 안 되었다.
전생은 전생이고, 이번 생은 이번 생이다.
이번 생에서도 화나고, 즐겁고, 불편한 감정들은 똑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 나를 시샘하는 이들과 진심으로 따르는 이들이 생겨났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이루기 위해선, 나를 믿고 의지하는 이들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황위 경쟁에서 도태되면 안 되었다.
“……관심이라 하심은.”
이그네아의 가주는 애매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뜻을 알고 있음에도 황위를 탐낸다는 것이 썩 달갑게 보이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힐데스하임의 황위에 올라 모든 것을 망쳐놓은 장본인이 성황으로 있으니.
물론 나는 황위에 오르더라도 절대 그런 엿 같은 마음을 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역사서에 나오는 것처럼 성스러운 제국으로 갈아엎을 수는 없어도, 적어도 내가 바로잡을 수 있는 것만큼은 바로잡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가 굳이 이걸 이그네아의 가주에게 말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성국의 바람직한 길을 위해 누구보다 충직하게 행동했던, 이그네아도 누명을 벗고 제 위치를 되찾게 될 테지요.”
가주는 썩 충격받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겉으로 티는 내지 않고 있었지만, 그는 마음속에서 차오르는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입술을 짓씹었다.
“전하께서는 부디 타인보다 본인을 우선시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주의 옆에 서 있던 어머니가 내뱉은 말이었다.
“늘 타인을 위해 희생만 하시다가는 대의가 틀어지게 될 것입니다.”
어머니로서, 어떤 마음으로 하는 말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내가 아직 미숙한 아이로만 보일 테니, 그런 부분에 있어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그네아 때문에 전하께 피해가 가는 것은 저희 모두가 원하지 않습니다.”
이그네아의 가주 역시도 어머니와 같은 뜻을 피력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리 대답하기는 했지만 역시나 이대로 이그네아를 내버려 두는 것은 영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당장에 내가 어찌할 수도 없는 노릇.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만 했다.
* * *
혈해 주위를 맴돌던 수많은 영혼들.
위로를 받은 그들은 내게 감사의 뜻을 남겼고, 그들이 지니고 있던 힘의 일부가 내게로 전승되며 가슴 속의 성력이 더욱 견고해졌음을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눈앞에 나타났던 신의 메시지.
[고리에 새로운 의지가 곁듭니다.] [고리의 규모가 확대됩니다.] [네 번째 고리가 꿈틀거립니다.]그토록 기다려 왔던 순간이었건만, 생각보다는 무덤덤했다. 억울한 죽음에 이승을 맴돌던 영혼들. 그들이 매개체가 되어 네 번째 고리가 탄생하였으니 결코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네 번째 고리가 탄생한 건 분명 내게는 큰 희소식이었다. 사실 내가 지닌 성력의 양만 하더라도 4성급의 사제가 된 지는 꽤 오래되었으니, 더 이상 신성력으로 성국에서 무시를 받을 이유는 없었다.
첫째 형은 그렇다 치더라도 둘째 형은 나와 같은 4성이었으니까.
다만 이걸 언제 공개하느냐는 아직까지도 고민이 되는 부분이었다.
성국에서는 내가 2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알게 모르게 나를 무시하는 이들이 정말 많았고, 그건 내가 성국에서 세력을 키우는 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세 번째와 네 번째 고리를 개화시켰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성국에는 분명 한바탕 소란이 날 것이다.
이제껏 고리의 개수가 늘어난 경우는 딱 한 번밖에 없었고, 그 한 번에 해당하는 이는 아직까지도 힐데스하임 역대 최고의 군주라고 평가받는 이였다.
그러니 모든 여론을 단번에 휘어잡을 만한 비장의 카드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고민이 그리 깊으십니까?”
갑판으로 나와 고민에 잠겨 있던 중, 현자가 말을 걸어왔다.
“현자라면 알고 있을 텐데.”
내가 고민이 있을 때마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해결책을 먼저 내놓는 것이 현자 파우스트였으니까.
“저라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사람과 상황을 통해 유추하는 것뿐이지요. 그리고 단언컨대 전하는 제가 본 모든 이들 중 마음을 읽기 가장 어려운 분입니다.”
현자가 미소를 머금은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만큼 생각이 깊으시다는 것이지요. 전하께는 더 이상 제 도움이 필요 없으실 겁니다. 전하께서 고민을 하실 정도라면 명확한 답은 없을 테고, 제 해결책이 꼭 맞는 길이라 장담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또한 전하께서 선택하려는 길이 결코 틀린 길은 아닐 겁니다.”
현자의 말을 듣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내가 선택하려는 길.
나는 단순히 힐데스하임의 성황이 되는 것을 넘어, 그 이상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만약에 내가 정말 정권을 잡게 된다고 하더라도 만약 다른 이들에게 휘둘리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정말 내가 원하는 성국을 만드는 데는 지장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이들과 주의해야 하는 이들.
사람을 확실히 구분한 채로 나만의 세력을 구축해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 우선은, 내가 4성이 되었다는 걸 감추고 내게 진심으로 마음을 여는 이들을 구분하리라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때가 되면 드러내야만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게 대악마의 부활 때이든, 아니면 거룩한 혈투 때이든 간에.
“그건 아직 너무 먼 얘기긴 하지.”
나는 아무도 없는 선실로 들어가 이그네아에서 받은 광휘의 나침반을 꺼냈다.
이그네아 가주에게 설명을 들은 대로, 마력의 고리와 성력의 고리를 동시에 회전시켰다.
마력은 성력과는 완전히 다른 기운이라 아직까지는 다루는 것이 미숙했고, 하물며 성력과 함께 발현시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성력에 비해 한없이 적은 양의 마력만이 나침반으로 스며들었다.
[광휘의 나침반이 새로운 길로 인도합니다.] [마력의 경지가 부족하여 일부만이 제시됩니다.]메시지가 나타난 순간 시야가 암전되었고, 낯선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 * *
“성족은 결코 선택받은 혈족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성벽 위에 화려한 옷을 걸친 이가 소리를 치고 있었다.
“신께서는 모든 인간의 번영만을 바라고 계시며,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다.”
정확한 시기가 언제인지, 저 작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은 유추할 수 있었다.
과거 힐데스하임의 성황 중 한 명일 것이었다. 적어도 현 성황 겔리두스보다는 훨씬 됨됨이가 갖추어져 있는.
“우리 성족은 단지 그러한 신의 뜻에 따라 행동할 것이며, 신께서 주신 힘을 결코 헛되이 사용하지 않겠노라 맹세하겠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힐데스하임의 풍경이었다. 어쩌면 저 때는 신성 제국이라는 이름이 꽤 적절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따라, 신께서 주신 힘을 적절히 사용코자 성물을 각지에 나누어 보관케 하겠노라.”
일부 성물들이 지금은 찾아볼 수 없게 자취를 감춘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었다.
“헬리배드.”
성황의 부름에 따라 귀족 중 한 명이 성황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대에게 영광의 나팔을 하사하겠노라. 부디 좋은 일에 사용되기를 바란다.”
“성황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선조들의 힘을 빌어 힐데스하임이 마주하는 모든 악에 현명히 대처하겠습니다.”
헬리배드. 그는 단순히 힐데스하임의 귀족이 아니었다. 힐데스하임에 맞닿은 제후국. 지금은 사실상 제후국 중에서 가장 후순위로 밀려 버린 힘 없는 왕국이었다.
사실 과거에는 힘이 있던 왕국이라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힐데스하임에서 은폐한 사실일 가능성도 있었고.
어찌 되었든 간에.
“다음 목표지가 정해졌군.”
베이언 영지로 돌아가 영지와 성국의 정황을 살핀 후, 곧장 헬리배드로 향할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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