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94)
제94화
헤르네가 깨어난 것은 반나절쯤 뒤의 일이었다.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서 그가 깔끔하게 정리를 해주었다.
“황제 폐하의 군대가 자작령의 외곽 마을을 완전히 쑥대밭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폐하께서 마지막으로 향하는 곳은 자작령의 중앙, 하겐 경이 계신 곳일 테지요.”
황태자로서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음에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어찌 목표가 하겐 경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혹 그 이유라도 알고 있는가?”
헤르네는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모릅니다만, 아마도 그 이유가 없을 테니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요.”
“……이유가 없다고?”
“황제 폐하께는 관례 행사 같은 것이지요. 황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본보기로 선택한 것이 하필이면 하겐 자작령일 뿐이었을 겁니다.”
내가 보기에도 헤르네는 너무도 자연스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 부분이 조금 의아하기는 했다.
“……혹 전에도 그러신 적이 있던가?”
헤르네는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로 황태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가 기사를 관두겠다고 말씀드린 날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그대와 같이 마음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기사가 떠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도 생각이 참 많았으니까. 나도 알고 있네. 나는 많은 것이 부족하지. 앞에서만 위선적인 척할 뿐,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을 보고도 못 본 체 넘겨야만 할 때가 많았지.”
“결코 그런 것 때문에 그만뒀던 것이 아닙니다.”
헤르네의 목소리는 더없이 단호했다.
“그런 것으로 황태자 전하를 원망한 적 없습니다. 전하께선 현명하신 분이고, 늘 올바른 행동을 하고 계신 거라 믿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장차 황위에 올라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겠지만.”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저는 그럴 수가 없는 운명입니다. 제가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그날, 저는 명을 받고 황제 폐하의 군대에 합류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졌었지요.”
“……설마.”
“명목은 반란군 진압이었습니다. 정말로 그런 줄로만 알았고. 하지만 그때 제가 베었던 것은 선량한 주민들이었습니다. 저는 단순히 황실의 권력 유지를 위해 그런 추악한 짓에 가담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황태자의 얼굴에는 그간 찾아보기 힘들었던 노기가 어렸다. 그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거세게 내리쳤다.
“하하. 그로부터 몇 달 동안은 검도 제대로 쥐지 못했습니다. 허나 생각해보니, 그 일을 속죄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목숨을 구하는 것이 저로서는 최선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게 헤르네가 변방의 병사로 지원을 하게 된 계기였던 것이었다.
“결코 자책하지 말게. 그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리고 그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말한 황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하고 싶네. 길 안내를 도와주겠나?”
잠시 말없이 황태자를 바라만 보던 헤르네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이것이 정말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겠군요.”
일이 점점 더 복잡해져만 가고 있었다.
* * *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선두에서 달려가고 있는 황태자와 헤르네를 바라보며 트루드에게 물었다.
“무얼 말씀이십니까?”
“끔찍한 일이지만 네게도 저 기사에게 벌어졌던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할 거지?”
단순히 궁금했다. 트루드 역시 헤르네와 마찬가지로 근본은 기사였고 만약 그녀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아마 그녀의 성격상 못 참고 다 뒤집어 엎어버렸을 것 같은데.
“굳이 가정할 필요가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어?”
“제게는 전하가 있지 않습니까. 전하가 있는 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허.”
할 말을 잃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더 묻지 않기로 했다.
“확실한 것은 저 역시도 많은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전하께서 대의를 이루시도록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습니다.”
확실히 트루드는 애늙은이 같은 면이 있었다. 전생의 내 딸이 딱 이랬었는데.
그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그 아이들에게는 무책임하게 세상을 떠나 정말 미안한 마음이지만, 떠올릴수록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려왔다.
“하.”
말을 타고 달리다 보니 작은 마을에 이르렀다. 한발 늦은 것인지 처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마을 전체는 잿더미가 되어 있었고, 타다 남은 시체 흔적들도 찾아볼 수 있었다.
“우웩. 웨에엑.”
비위가 좋지 못한 병사들은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내뱉기까지 했다. 트루드 역시도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무언가를 참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전하, 정말 괜찮으십니까?”
“어.”
그녀에겐 전장의 경험이 많지 않은 내가 이런 것을 보고도 무덤덤한 것이 의아하겠지만 내겐 당연한 일이었다. 시체는 의대생 시절부터 접해왔고, 그 이후로 정식으로 의사가 되면서 훨씬 더 많은 주검들을 다뤄야만 했다.
비록 참담한 마음은 어찌할 수 없을지언정, 비위가 견디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만요.”
이마를 짚고 있는 황태자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고리를 회전시켜 마을 주변을 성력으로 뒤덮었다.
“부디 가엾은 영혼들에게 심심한 위로가 되기를. 평생토록 그대들의 통한을 잊지 않고 새기겠습니다.”
[망자로서 떠도는 억울한 영혼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합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수십의 영혼이 동시에 내 귀에 대고 속삭여왔다.
이건 참 좋았다. 의사로서 어쩔 수 없이 생명을 떠나보내야만 했을 때, 진심을 담아 묵념을 하기는 했지만 그게 그들에게 정말로 위로가 되었을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지만 이곳에서는 달랐다.
[원혼들이 당신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그들의 의지가 당신에게 힘을 보탭니다.]영혼들이 사라지며, 운명의 권능을 사용한 뒤로 비어 있던 고리 속이 일순간에 한계치를 초과하고 흘러넘쳤다.
영혼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모두가 계속해서 묵념을 올리고 있었다. 황태자는 고개를 숙인 채로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그를 못 본 척하기 위해 한참이나 계속해서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안하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눈이 벌게진 황태자가 애써 웃는 얼굴로 말 위에 올라탔다.
“최대한 피해를 줄여야겠지.”
* * *
그렇게 다시 자작령의 중앙을 향해 달려 나갔고, 중간 중간에 폐허가 된 마을들을 계속해서 들러 위로를 건넸다.
마을의 불씨는 점점 더 꺼지지 않은 채로 크게 남아있었고, 그게 점점 더 황제의 군대와 가까워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일이 너무 커지는 것 같소. 그대가 끼기에는 너무 위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마무리는 내가 지을 테니 돌아가서 대기하고 있는 게 어떻겠소?”
황태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신께서 저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데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나도, 이런 상황 속에서 발칸 제국의 황제를 만나게 된다면 일이 수월하게 풀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분명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 테니까.
“전하.”
계속해서 말을 타고 달리는 와중 트루드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기운이 계속 강해지고 있습니다.”
“기운?”
잠시 되물었다가 이내 그녀가 말한 것이 무엇인지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지 않도록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녀가 느낄 수 있는 기운이라면, 그리고 이토록 조심스러운 얼굴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그녀의 가슴 속에 있는 대악마 루시퍼의 기운. 그것이 마물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힐데스하임에서 데려온 기사는 트루드를 포함해 10명 남짓이었다. 내가 본 미래에서 발칸 제국 병력은 마물을 상대로 아무 것도 하지 못했고, 그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발칸 제국 황제와의 일은 뒤로하고서라도 말이다.
그러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성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물을 마주하는 건 언제나 극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점점 더 말을 타고 달려 나가자 이제는 굳이 트루드가 전해주지 않더라도, 피부로 불쾌한 기운들이 스멀스멀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슴 속의 고리도 주체할 수 없이 강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다그닥, 다그닥.
다른 이들도 불길함을 감지한 것인지 말이 없어졌고, 침묵 속에서 말발굽 소리만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저, 저기 보입니다!”
그때 누군가가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중무장을 한 무리가 저 멀리 보였다. 보나 마나 발칸 황제의 병력이었다.
황태자는 주체를 하지 못하고 혼자 고삐를 잡은 채 달려 나갔다. 그걸 본 이들은 모두 속도를 높이며 빠르게 황태자의 뒤에 따라붙으려 했다.
[수많은 원망이 쌓여 혼돈의 기운이 가득 찹니다.] [혼돈이 균열을 만들어 냅니다.]난데없이 나타난 메시지. 그런데 그 메시지가 나타나자마자 황태자의 발아래에 새까만 원이 생겨났다. 그리곤 그 원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황태자를 덮쳤다.
“전하!”
헤르네가 소리치며 가장 먼저 달려갔다. 하지만 그가 황태자의 앞에 다다르자 황태자를 덮쳤던 마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렸다.
“괘, 괜찮으십니까?”
“저, 전하?”
황태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잠시 후 뒤를 돌았을 때, 그의 눈동자가 사라져 있었다. 트루드가 감염되었을 때와 비슷한 증상이었다.
트루드는 자신이 겪었던 일이라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기에 반사적으로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나는 그런 그녀를 저지한 채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황태자 전하.”
그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특이하게도 그에게서는 적대감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황태자는 뒤를 돌더니 황제의 병력이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뛰어들었다. 인간이 낼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전하!”
위험을 감지한 이들이 빠르게 말에 올라 황태자를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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