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Medical Life RAW novel - Chapter (98)
제98화
운명의 권능이 보여주었던 미래 덕분에 발칸 제국에서 변화를 만들어 냈다. 아니, 어쩌면 미래는 크게 바뀌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발칸 제국의 황제가 죽었다는 큼지막한 사건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기존 발칸 황제의 민간인 학살을 어느 정도나마 막을 수 있었고, 황제의 죽음을 황태자의 손으로 이끌어냈다는 것은 어찌 보면 큰 의미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 덕분에 황태자가 큰 탈 없이 그 자리를 계승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고.
그게 황태자에게 어떤 심적인 변화를 만들어 냈을지 내가 완전히 유추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황태자와 나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먼 훗날 대외 관계가 엮이게 되었을 때 내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성물이라든지, 새로운 능력의 개화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침반이나 또 다른 운명의 권능이 내가 나아갈 길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발칸의 의원들이라…… 괜찮으시겠습니까?”
현자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물었다.
“발칸의 황태자께서, 아니지. 황제 직접 허락하신 일이니까.”
발칸의 의원들 중 일부를 베이언 쪽으로 지원해주기로 했다.
베이언은 힐데스하임의 영토임에도 제대로 된 신전이나, 변변찮은 사제조차 찾아보기 드물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성국 내에서는 아직까지 버림받은 곳 취급을 받고 있으니, 고고한 사제들이 이곳에 올 리는 만무했다.
따라서 민간인들은 물론이고, 병사들이나 기사들이 다치는 경우에도 제대로 손을 쓸 수 없는 실정이었다. 기껏해야 성기사들이 자력으로 치유를 하는 정도가 최선이었지만, 애초부터 치유 능력에 매진한 사제와, 전투 능력의 향상에 매진하는 성기사 간에는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파우스트 경도 봐서 알고 있잖아. 발칸의 의술이 얼마나 큰 효용을 지니고 있는지.”
“예. 물론 전하께서 추구하시는 방향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나, 인식이라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법입니다.”
발칸과 힐데스하임의 사이는 대외적으로 여전히 좋지 않았고, 그곳에서 온 의원들에게 성국민들이 치료를 받는 데는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마. 내가 나설 테니까.”
발칸의 의원들에게 모든 걸 맡길 셈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들에게는 믿고 맡길 만한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손수 나서서 그들을 지도하고, 베이언 영지민들을 직접 치료한다면 그들이 가진 거부감도 차츰 줄어들 것은 분명했다. 의술은 그만큼 눈에 띄는 효용을 지니고 있었다.
“베이언에서 머리 좀 잘 돌아가고 손기술 좋은 이들을 발탁해서 의술을 배우게 할 거고.”
의학은 결코 아무에게나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아무나 익혀서도 안 되는 학문이었다. 어쩌면 신성력처럼 타고난 이들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기회라고 봐도 무방했다.
비상한 머리와 뛰어난 손재주, 그리고 극한의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차가운 심장이 자격요건이었다. 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중에서 심성이 바른 이들만을 골라낼 필요도 있겠지.”
그건 내 신념이었다. 의사의 윤리를 담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비록 시대에 맞게 변화되었지만 현대 의학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일컬어지고 있었다.
“쉽지 않은 길이 되겠군요.”
현자라고 하더라도 의술에 대한 부분은 무지했다.
“허나, 전하께서 성웅께 들은 내용이 진실이라면 전하가 걸으려 하시는 길이 결코 잘못되지는 않았을 테지요.”
성력을 통한 치유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점점 더 확신이 들고 있었다. 결코 의술을 등한시해서는 안 되었다.
힐데스하임 주신이 나를 이곳에 부른 이유,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갖고 태어난 이유. 처음에는 의아한 부분이 많았지만 점점 더 퍼즐 조각이 채워지고 있었다.
* * *
발칸 제국의 의원들 중 일부는 새로운 황제의 지시에 따라 힐데스하임으로 지원을 가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힐데스하임이라 하면 발작부터 일으킬 정도로 발칸 내에서의 인식이 좋지는 않았으나, 베이언으로 가게 된 이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군. 엊그제까지만 해도 적국이었던 곳의 국민들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
“그리 생각하지 말게. 언제까지 그런 바보 같은 생각에 빠져 있을 셈인가?”
“이게 어째서 바보 같다는 거야? 역사를 잊었는가? 힐데스하임에서 발칸에 저질렀던 만행들을?”
“힐데스하임의 3황자께서 탄생하기도 전에 벌어졌던 일이네. 우리는 그분을 보고 자원한 것이지 않은가?”
“나는 그분의 소문이 사실인지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함일 뿐이네. 정말로 기적적인 손놀림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가 만들어 낸 허풍일 뿐인지 말이야.”
“아무렴 좋네만. 황비께서 살아나신 것이 그분 덕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네. 그리고, 과거의 악연을 잊고 손수 힘을 빌려주셨던 것 역시도 그분이시지. 이 지독한 고리는 좀 끊어버릴 때가 되지 않았는가?”
불과 일이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발칸 제국에 이러한 생각을 가진 이들은 아무도 없었을 테지만, 3황자는 일부 의원들에게 깨달음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3황자가 현 황제와 돈독한 사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발칸의 하층민들에게 황태자는 신과도 같은 사람이었고, 그런 황태자가 친근하게 지내는 이라면 결코 나쁜 이는 아닐 터였다.
“흥, 난 모르겠네.”
물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반신반의한 채로 발칸을 떠나 베이언 영지에 들어선 의원들은 처음부터 따가운 시선들을 받아야 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괜스레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베이언의 영지민들. 발칸에서 온 것을 알고 있는지 저들끼리 쑥덕거리고 있었다.
“……역겹군. 저 꼴을 보고도 힐데스하임을 감쌀 셈인가?”
“신경 쓰지 말게나. 얼굴 붉히자고 예까지 온 게 아니지 않는가?”
그렇게 3황자가 있는 궁궐까지 도달하는 동안,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영지민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걸어가야만 했다. 궁궐 안에서 자신을 맞이하는 3황자의 태도도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았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다.”
딱딱하게 자신들을 대하는 3황자였다. 뭐, 애초부터 성족에게 환대받을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방금 전의 일 때문에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인지라 더욱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대들은 알지 모르겠지만 내가 다스리는 베이언은 아직 제대로 체계조차 잡혀있지 않은 곳이다. 군사력, 경제력, 정치, 문화. 모든 것이 부족해서 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으나 그중에서도 경중이 있는 법이지.”
3황자가 의원들에게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이들로서는 모를 일이었다.
“생명에 대한 존중이다. 발칸에서 의원들에 대한 처우가 썩 좋지 않다고 알고 있는데도 그대들이 의원이 되기로 마음먹은 데에서 그대들은 이미 훌륭하다.”
헌데 이어지는 3황자의 말에 이들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3황자의 말대로, 이들이 의원이 된 데에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살려야만 한다는 신념이 밑바탕이 되어 있었다. 그게 가문 대대로 이어지는 전통 때문이든, 누군가에게 반강제적으로 주입되었던 사상 때문이든.
“따라서 그대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이곳에 왔든 최선을 다해 주길 바란다. 생명에는 경중이 없는 법이다. 발칸이든, 힐데스하임이든.”
3황자의 그 말이 의원들의 가슴에 신선한 울림을 주었다. 생명에 경중이 없다는 것은 이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다.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낮은 이들이라 하여도 결코 목숨을 가벼히 여겨선 안 될 것이다. 또한 그대들을 민간 치료소에 배치하는 것이 결코 그대들에게 하찮은 일을 맡기는 것이라 생각하지도 말도록. 공로는 확실히 인정해 그대들에게 마땅한 보답을 내려 줄 터이니.”
황태자의 명에 따라 베이언으로 오게 된 의원들은, 적어도 그곳에서는 엘리트 취급을 받던 이들이었고 때때로 황실의 부름에 따라 자신이 운영하던 치료소의 환자들을 내팽개쳐야만 했다.
황실에서는 그것을 당연히 여겼다. 황족의 목숨은 일개 제국민들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중시 여겨지는 것이었고, 의원들도 그것을 당연한 것이라 여겨 왔다.
하지만 힐데스하임의 3황자가 하는 말은 이들로서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발상이었다. 당장에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황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퍽 인상적이었다.
“단 예외는 있어야겠지. 목숨을 경히 여기는 자들에게는 똑같이 대해도 좋다.”
“……알겠습니다.”
3황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말 단순히 이들에게 치료를 지원받으려는 것뿐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우선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베이언에서도 의원이 될 자들을 모집하고 있다.”
“……의원 말입니까?”
의술에 대해 적대적인 힐데스하임에서 발칸의 의원들을 모집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아예 의원을 육성하겠다니.
“의술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클레이디크에서 충분히 봐 왔으니까. 성력으로도 살릴 수 없는 환자들을 살릴 수 있었지. 다만, 성력과 마찬가지로 그대들의 의술은 완벽하지 않다.”
그건 의원들 역시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결코 치료할 수 없는 질병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치료법이 있는 질병에 대해서도 매번 좋은 성과를 거둘 수만은 없었다.
“그러니 베이언에서 의원을 육성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끊임 없이 더 나은 의술을 위해 토의할 자리를 가질 것이고, 그대들도 참여해 주기를 바란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의원들의 솔직한 심정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3황자가 의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온전히 믿는 자가 드물다 보니, 그가 주최하는 자리에 참여해 봐야 결코 발전적인 이야기가 오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이때까지도 분명 발칸의 의원들은 전혀 몰랐다. 그 자리에 참석해 입을 다물지도 못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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