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87)
제87화
“그어어어억!”
마수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어 성벽을 타고 올랐다.
수많은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음에도 단단한 마수의 근육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거의 성벽 끝까지 올라온 마수들을 검격으로 쳐내며 고꾸라뜨리기도 했지만, 숫자가 숫자인지라 모든 개체의 접근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채앵!
결국 성벽 위로 올라온 마수는 검을 쥔 병사들이 상대하고 있었지만 결코 순조롭지는 않았다.
부웅!
마수가 흉흉한 팔을 휘두를 때마다 얻어맞은 병사들의 철제 갑옷이 구겨지며 멀리까지 나가떨어졌다.
마수 하나에 병사 다섯이 붙어도 제대로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성자께서 당신을 어루만집니다.] [다시금 대항할 의지가 불타오릅니다.]3황자의 성력은 이들의 신체뿐만 아니라 투지까지도 온전히 회복시키며 전장의 상황이 기우는 것을 막아내고 있었다.
하루에 수십 명의 병사들이 죽어 나가던 것과 비교하면 훨씬 수월해진 것은 맞으나,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마수들의 힘이 훨씬 더 강력하게만 느껴졌다. 모두가 그렇게 느끼고 있었으니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어째서지.”
“크윽. 원래 이렇게 아팠었나.”
훨씬 더 빠르고 강력한 마수들의 움직임, 일반 병사들은 눈으로 따라가기조차 버거울 정도였다.
그리고 그 원인을 찾아낸 건 다름 아닌 3황자였다.
“태양은 빛의 근원이요, 빛은 악에 대항하는 힘이니…….”
어둠에 물든 빛이 떠오르는 월식. 마물들이 비정상적으로 강력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었고, 태양이 떠 있는 낮에 마물들의 힘이 약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늘에 먹구름이 떠 있었다.
“나 때문이군.”
헬리배드는 유난히도 뜨거운 태양을 마주하는 곳이었고, 그나마 열세인 병력으로도 마물들을 상대해 올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몰려든 구름으로 인해 태양의 힘이 한층 약해지고 있었으니 상대적으로 마물의 힘이 강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 말하지 마십시오.”
막 마수 하나의 목을 베어버린 헬리배드의 국왕은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 베푸신 은총 때문이라 하여도 이는 더 나은 헬리배드를 위한 시련일 뿐입니다. 모두가 전하의 덕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국왕은 진심이었고, 헬리배드의 모두가 같은 마음일 터였다. 혹여나 마물의 침공을 막지 못하여 헬리배드가 멸망한다 하여도 가뭄으로 시달리며 매일 매일 고통의 굴레 속에 살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무엇보다 3황자는 헬리배드에 희망을 선사하지 않았는가.
마물의 침공은 노력의 여하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끝없는 가뭄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었기에. 그래서 모두가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검을 들고 싸우는 것이었다.
콰앙!
국왕은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모두가 힘을 내어 싸우고 있는 형국에, 그가 뒷걸음질을 친다면 그건 곧 헬리배드 전체가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마수들의 발톱과, 병사들의 검이 부딪히며 소름 돋을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댔다.
“크어어어어!”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헬리배드의 병력이 점차 밀려가고 있었다.
3황자의 성력이 사기를 드높이고는 있었지만, 정신력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뛰어난 병력 양성에 힘을 쏟을 수 없었던 탓에 헬리배드의 병력은 무력이 그다지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커헉!”
몇몇 병사들은 마수의 발톱에 갑옷이 찍힌 뒤 피를 토해냈다. 가히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평범한 인간들로서는 순수한 무력으로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카앙!
헬리배드의 국왕만은 유일하게 마수 하나를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수십 합의 검격 끝에 마수의 목숨을 끊어놓고는 또 다른 마수를 상대하고 있었다.
허나 그 역시 인간인지라 체력이 뒤따라주지 못했다. 점점 검을 쥔 손에 힘이 빠지고 있었고 폐가 찢어질 것처럼 숨이 가빠왔다.
“……신이시여.”
국왕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스스로의 손으로 헬리배드를 지켜내고자. 선조들이 남긴 위대한 국가를 끝까지 존속시키고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왔건만. 그 누구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로 헬리배드를 수호하리라 끝없이 정진해 왔건만.
결국 궁지에 몰리니 다른 이의 손을 빌리고자 하는 본인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국왕이 신을 찾는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3황자의 존재가 그것이었다.
헬리배드가 진정한 위기에 닥쳤을 때, 신의 대리인이 나타나 헬리배드를 수호해 낼 것이라는 과거의 설화.
한낱 뜬소문일 지도 모르지만 헬리배드에서는 보물처럼 간직해 온 이야기였다.
콰앙!
다른 생각에 잠겨 집중을 못한 탓일까. 아니,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한계에 다다라 있던 탓일까.
거대한 마수의 공격에, 검을 쥐고 있던 국왕의 팔이 그대로 꺾여버렸다.
“크윽.”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뒤따랐지만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쓸 요량이 없었다. 곧바로 회수된 마수의 도끼가 다시 한번 날아오고 있었다.
‘움직여!’
어느새 날카로운 발톱이 국왕의 눈앞까지 다가왔지만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뼈가 제대로 골절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결국 자질이 부족했던 게 맞았나 봅니다.”
그리 중얼거린 국왕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자 눈을 감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에게 아무런 충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
의아함을 느낀 헬리배드의 국왕이 눈을 뜨자, 자신의 앞에서 성력으로 보호막을 만들어 낸 3황자가 보였다.
“진짜 답답하네. 아니라니까.”
3황자는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 * *
상황은 좋지 않았다.
마수 역시도 마물의 일종인지라 성력에 취약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애초에 내가 추구해 온 성력은 마물을 상대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지 않았다. 특히나 이런 수많은 마물들을 물리치는 데는 부적절했다.
물론 정 안되면 다른 방법이 있기는 했지만, 정말 최후의 수단으로 쓰기 위해 아껴두어야만 했다.
성력으로 만들어 낸 보호막도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고작 마수의 공격 몇 번에 가슴팍에 고스란히 통증이 느껴지며 한계에 임박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헬리배드의 국왕이 검을 들어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보였다.
“안 그러는 게 좋을걸요.”
진지한 충고였다. 아까의 공격을 막아내다가 그의 팔이 골절된 듯 보였고, 그 상태로는 팔을 움직이는 것조차 엄청난 고통이 뒤따를 것이었다.
“크윽.”
역시나 국왕은 검을 떨어뜨리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이내 내게 부탁을 해 왔다.
“실례지만 치료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할 수 있는 최대한을 쥐어 짜내고 싶습니다. 그래야 후회가 없을…….”
“지금 움직이면 더 후회할 텐데요.”
뼈에 문제가 생기면 재활을 위해 수술을 하고 나서도 한참이나 조심해야만 했다. 만약 그런 상태에서 무리를 했다가는 평생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걸 알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당장 국왕을 치료하는 건 무리였다. 뒤틀려버린 뼈를 성력으로 재생시킨다면 뼈가 이상하게 붙어버려 오히려 일상생활조차 힘들어질 터.
국왕의 팔을 치료하는 건 이 상황을 넘긴 뒤 외과적인 시술을 통해서 이루어져야만 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어도,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나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
성력을 쥐어 짜내어 병사들에게 활력과 용기를 불어넣는다고 하더라도, 점점 더 밀리고 있는 추세였으며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왕국 내부까지 마수들이 침공하게 될 것이었다.
콰앙! 콰앙!
마수들은 크게 펼쳐진 내 수호 마법을 발톱으로 강하게 내리찍었다.
울렁.
심장의 고리가 더욱 거세게 공명하며 내 온몸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희망이 없습니다!”
국왕이 거의 소리치다시피 내게 말했다.
“이게…… 정말로 신께서 저희에게 내리신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허나 황자 전하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구태여 괜한 희생을 하려 하지 마십시오.”
희생이라.
미안하지만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헬리배드 왕국에 온 것부터가 아주 개인적인 내 욕심에 의한 것이었고, 헬리배드를 지키려 하는 이유도 내가 찾아야 하는 성물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지금은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내가 괜한 희생양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추잡한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그래도 내가 전혀 가능성 없는 일에 베팅을 하는 건 아니었다.
고리에 연결된 희망의 끈은 점점 더 강하게 박동하고 있었으니 조금만 버티면 될 일이었다.
콰장창!
실드가 버티지 못한 채로 마수의 공격에 의해 박살이 났다. 그걸 본 병사들의 눈에 절망감이 아른거렸다.
“아, 안 돼!”
“아아…… 이렇게 끝난단 말인가!”
그런 이들에게 남은 성력을 쥐어 짜내어 다시금 실낱같은 용기를 불러일으켰고.
“조금만 더 버텨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헬리배드의 병사들은 훌륭한 군주의 아래에서 양병된 덕인지 끝까지 싸우는 불굴의 의지를 지니고 있었고, 죽음 앞에서도 꽤나 겸허했다. 단지 헬리배드의 멸망을 걱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코 헛된 죽음은 아니게 하겠다, 그따위 말을 지껄이지는 못했으나 그들은 숨이 멎는 순간까지도 검을 휘둘렀고.
상당수를 쓰러뜨린 마수가 나와 국왕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전하!”
“이놈들이 감히!”
병사들이 다급하게 우리를 지키기 위해 있는 힘껏 달려들었고, 마수는 그런 병사들을 가볍게 날려버리려 했으나.
뿌우우우우우.
대기를 가르는 청명한 나팔 소리. 그곳이 들려온 쪽으로 모두의 시선이 쏠려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윽고 트루드의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