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Plate's Villain RAW novel - Chapter (102)
홈플레이트의 빌런-103화(103/363)
# 103
필리스 두 필리스 (4)
1
살다 보면 어떤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나는 KBO 시절, 한때 ‘앵물’로 통했다.
앵물은 기자들이 좋아하는 소스를 마구 던져 대는 사람을 뜻하는 은어다. 나는 말하는 데 별로 거침이 없는 편이었기에 이슈를 몰고 다니곤 했다.
뭐, 있는 대로 말하자면 다른 선수나 다른 팀을 깎아내리는 발언으로 화제를 모으곤 했다는 이야기다.
사실, 깎아내리고 깔본 게 아니라 기자들이 악의적으로 확대 재생산해서…….
ㅇㅅㅇ: 말은 똑바로 하자.
ㅍㅅㅍ: 까내리고 깔본 건 맞지 않냐.
ㅡㅅㅡ: 조금 조심해서 말한다고 한 걸 기자들이 날카롭게 본질을 파악한 거지.
아니다, 이 악마야.
물론 그런 적도 있었지만, 어쨌든 아닌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대전 이글스 김주광에게 한 경기 홈런을 세 방 때려 내고 난 후, 커브만 노렸다고 하니까.
[홍빈, 김주광의 커브는 치기 쉬워.] [김주광의 커브를 못 치면 프로 자격이 없다.] [홍빈, 김주광이 상대 팀이라 기쁘다.]솔직히, 저건 좀 아니지 않나?
물론 주광이 커브 못 때리는 게 바보가 맞긴 맞다. 주광이는 착하긴 한데 커브는 더럽게 못 던졌으니까. 그것도 그런데 커브 던질 때는 몸을 평소보다 더 비틀어서 던졌기 때문에 커브가 올거간 것 정도는 조금만 주의해서 보면 알 수 있었다.
그게 커브냐? 그딴 건 나도 던지겠다.
ㅇㅅㅇ: 거 봐라.
ㅇㅅㅇ: 인성 보소.
어쨌든 그러다가 어느 순간 기자들에게 소스를 던져 주는 걸 그만두었다.
홈런 두 개를 때려 7타점을 쓸어 담은 경기에서 비결을 묻자, 운이 좋았다고 답했다. 그냥 그 날은 기자를 상대해 주기 싫었다. 사실, 돌아가신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었다. 감성에 젖어서 대충 대답해 주고 말았던 거다.
그런데 기자는 준비 안 해도 저런 투수 정도는 개박살 낼 수 있다는 뉘앙스로 기사를 썼고, 내가 화내자 이렇게 대답했다.
“뭐 어때? 어차피 상관없잖아? 그것보다, 자이언츠 투수들끼리 싸웠다는데 썰 좀 풀어 줘 봐.”
나는 기자에게 쌍욕을 날렸다. 평소라면 어차피 회귀해서 사라질 건데 이미지 관리해서 뭐하나 생각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기분 나쁜 건 나쁜 거지. 그리고 다음날 이런 기사가 올라왔다.
[홍빈, 오만함의 끝은 어디인가. 욕설 메시지 단독 공개.]뭐, 그렇더라. 자기가 한 말은 쏙 빼놓고 악의적으로 편집해서 내가 욕한 거 위주로.
친한 척 다 해 놓고 결국 날 그냥 이용한 것뿐이었던 거지.
저건 내가 한국에서 독고다이로 지내게 된 원인 중 하나다. 사실 다른 선수, 다른 팀 욕을 많이 해서 내가 자초한 것도 있다는 것은 맞지만, 기자들이 지나치게 흥미 위주로 기사를 쓴 것도 사실이다.
ㅇㅅㅇ: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초소형 포수.
ㅇㅅㅇ: 너 같은 인성을 가진 자들은 원래 아웃사이더…….
어쨌든.
말이 좀 샜는데.
그 뒤로 나는 그냥 교과서적인 대답 위주로 인터뷰에 응했다. 가끔 열 받아서 막 내지르기도 했지만, 하여튼.
그런 면에서 개빈을 보면 대단하다고 느낀다. 개빈도 언론과 타 팀 팬들의 공격을 받지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 신사다운 체면이나 품격으로 포장된 가식보다는 그의 야수 같은 공격성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더 많다.
이건 무조건 미국이 최고라는 말이 아니다. 이건 시장의 사이즈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가 나기에 가능한 일이다. 누군가는 개빈을 싫어하지만, 또 누군가는 개빈을 좋아한다. ‘누군가’가 가리키는 사람의 숫자는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크다는 게 바로 그 이유다.
어쩌다 보니 말이 길어졌는데, 음. 그러니까.
내가 지금 어떤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느냐 하면…….
“Nut and nuts가 무슨 뜻이니?”
음…….
“야구공이 동그랗잖아요. 그게 뭐… 그래서 넛트… 그냥, 야구 잘한다는 이야기에요. 잘 치고, 잘 잡고. 미국 애들은 은유적인 거 되게 좋아하거든요. 아무튼, 그래요.”
제대로 된 효도는 못 할지언정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한국 음식을 못 먹은 지 오래 됐을 거라며 직접 요리를 해 주시는 어머니께 내 응원가의 의미를 차마 제대로 말해 줄 수가 없었다.
야구하러 미국으로 떠난 아들내미가, 상대 선수 머리랑 불알을 깨 버리라는 응원가를 매일 듣고 있다는 걸 어떻게 말해.
불알, 머리! 머리, 불알!
좀 많이 그렇지 않나?
“Nut and nuts! 이거 중독성 있는데?”
아버지는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아무래도 의미를 아시는 것 같다.
빨리, 말을 돌리자.
“메이저리그는 수준이 다르죠? 어때요? 한국 야구보다 재밌지 않아요?”
그러자 아버지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사람 사는 데는 여기나 저기나 똑같더라.”
“예?”
“미국이라고 좀 다를 줄 알았더니만. 죄다 퍽유 퍽유 퍽퍽 거리는 게… 어차피 부산에서도 씨발 씨발 거리잖냐. 그거나 그거나 아니냐?”
음.
이건 뭐라 할 말이…….
2
디비전시리즈 2차전 시구를 아버지가, 시타를 어머니가 맡게 되셨다.
어머니는 그리 안 내켜 하셨지만, 아버지는 좋아하셨다. 정작 그러시고는 엄청 긴장하시긴 하셨지만.
직접 옆에서 가르쳐 드리고 싶었지만, 포수는 경기 당일 야구장 내에서 가장 바쁜 직업이다.
“난 준비됐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다. 그리고 엄청나게 긴장한 상태로 괜찮다고 말하는 것도, 분명 오늘 누군가가 내게 보여 준 태도다.
그게 누구냐면, 아버지가 시구 연습을 하시면서 저랬다.
나는 하얗게 질려 있는 짐의 엉덩이를 툭 쳤다.
“좋아. 준비됐다니 기뻐. 근데 숨은 쉬어야지, 슈퍼스타.”
“후우, 후우.”
“그래, 그거야. 잊지 마.”
“나 많이 긴장한 것 같아?”
“음.”
많이? 그걸 말이라고 해?
“쟤랑 비슷해. 어쩌면, 조금 더 심할지도 모르겠네.”
나는 라커룸 구석에서 중얼거리며 기도하고 있는 케이스 에이블을 가리켰다.
대범한 성격의 케이스는 어제 경기에서 삼진과 병살 퍼레이드를 펼쳤고, 기가 완전히 죽어 있다.
하지만 한 번 결정한 것은 쉽게 바꾸지 않는 우리 감독님의 특성상, 오늘도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고는 있다.
“진짜야? 케이스보다 더?”
“숨을 좀 더 크게 쉬면 쟤보단 나아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좋아. 스읍-하. 스읍-하.”
정말 할 일이 태산 같지만, 짐을 케어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어쩔 수 없다.
심지어 개빈도 짐과 호흡을 맞추는 건 어려워한다.
사실, 어렵다기보다는 짐이 개빈을 무서워한다는 게 문제다.
개빈은 여전히 안정감 있는 수비를 펼치지만, 짐은 개빈과 배터리를 이룰 때면 종종 자신에 대한 확신을 잃곤 한다. 심리적인 이유로 실투가 증가하는 거다.
어쨌든, 오늘은 첫 경기만큼 중요한 날이다.
이 경기에서 이기면 팀 전체에 여유가 생긴다.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첫 두 경기를 이기고 나면, 떨어지는 게 이상한 일이 된다.
시즌 전체로 보자면 매일 경기에 나서는 타자가 팀에 더 기여도가 높지만, 경기 단위로 보자면 투수가 더 중요하다. 그러니까 오늘 경기 준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짐이 자기 공을 던질 수 있도록 만들어 놓는 거다.
“긴장하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
“알겠어.”
“마운드에서 숨 쉬는 거 잊지 말고. 넌 앵그리버드가 아냐.”
“안 잊을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게, 개껌이라도 하나 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로즐도 이랬으면 훨씬 더…….
“니네 뭐 하냐?”
불펜으로 뛸 거라고, 언제든 던질 수 있게 준비 꼭 해 두라고 말했지만 그런 건 다 무시하고 놀고 자빠진 로즐이, 내 뒤에서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고 있다.
“가서 러닝이라도 좀 해, 로즐.”
“난 천재라서 공 3개만 던지면 몸이 풀어져.”
“만약 급하게 네가 올라왔는데 몸이 안 풀려 있으면 널 관중석으로 던져 버릴 거야.”
“좋아. 날 내 팬들에게 던져. 미녀 팬들이 기절하겠지.”
어쩌면 짐과 로즐을 반반 섞어 놓으면 진짜 골 때리게 좋은 멘탈을 가진 투수가 탄생하지 않을까?
3
나도 트래시 토크를 많이 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요정 놈이나 내게 당한 선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트래시 토크의 본좌격이라 할 수 있는 개빈에 비하면 나는 정말 착한 편이라고 자부한다.
언제 한번 개빈에게 물은 적이 있다. 별 생각 안 하고 물은 거였다. 그냥 대화를 이어 나가다 침묵이 이어질 때 아무 생각 없이 질문한 그런 거.
“개빈. 마스크를 쓰고 앉아서 타자들에게 뭐라고 말해요?
개빈은 따분하다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평소에? 아니면 상대를 조지고 싶을 때?”
“후자요.”
“글쎄.”
개빈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그에게 당한 선수들이 저 웃음을 보면 살인 충동을 느낄지도 모른다.
“지금은 은퇴한 조 코모도는 내가 마스크를 썼을 때, 3년 동안 홈런을 때리지 못했지.”
조 코모도는 내셔널리그 홈런왕 출신 강타자다.
메츠에서 7년 정도 전성기를 보냈던, 일명 코만도 조.
“하루는 그 자식이 8게임 연속 홈런에 도전하는 날이었어. 나는 놈에게 말했지. 헤이, 코만도. 어제 나이트 클럽에서 네 와이프를 만났어. 날 보자마자 포옹하더니 이렇게 말하더군. 이런, 말해 주고 싶은데 이제 경기를 시작해야겠군.”
“오.”
“코모도는 야구는 잘하지만 조금 멍청한 놈이었어. 뒷이야기가 얼마나 궁금했던지, 스윙할 생각도 하지 않더라고. 난 물론 대답해 주지 않았지. 난 걔 와이프가 어떻게 생긴지도 몰라.”
하여튼, 개빈은 정말 심하다. 저거 외에도 많은데,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하겠다. 지독한 사람.
나는 가족 이야기를 할 때면, 기껏해야 가서 엄마한테 이르라거나 하는 정도에 그친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하는 것은 별것 아니라는 이야기다.
“오늘은 좀 다를 거다.”
오늘은 카디널스의 선두 타자로 나선 헥터 비에릭이, 삼류 악당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개빈보다는 훨씬 부드럽지만, 필리스답게 대답해 줬다.
“그때와는 다른 각도로 내게 처맞을 예정인가? 어디를 맞고 싶은지 말만 해. 코 성형? 양악수술? 어딜 원해?”
“농담 아니야. 네 녀석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지.”
“농담 아닌 건 알아. 네 멍청한 말엔 아무도 안 웃으니까. 누군가 웃어야 농담이지. 안 그래?”
“해 보시지.”
까라면 까야지.
짐.
이 열정에 불타는 농담맨을 상대로 99마일 포심을 코앞에다 붙여 줘.
“으헉!”
“볼!”
매우 기분 좋은 공이, 공기를 찢고 들어와 미트에 묵직하게 꽂힌다.
미트 위치는 당연히 헥터 비에릭의 머리가 있던 위치다. 결의에 불타던 것치고는 꽤 현란하게 넘어지는데?
“하라길래 해 봤어. 마음에 들어?”
“…개자식.”
“환영해. 개자식들의 도시에 온 걸.”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짐에게 공을 돌려주었고, ‘그’ 도시의 주인들이 비에릭에게 소리쳤다.
“빌어먹을 놈아! 당장 일어나서 삼진이나 먹어!”
“엄살 부리지 마, idiot!”
“잠은 집에 가서 자라고! 물론 오늘 지고 난 뒤에!”
비에릭은 이를 꽉 깨물고 타석으로 돌아왔다.
필리스가 필리스 했는데, 뭐 문제라도?
“스트라이크! 아웃!”
필리스의 초구 이후 3개를 던져 삼진 아웃.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첫 경기를 지고 나면 패배한 팀의 선수들은 알게 모르게 초조해지기 마련이다.
만약 팀워크가 무너졌다면 뒤 순번의 타자를 믿기보다는 자기가 해결하고 싶어할 수도 있다. 물론 이번 한 타석 가지고 뭐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솔직히, 긴장을 떨치지는 못한 짐의 공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근데 저렇게 알아서 무너져 주면 땡큐지.
[투수 체력: 99%.] [투수 컨디션: 상.] [투수 자신감: 77%.]삼진 하나로 자신감이 51%에서 77%로 뛰었다.
집중 케어 한 보람이 있는지 컨디션 관리는 잘 되어 있고, 시즌 막판에 로테이션을 거른 덕에 원래 좋았던 체력은 더할 나위 없는 상태.
시원하게 2연승을 하고 적지로 들어가면 부담 없이 참 좋지.
“스트라이크!”
97마일 패스트볼이 꿈틀거리며 들어와 꽂힌다.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다.
“어때? 칠 수 있을 것 같아?”
2번 타자 케스퍼 텐브루에게 다정하게, 타격 코치처럼 물었다.
그러자 케스퍼 텐브루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운 좋으면? 그런데 부탁이니 머리로 공을 던지지만 말아 줘.”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는 지성인의 도시 필라델피아에 원정 경기를 하러 온 선수에게 아주 적합한 자세다. 어설프게 공격적으로 나왔다간 되레 당하기 십상이니까.
“좋아. 네겐 특별히 머리로 던지라곤 하지 않을게. 마음껏 스윙해 봐.”
“Thanks, bro.”
그리고 나는 짐에게 몸 쪽 높은 공을 요구했다.
지성인의 도시 필라델피아에서는, 안 맞으면 일단 한 대 때리고 본다.
결코, 무사히 나갈 수 없는 곳이지.
이렇게 말하니까 악마의 소굴 같은 느낌도 드는데.
“볼!”
“이러기야?”
쉽게 피한 케스퍼 텐브루는 한숨을 살짝 내쉬었고, 나는 모르는 체했다.
“왜? 머리에 안 맞았으면 된 거 아냐?”
그건 몸 쪽 높은 공이지 머리에 직격할 공은 아니었다고.
그러게 누가 바짝 붙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