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95)
제95화
황태자가 헤르네에게 모든 것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는다고 노력했지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자신의 아버지이자 발칸 제국의 현 황제라는 사람이, 결코 올바른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홀로 마음고생을 했을 헤르네에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그런 줄도 모르고 헤르네가 떠난다고 했을 때 면박을 줬던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리고 제발 이번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하겐 자작이 정말로 알고 보니 역모를 꾸미고 있었거나, 아니면 황제가 오해를 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 믿고 싶었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마을 하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보며 통탄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자작이 반란을 꾸몄다고 한들, 죄 없는 민간인들까지 학살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가슴이 답답했다. 도무지 표현을 할 수 없는 감정들이 눈물로 쏟아져 나왔다.
[성자가 상처 입은 이들에게 위로를 건넵니다.]그나마 3황자가 억울하게 죽어 버린 이들에게 위로를 건네줄 수 있었고, 황태자는 그런 그들을 위해 묵념을 올렸다.
마을 한두 개에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다. 하겐 자작령 내에서 거쳐 가는 모든 마을이 하나 같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돌이킬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정말로, 황제는 하겐 자작을 끝장내려는 속셈인 듯 보였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꾹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주먹을 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렸을 적부터 황제에게 받았던 핍박, 황비가 황제에게 받았던 경멸. 그런 것들조차 황태자는 모두 최종적으로는 본인을 위한 것이라고 믿어 넘겼다. 그래야만 그 시절을 버틸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건 도무지 합리화해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쌓이고 쌓여 왔던 황제에 대한 감정들. 그리고 3황자, 헤르네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이 그렇게 합리화 해 왔던 것들에 스스로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결코 넘어갈 수 없었다. 분노가 온몸으로 차올랐다. 그리고 그런 그의 감정을 더욱 격앙시킨 것은 그를 덮친 새까만 기운이었다.
그게 마물들이 지닌 고유의 힘과 닮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황태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힘이 황태자의 감정을 그렇게 조절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황제를 향해 뛰어가는 황태자를 헤르네가 가로막았다.
“비켜.”
지금 감정 같아서는 헤르네조차도 검으로 베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황태자에게 남아있는 최소한의 정신력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꼴이었다.
“전하. 다시 한번 생각하고 신중하게 생각하십시오. 전하의 뜻을 가로막을 생각은 없으나, 지금 전하께서는 너무 흥분하시어…….”
콰앙!
황태자가 헤르네의 복부를 걷어찼다. 철갑을 입고 있었음에도, 황태자의 강철 부츠에 얻어맞은 헤르네는 저만치 날아 떨어졌다.
성큼, 성큼.
다시금 앞으로 걸어 나가려 할 때, 이번에 그를 가로막은 것은 3황자였다.
“비키시오.”
3황자라고 그를 가로막을 수는 없었으나.
[성자께서 당신을 어루만집니다.] [당신의 감정에 깊은 공감과 위로를 건넵니다.] [마기에 잠식된 영혼이 일부 정화됩니다.]3황자가 내뿜은 성력 덕분인지, 황태자는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격앙되어 있던 감정은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지금은 적어도 황태자 본인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고맙소.”
황자에게 고개를 숙인 황태자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3황자는 이제 더 이상 황태자를 가로막지 않았다.
“전하의 의지에 따른 행동이니 결코 후회는 없으시길 바라겠습니다.”
“후회는 지금껏 충분히 했소. 더 큰 후회가 남는 일은 하지 않겠소.”
황태자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멈춰라!”
그리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소리쳤다.
황태자를 발견한 발칸의 병사들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주변에서는 말 그대로 대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잔혹한 현장을 보자 또다시 감정이 쉴 새 없이 날뛰고 있었다.
황태자는 황제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황제의 앞에는, 하겐 자작이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네가 무슨 일이냐?”
황제가 황태자를 발견하고는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반란을 일으켰다는 자가 하겐 자작입니까?”
황태자의 물음에 꿇고 있던 하겐이 황태자를 올려다보았다.
“저, 전하. 결코 아닙니다. 부끄러운 말씀이오나 이곳은 병사가 부족하여 치안 유지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헌데 어찌 반란군을 모은다는 말씀이십니까?”
“닥쳐라!”
황제가 소리쳤다.
“지금이라도 바른대로 말한다면 더한 후폭풍은 없을 것이다.”
“억울합니다!”
짜악!
황제가 하겐 자작의 뺨을 후려쳤다. 그걸 본 황태자가 움찔했다.
순간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의 몸에 남아 있는 마기 때문인지 감정의 기복이 훨씬 더 강렬해진 듯한 기분이었다.
“멍청한 놈.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맞다고 말하는 것이 그리 힘들던가?”
그 말에서 황태자는 확신할 수 있었다. 헤르네의 말대로 황제에게는 본보기가 필요할 뿐이었고, 그게 하겐 자작이었을 뿐이다.
황제는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네가 못마땅하게 생각할 것 같아 감추려 했으나, 네가 황제가 된다면 알게 될 것이다. 어째서 이런 짓을 했는지. 이게 모두 너의 황위를 위한 일이다. 아비 된 자로서 자식을 생각해서 하는 일이지.”
아비라. 누가 자신의 아버지란 말인가.
황제는 단 한 번도 아버지처럼 자신을 대한 적이 없었다. 황제에게 황태자는 늘 뒷전이었고, 화풀이 대상이었다. 만약 ‘그 사건’이 없었다면 황태자로 책봉되는 일조차 없었을 테고.
반면 하겐 자작은 자신을 따스하게 돌봐주었다. 비록 신분의 차이 때문에 자신을 어려워하기는 했으나, 황태자에게 그는 정말로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그래, 굳이 자백을 들어 무얼 하겠느냐.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라는데.”
황제는 결국 검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하겐 자작을 베어버릴 셈인 듯 보였으나.
서걱.
황태자의 허리춤에 있던 검이 어느새 허공을 절반으로 그었다. 마기로 인해 더욱 강해진 신체 능력으로 인해, 황제는 그에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황태자는 말없이 쓰러진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앞으로 모두가 손가락질할 것이다. 자신의 아비를 죽여 버린 빌어먹을 놈이라고. 또한 일국의 황제를 제거한 역적이라고.
하지만, 상관없었다.
“일어나십시오.”
황태자는 하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런 황태자의 등으로, 일순간 수십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황태자 역시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역적이다! 폐하가 쓰러지셨다.”
“더 이상 황태자로 간주하지 말고 모두 죽여라!”
“황태자 전하를 지켜라!”
양측의 병사들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설마 이렇게 될 거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어디까지나 황태자의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 그를 타락시켰던 마기는 대부분 정화시켰고 그는 의식을 지닌 채로 황제를 베어버리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이어진 혈전. 황제의 군대와는 달리, 황태자가 이끌고 온 병력들은 단단히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런 선택을 할 것이었던 것마냥.
결국 승자는 황태자의 병력이 되었다.
“황태자 전하, 괜찮으십니까!?”
헤르네가 화살을 맞고 쓰러진 황태자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리고 무식하게 화살을 뽑으려기에 내가 얼른 끼어들었다.
“안 돼.”
“……아.”
절망에 차 있던 그의 얼굴이 나를 보고는 희망을 되찾은 듯 보였다. 그는 이미 죽을 뻔했다가 내 신성력을 통해 회복된 적이 있으니 가능성이 있다고 본 모양이었다.
“혹시…… 그 신의 힘을 베풀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가진 건 없으나 어떻게 해서든 평생 이 은혜를 갚아 나가겠습니다.”
“그럴 것까지는 없고.”
나 역시도 황태자가 이렇게 죽어가는 것을 볼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를 지금 살리는 건 무식하게 화살을 뽑는 것도 아니요, 화살이 꼽힌 채로 신성력을 발하는 것도 아니었다.
“우선 안으로 옮기자.”
헤르네는 황태자를 들어 올려 안으로 이동했고, 나는 약식으로라도 수술을 할 준비를 시작했다.
* * *
화살을 맞고 의식을 잃은 황태자는 새까만 환영 속을 떠돌고 있었다.
‘죽은 것인가?’
사후 세계인지, 아니면 단순히 무의식 속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허나 그 많은 화살이 꼽혔으니 살아남는 건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했고. 이미 반쯤은 포기한 상태였다.
사실 발칸의 황제를 베어 넘길 때부터 각오하던 일이었다.
‘크레펠트 발칸.’
그런 그의 머릿속으로 울려대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 목소리에서는 알 수 없는 오묘한 힘이 함께 전해져왔다. 그와 동시에 새하얀 환영이 황태자의 앞에 나타났다.
‘발칸 제국의 빛이 될 자여.’
‘누, 누구십니까?’
황태자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중얼거렸다. 누군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허나 그 목소리는 황태자의 질문에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대의 선택에 괴로워 말라. 결코 잘못된 길이 아니었으니.’
그 심금을 울리는 말에 황태자는 왠지 모를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이 단순히 황태자의 망상이 아니라면, 상대는 아마도 절대자에 가까운 존재일 것이 분명했다.
헌데, 발칸에서는 모시는 신이 없었으니 이해를 할 수가 없었지만…….
‘힐데스하임?’
앞에 보이는 빛에서는 3황자가 보여주었던 신성력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다. 절대자는 역시나 대답하지 않은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또한 결코 변절하지 말라. 이 무대의 주인공이 그대가 아닐지라도, 그대는 그대만의 업적을 쌓게 될 터이니.’
황태자로서는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을 이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