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92)
제91화
마기였다. 환상을 보면서도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클레이디크에서도 상대한 적 있었고, 얼마 전 헬리배드에서도 상대한 적이 있었던 마물들이 사방에서 피어올랐다. 그 원흉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고, 그건 황제의 무리 역시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제, 젠장! 황제 폐하를 엄호하라!”
단순히 전장에서 볼 수 있는 마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위용을 뽐내는 마귀들이었다. 헬리배드에서 보았던 마수의 왕 정도의 강함은 아니었으나, 저 정도라면 성력이 없이는 상대하기 벅찰 터였다.
발탄에서도 가장 강력한 군대인 만큼 분전하기는 했으나 마귀의 양이 꽤나 많았다. 게다가.
“크하하학!”
마귀에게 감염된 일부 병력은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로 오히려 아군을 베어버려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폐하! 도망치십시오.”
뒤늦게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감지한 발탄 제국의 황제는 서둘러 달아나려고 했으나.
「우리를 깨우고 어디를 가려는 것이냐.」
「그대 덕분에 세상에서 깨어날 수 있었으니 그대에게 진정한 안식을 선물하지.」
마귀들에게서 뿜어져 나온 새빨간 마기가 황제를 덮쳤다.
“무슨 일이오?”
딱 거기까지였다. 눈앞에서 보이던 미래의 환상은 거기서 끝이었고 내 앞에는 방금까지 대화를 하던 황태자가 서 있었다.
애매하게 끊긴 느낌이라 찝찝함을 내버릴 수가 없었다. 발칸의 황제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들로서는 감당하기 꽤나 힘든 일일 거라는 건 장담할 수 있었다.
“안색이 좋지 않은데.”
방금 본 광경이 워낙에 끔찍했던지라, 그게 내 표정으로 드러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솔직히 말하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발칸 제국 황제의 민간인 학살. 그게 결코 올바른 일은 아니지만, 내가 개입하기도 쉽지 않고. 후폭풍이 어떻게 날아올지도 모른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을 보았을 때, 결국엔 권선징악으로 발칸 제국의 황제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아는 황태자는 좋은 사람이니, 이 일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고 내가 알려준다면 그가 미래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걸 그에게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민간인 학살의 피해를 막는 대신 황제의 죽음도 피하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다만, 문제는 이 미래가 어째서 내게 보였느냐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특정 권능들이 스스로 발현되었을 때는 분명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개입해서 바꿀 수 있는 미래들이었고, 그렇게 되었을 때 결국에는 내게 이득이 되었다.
지난 경험들에 비추어 보건대 이번 역시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괜히 운명의 권능이 내게 발칸 제국의 미래에 대해 보여준 것이 아닐 터였다.
“혹시 제가 황제 폐하를 직접 알현할 수 있겠습니까?”
내 물음에 황태자는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무엇 때문에 그러시오? 그대가 말한 것들에 대해서는 내가 잘 전달하겠소. 아, 그대가 폐하를 뵙는 것이 못마땅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오나…….”
황태자가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폐하께서 언제 돌아오실지도 모르니 그대가 얼마나 기다려야 할 지도 모르겠고, 또 폐하께서 갑작스레 그대를 본다면 앞뒤 사정을 가리지 않고 편견을 뒤집어쓴 채 대할지도 모르오.”
황태자가 걱정하는 부분이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나 역시도 웬만하면 발칸 제국의 황제와 직접 마주하는 일은 피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폐하께서 결코 불쾌하게 느끼지 않도록 예를 갖추겠습니다. 제가 황제 폐하가 계신 곳으로 직접 찾아뵙고 싶습니다. 안내해 줄 길잡이 한 명만 붙여주십시오.”
결국 황태자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내 입으로 본 제국의 폐하이자 나를 낳아 주신 아버지를 폄훼하는 것 같아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그대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니오. 아마도 그대가 독대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분일 게요.”
“괜찮습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 역시 그런 분 밑에서 자라왔습니다.”
신성 제국 힐데스하임의 성황. 그는 발칸 제국의 황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비록 성황이 처음 내게 보였던 태도와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으나, 나는 그의 과거를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잊어서는 안 되었다.
“발칸에서 힐데스하임을 어떻게 보시는지는 잘 모르나, 현 힐데스하임은 신성 제국이라는 이름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곳이요, 성황도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지금이야 본인이 두 다리 뻗고 자유자재로 주무를 수 있는 신성 제국의 토대를 닦았으니 악행이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더없이 추악했다.
그리고 이 세계의 신이 어째서 그런 성황을 내버려 둔 것인지, 아니면 간섭을 할 수 없었던 것인지는 몰라도 성황에 대한 심판을 신이 내리지 않는다면 내가 죗값을 치르게 해줄 셈이었다. 물론 그러려면 내가 성황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황태자는 내 거침없는 발언에 조금은 놀란 듯 보였으나 그게 결코 반감의 감정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황태자께서도 제게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던 것들이 많으니 저도 솔직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본 미래에 대해 황태자에게 말했다. 성력을 통해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인지, 정말로 내가 본 것들이 미래에 일어날 일인지에 대해서 그가 믿을지는 의문이었지만.
“……그게 정말이오?”
황태자는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다행히도 내 말을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대가 솔직하게 말해주었으니 나도 어느 정도는 털어놓을 필요가 있겠지. 그대를 보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막막했소.”
황태자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우리에게 힐데스하임은 타락한 위선자들일 뿐이고 발칸 제국은 누구보다 찬란한 대제국이오. 그렇게 주입을 받아왔고, 다른 생각은 할 수조차 없었소.”
그건 힐데스하임이나 발칸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허나 황태자로서, 발칸 제국 역시도 결코 깨끗한 곳이 아님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소.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황태자임에도 권력 앞에 굴복하여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걸 송두리째 뒤엎을 힘이 없다는 것이었소. 늘 막막할 뿐이었지. 나는 겁쟁이였소.”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만으로도 황태자께서는 이미 훌륭하신 분입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만약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니라면. 새하얀 머릿속에 이 세계의 사상이 주입되었다면. 나는 황태자처럼 이것들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을까?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니 황태자가 더욱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대가 없었더라면 나는 내가 잘못된 것인지 의심을 품었을 게요. 그대 덕분에 그게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고, 용기를 얻을 수 있었소. 정말 고맙소.”
황태자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 역시도 결코 모른 척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겠지. 권력을 위해 죄 없는 이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렇게 말한 황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 폐하께서 지금 어디 계신지 곧바로 알아보겠소.”
* * *
“하겐 자작령이라…….”
사람을 시켜 황제가 향한 곳의 지명을 들은 황태자는 더욱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아는 곳입니까?”
자작이나 남작의 수는 꽤 많은 만큼 사실 일일이 알기가 힘들었지만 황태자의 반응을 보니 어딘지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내가 황자일 때 숨어 지내던 곳이오.”
발칸 제국의 황태자가 숨어서 지내다니, 듣지 않아도 꽤나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떠올리기도 싫은 과거일 터였다.
“암살 공작이 있었소. 아마도 내 형제들 중 한 명 짓이었겠지. 힐데스하임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 할 일일 테지만 이곳에서는 아주 드문 일만은 아니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 나가려 했다. 힐데스하임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
내가 옹알이조차 하지 못할 때 독약으로 암살하려던 다른 황비들의 일이 떠올랐다. 어찌 들으면 들을수록, 발칸 제국과 힐데스하임 성국은 꼭 닮아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때, 하겐 자작께서는 나를 친아비처럼 돌보아 주셨소. 그분께서는 당연히 나를 어려워하셨지만 나는 그를 누구보다 존경했고. 그런 하겐 자작이 반란을 꾸민다는 건 결코 있을 수는 없는 일이오.”
황태자가 자신의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내가 본 미래가 어느 정도 들어맞아 가는 것 같자 불안한 듯한 모습이었다.
“만약 제가 본 것들이 정말 일어나게 될 일이라면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황태자. 그가 내 기준에서 꽤 올바른 사람이기는 하나,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때때로 굴복했을 터였다. 그게 아니라면 황위의 후계자로 오르는 건 결코 쉽지 않았을 테니.
“……솔직히 말하면 모르는 척했을 수도 있겠소.”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때때로는 대의를 위해 굴복하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라 여겼고, 실제로 그래오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전부 변명이었을 뿐이오. 그렇게 이룩한 대의가 무슨 의미가 있겠고, 대의를 위한 다른 길도 있겠지.”
그가 말하는 대의는, 황위에 올라 모든 것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추측할 뿐이었다.
“어쩌면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소. 나조차도 감당하기 버거운 일처럼 보이니. 헌데도 함께 가시겠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발칸과 힐데스하임의 관계가 좋지 않다고 한들, 공식적으로 발칸에 방문한 성국의 황자를 발칸 제국의 황제가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가는 정말로 두 제국 간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테니.
그리고 나는 운명의 권능이 어째서 그런 미래를 내게 비추어 주었는지 직접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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