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86)
제86화
“위대하신 3황자 전하께서 친히 너희를 보살펴 주러 오셨으니 예를 갖추어라!”
헬리배드의 촌구석에 위치한 작은 마을.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은 바닥으로 몸을 붙이다시피 하며 힐데스하임의 3황자를 맞이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그들에게 결코 달갑지도, 익숙하지도 않았다.
어딘가 딱딱한 표정으로 주민들에게 예의를 강요하는 가신들의 모습. 평소 낮은 이들에게 몸소 행차하여 살갑게 대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리고 못 배운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유가 헬리배드의 존속을 위함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젠장. 이제껏 수천 명이 말라 죽어가도 신경 하나 안 쓰더니, 무슨 일로 예까지 왔단 말인가.”
“시끄럽네, 이 사람아. 다 들리겠어.”
“저 멀리 있는데 들리긴 뭐가 들린다고. 황자면 무슨 엘프라도 된단 말인가.”
“엘프가 멸종한 지가 언젠데.”
헬리배드는 성국의 속국임에도 수혜는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성국에서는 거머리처럼 이들에게 혈세를 받아가고만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니 이들이 힐데스하임의 황자인 데미안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쯧.”
3황자가 이들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의 눈빛이 지닌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 감정이었다.
황자로서는 못 볼 꼴을 본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주민들은 그렇게 추측하였지만 감히 3황자에게 불편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은 왕국 중에서도 도태되어버린 헬리배드의 평민일 뿐이니까. 지금껏 그래왔던 대로, 그저 묵묵히 설움을 참아야만 했다.
허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어째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인간이 모시는 신이 정말로 존재한단 말인가. 그분께선 어째서 모든 인간에게 구원받을 분배하지 않으셨는가. 특정 소수만이 신의 선택을 받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이 현실이 옳은 것인가.
그렇게. 3황자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점차 극단적으로 치닫을 때 즈음.
투둑.
조아리고 있던 이들은 생소한 감각을 느끼고 말았다. 피부 끝으로 느껴지는 촉촉하고 차가운 감각.
처음 한두 번은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먹구름이 모여들며 점차 굵어진 빗줄기가 메마른 땅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을 때.
“비, 비, 비다!”
“비가 온다. 신께서 드디어 자비를 베푸셨다!”
“물을 받아라. 그치기 전에 얼른.”
워낙 기적적인 일이라 다급하게 움직이려다, 문득 3황자가 행차해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라 그의 눈치들을 살폈다. 3황자는 이들의 행동을 허락하듯 고개를 대충 슥 끄덕였다.
그의 눈치를 살핀 이들이 재빨리 이동하여 집안에 있는 받을 거리를 모두 들고 나왔다.
믿기지가 않는 일이었지만 일단은 빠르게 행동하는 게 우선이었고, 물을 받을 대로 받은 이들은 온몸으로 비를 만끽하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신이시여. 어째서 이제야 자비를 베푸시나이까.”
“당신께서 내리시는 시련은 저희에게 너무 가혹합니다.”
단비였다. 이들에겐 지금 내리는 비가 그 어떠한 것보다도 달게 느껴졌다. 더없는 기쁨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가, 그 소름을 비가 달래주고 있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것인지 숨죽여 흐느끼는 이들의 수도 상당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는 그치기는커녕 이들을 더욱 흠뻑 적시고 있었으며, 3황자는 그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주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민. 그의 눈빛에 어린 감정은 연민의 감정이었다.
신성 제국의 황족이라 하여 편견 어린 눈으로 바라본 것이 사실이었으나, 3황자가 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예상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이들의 삶을 이해한다는 듯,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그 뜻을 전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3황자는 말 대신 행동으로 이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추적추적 빗줄기를 쏟아내는 하늘은 어느새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으며, 신묘한 후광이 3황자를 비추고 있었다.
그것이 신성 제국의 성력이라는 것도, 그 덕분에 이들의 마음 깊이 새겨진 상처가 위로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기적. 3황자가 헬리배드에 기적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부정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3황자는 헬리배드 왕국의 지리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결코 그가 했던 행동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주민들이 활력을 되찾고 하루하루를 생기 있게 보내고 있습니다.”
신에게 버림받은 것이라 확신하며 의욕을 잃어버린 헬리배드 왕국민들은, 3황자가 선보인 기적으로 인하여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분명 긍정적인 일이군.”
헬리배드의 국왕은 더없이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3황자는 유독 가뭄이 심한 지역 몇 곳에서 신성력을 통해 비를 내렸고,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이들을 손수 치료해 주기까지 했다. 그것이 가히 성자에 가까운 모습이라는 것은 헬리배드의 국왕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어쩌면 저희가 기다려오던 구원자이실지도…….”
“속단하기는 이르다.”
헬리배드의 국왕은 단순히 그런 것만으로 3황자를 판단할 수는 없었다.
“분명 전하께서 자비를 베푸신 것은 맞으나 헬리배드의 비밀에 대해 알고, 성물을 노리고 오신 거라면.”
결코 헬리배드 왕국이 보유한 성물을 내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구원자의 모습은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까.
“지금 황자 전하께서는 어디 계신가.”
“저희 쪽 사람을 붙여드린다고 하였으나 극구 거절하시는 바람에 그리하지 못하였습니다. 헬리배드 왕국을 자유로이 구경하다 궁으로 돌아오신다 하였으니 향후 행방을 지켜보는 것이 맞다 사료됩니다.”
“……그렇군.”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헬리배드의 국왕도 3황자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허나 누군가는 3황자를 대해에 버금가는 아량을 지닌 성자라 칭하였으며, 누군가는 열등감에 시달린 패배자라 일컬었다.
본디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었으나, 그런 식으로 평이 극과 극으로 나뉘는 경우는 또 드물었기에 3황자라는 인물에 대해 판단하기 위해선 더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다른 것보다도.
“어째서지.”
갑작스레 3황자가 헬리배드 왕국에 찾아온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처음엔 3황자가 헬리배드 왕국을 감시하러 왔거나, 혹은 성물의 비밀을 파헤치러 온 것이라 여겼건만. 아직까지는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자유로이 헬리배드 왕국 내를 방랑하고 있었다.
“속을 전혀 모르겠군.”
어린 나이임에도 전혀 속내를 파헤칠 수 없을 정도로 아리송한 부분이 있었다.
허나 헬리배드의 국왕은 그런 것에 계속 신경을 쓰고 있을 정도로 한가한 인물이 아니었다.
“곧바로 성벽 지원에 나설 터이니 병력을 모아라.”
3황자가 온다고 하여 궁에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헬리배드의 국왕은 쉴 새 없이 몬스터가 몰려드는 국왕에서 몸소 검을 들고 싸우는 용맹한 군주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몬스터와 싸우는 병사들을 생각하면 숨을 돌릴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국왕이 성벽으로 도착했을 땐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 그곳에 있었다.
“……황자 전하?”
3황자. 그가 직접 부상 당한 이들을 치유하며 성벽의 수비를 돕고 있었다.
흠.
아무래도 이것조차 연기를 하고 있는 거라면 속아 넘어간다고 하여도 국왕에게 따지려 드는 이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 * *
부쩍 몬스터와 마물의 수가 늘어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국왕이 이렇게 직접 나설 필요 없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몬스터의 수가 급증하고 있었다. 그건 비단 헬리배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륙 전역에서 악의 무리들이 들끓고 있었고, 그게 신화만 전해지던 악의 부활과 연관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었고 훗날을 위해 세력을 모아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당장 오늘 내일이 위태로운 국가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헬리배드 왕국이었다.
“병력의 수가 많이 모자라 보이는군요.”
그걸 알고 묻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인지. 3황자가 혼잣말처럼 헬리배드의 국왕 앞에서 중얼거렸다.
“최선을 다하고는 있으나…… 아무래도 군주의 자질이 모자란 탓이겠지요.”
국왕은 늘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해 왔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마물들의 습격에 헬리배드 왕국은 무너져 버릴 테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외교 관계는 끊어진 지 오래라 지원 병력을 요청할 데도 없었으며, 왕국 내에서 병력을 더욱 차출할 수도 없었다. 당장 오늘 먹을 것도 없어 굶어 죽어가는 이들이 다수인데, 군대를 확장하는 건 그에겐 꿈 같은 소리였다.
“군주의 자질이 모자라다…… 내가 많이 들은 이야기로군요.”
국왕은 3황자의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하를 뵌 지 얼마 되지는 않으나 그 짧은 시간 보여주신 모습만으로도 전하께서는 충분히 좋은 분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국왕께서 말하는 군주의 자질에 해당하는 건가요?”
“그게 전부라고는 할 수 없으나 분명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이지요. 저는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면 국왕께서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황자는 헬리배드의 국왕도 인덕이 훌륭한 이라고 말하고 있었으나 국왕은 동의할 수가 없었다.
“많은 것이 부족합니다.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일에도 얼굴을 붉히기 일쑤요, 스스로를 희생하여 불쌍한 이들을 구원할 용기조차 없습니다. 그런 주제에 현명하게 일국을 이끌어 나갈 지혜조차 부족하여 국민들만 피해를 입고 있는 형국이지요.”
“글쎄요.”
3황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헬리배드가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으니 국왕의 문제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일국의 사정에 따라 국왕에게 요구되는 자질이 달라진다고 한다면.”
3황자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 역시도 힐데스하임에서는 황자 취급을 받지 못하는 수치스러운 존재일 뿐이죠.”
그것이 무얼 말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신성 제국의 황족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신성력이었고, 3황자는 미천한 양의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허나…….
국왕이 3황자에게 더 무어라 하기 전에 3황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참 신기한 게, 제가 가는 곳마다 불행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만 같습니다.”
3황자가 바라보고 있는 성벽 너머, 그곳에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마수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신께서 의도하신 바일 겁니다. 시련이 있어야 전하께서 더욱 빛을 발하실 수 있으니.”
그렇게 말한 국왕은 검을 뽑아 들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