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Plate's Villain RAW novel - Chapter (12)
홈플레이트의 빌런-13화(13/363)
# 13
뭐지, 이 괴물은? (2)
1
풀카운트.
지미 플로렌스가 팔을 흐느적 하고 휘두른다.
“베이스 온 볼스!”
결정구랍시고 던졌는데 여지없이 홈 플레이트 앞에서 튕겨 버리는 너클 커브. 가슴으로 받아 내 앞에 떨어뜨려 냈다.
홍빈은 얼얼한 왼손을 주무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걸 대체 뭐라고 받아들여야 하나.’
지금 상황은 1회 초, 1사 주자 1, 2루.
첫 타자를 헛스윙 삼진으로 잡은 뒤 2타자 연속으로 풀카운트를 채우고 볼넷.
심지어 상대 2, 3번 타자는 단 한 번의 스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운드에 선 지미 플로렌스는, 전혀 아쉬운 공이 아닌데도 판정이 아쉽다는 듯 입술을 깨물면서 억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뭔가 기묘하게 답답한 표정을 지은 홍빈은 타석에 들어서는 4번 타자의 정보를 읽었다.
[베이브 폰텐] [우투우타, 1루수] [키워드 : 당겨 치기, 장타, 홈런, 해결사]키워드에서 물씬 풍겨 오는 공갈포의 향기.
20여 년간 쌓여 온 노하우에 따라, 이런 타입의 선수는 물불 가리지 않고 일단 잡아당기는 타입이다.
타율과 출루율은 절망적이지만 일단 제대로 걸리면 펜스를 넘길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해결사? 득점권에서 괴력을 발휘하는 타입이다. 그나마 제일 뒤에 놓여 있어 조금 덜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초구에 체인지업 사인을 냈다.
하지만 고개를 가로저은 지미 플로렌스는, 너클 커브를 던지겠다고 역으로 사인을 냈다.
‘그 빌어먹을 커브가 제대로 들어오는 꼴을 못 봤는데! 또?’
홍빈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며 심판에게 타임을 요청했다.
“잠시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빨리 다녀와.”
성질 같아서는 마운드로 달려가 투수의 엉덩이라도 걷어차고 싶었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평정심을 되찾고, 지미 플로렌스가 좋아하는 별명이 뭔지 떠올렸다.
‘Doc.’
필리스에서 사이 영 상을 받은 투수의 후계자로 불리는 걸 좋아한다는 인터뷰를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홍빈은 마스크를 벗어 옆구리에 낀 채, 마운드를 방문했다.
2
“헤이, Doc. 오늘 커브가 영 말을 안 듣는 것 같은데, 포심이랑 체인지업 위주로 가는 게 어때?”
“내 커브는 던지다 보면 제 위력을 발휘해.”
짐은 정말 그렇게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Doc’라고 불리는 것에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모여든 내야수 중 하나, 2루수 케이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내게 말해 주었다.
“한 백 개 정도 던지면 제 위력을 발휘할지도 모르지.”
그러자 짐이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우물쭈물하고 있다.
아무래도 너클 커브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 맞을 듯하다. 투수의 심정과는 상관없이.
사실 포심의 제구력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태반이 그냥 스트라이크존 정중앙에 꽂혀 버린다.
그래도 워낙 위력적이라 손대기 힘들 정돈데.
나보고 치라고 해도 제대로 타이밍을 맞추기 힘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니까.
“좋아. 짐, 다른 걸 던지면서 커브에 대한 감을 찾아 나가는 게 어때?”
많은 투수들이 좋게 말하면 섬세하고, 나쁘게 말하면 개복치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짐은 딱 봐도 개복치 같은 스타일이 틀림없고, 이런 투수들에게는 되려 강하게 말하는 게 역효과를 발휘하곤 한다.
사실, 답이 없다. 그냥 잘 던지기를 바라는 수밖에.
성격도 컨디션도 안 좋은 투수에게 바랄 수 있는 건 그냥 5이닝을 버텨 주는 것뿐.
그리고 타선이 터져 주길 바라는 것밖에는 더이상 뭘 손댈 수가 없다.
“…좋아.”
입이 삐죽 나온 채로 투덜거리는 게, 좋기는 개뿔 벌써 삐진 게 틀림없다. 저래 놓고 커브 사인을 보내는 게 투수란 놈들이다. 아주 복장 제대로 터지는 족속들이지.
“그래, 오늘 네 포심이랑 체인지업은 정말 끝내줘. 내가 메이저리그 시범 경기를 몇 경기 뛰었는데, 거기서도 너보다 좋은 공을 던지는 메이저리거는 없었어. 사실, 필리스 에이스인 쇼 주니어 공도 꽤 받았는데 너보다 못해. 이해했어?”
“정말이야?”
짐이 반색하고 내게 물었다.
마운드 주변으로 몰려든 내야수들은 ‘그게 뭔 개소리야?’라는 듯한 표정으로 나와 짐을 바라봤지만.
이건 사실이다. 포심 위력만큼은.
…스트라이크존 안으로 넣을 수만 있다면.
“그래. 그러니까 놈들을 때려눕히자고.”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짐은, 홈으로 돌아간 내 체인지업 사인에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니 이 미친놈이?’
배터 박스의 빈 쪽, 그러니까 좌타석 쪽으로 엉망진창인 공이 날아왔고 나는 몸을 날렸다.
이걸 블로킹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거의 다이빙 캐치급으로 몸을 날려 공을 잡아낸 나는, 엎드린 채로 상체를 최대한 비틀어 3루를 향해 공을 던졌다.
“아웃!”
공이 분명히 빠지리라 보고 3루로 뛴 2루 주자를 가볍게 잡아낸 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아야만 했다.
‘체인지업 제구도 엉망이었네.’
그런데 짐이 감동받았다는 듯한 그런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박수를 치고 있다.
이 미친놈아.
박수 칠 생각하지 말고 제대로 공이나 던지라고.
3
“오오!”
“오오오오!”
“Yeah!”
“잘하는데!”
들리는가.
나를 향한 저 함성 소리가.
프로스포츠 선수로 살아가면서, 팬들의 환호를 즐기지 못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은 없겠지.
하지만 이건 조금 번지수가 다르다.
한국에서 뛸 때.
팬들은 내가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내 이름을 목 놓아 불렀고, 내가 홈런을 때린 날에는 택시비나 밥값, 술값을 내 본 적이 없다.
나는 수비도 잘했고 타격도 잘했다. 심지어 주루도 잘했고 팀의 리더 역할도 잘했다.
매우 자화자찬 같지만 어쨌든 그랬고, 팬들은 주로 타점을 올리고 홈런을 때리는 내게 환호했다.
그런데 이건…….
“굿 블로킹!”
우리 팀 1루수인 폴 데이먼이 내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왜 필리스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많이 왔는지 들었는데, 상대 팀인 빙앰튼 럼블포니스가 필리스 최대의 라이벌 중 하나인 뉴욕 메츠의 더블A 팀이라 그렇단다.
…….
그래.
그 정도로 야구에 미친 자들이 우리 팬들이란다.
아무리 메츠가 싫다지만 더블A 경기까지 와서 저 난리를…….
“이봐, 꼬마!”
백네트 뒤쪽에서 웬 술에 잔뜩 취한 아저씨 하나가 내게 삿대질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그쪽을 바라보니 어느새 그걸 준비했는지 박스 쪼가리에 ‘B’를 써서 네 개나 붙여 놓았다. 아무렇게나 찢어진 박스라 허접하긴 하지만.
그리고 그 아저씨는 엄청나게 자랑스러운 일이라도 된다는 듯, 자기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소리쳤다.
“블로킹 하나 성공할 때마다 이걸 붙여 주지!”
저거…….
설마 투수가 삼진 잡을 때마다 ‘K’를 붙이는 걸 따라 한 건가?
그러니까 그 말은, 내가 오늘 경기에서 4이닝 4블로킹을 성공했다는 말이렷다.
짐 플로렌스가 저 공을 가지고 왜 더블A에 있는지 이제야 알겠네.
다른 포수였다면 벌써 와일드 피치가 4개였겠지.
미친.
4
“오늘 마이너리그 경기에서 진풍경이 연출되었습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더블A 팀인 레딩 파이틴 필스와 뉴욕 메츠의 더블A 팀인 빙앰튼 럼블포니스와의 경기에서, 파이틴 필스의 포수가 블로킹을 총 7번 성공시켰죠. 그 와중에 당연히 공이 빠지리라 생각한 럼블포니스의 주자가 아웃되기도 했습니다. 이게 무슨 헛소리냐고요? 하긴, 저도 이 영상을 보기 전까지는 무슨 헛소리를 하냐고 말했죠. 뭐, 보시면 아시겠죠. 플레이 더 볼 게임!”
케이블방송에서 오늘 우리 경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뭐, 보다시피 오늘 7개의 블로킹과 3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한 내가 주인공이다.
사실 2안타도 때리고 타점도 하나 올렸는데 타격은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억울하지만 뭐, 주목받는 건 나쁘지 않지.
“정말 멋졌어! 드디어 포수다운 포수를 만났어! 세상 모든 포수가 너 같으면 좋을 텐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세상 모든 투수가 너 같았으면 야구는 세상에서 없어졌을걸.
그 어떤 야구 팬들도 9이닝 내내 포수가 튕겨 나가는 공을 잡으려고 몸을 던지는 것‘만’ 보려고 돈을 내진 않을 거거든.
“그래, 고마워.”
“제기랄. 오늘은 내 컨디션이 말이 아니어서 커브가 말을 듣지 않았지만, 제구가 되는 날 내 커브를 보면 너도 깜짝 놀랄 거야!”
음.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나는 몇몇 선수들이 함께 사용하는 셰어 하우스에 마침 빈 자리가 있어 초대받았고(짐이 강력하게 주장했다), 오늘 90구를 던지며 5이닝 2실점을 기록한 미래의 3회 사이 영 상 수상자가 신나서 떠드는 걸 듣고 있는 중이다.
이 녀석의 문제가 대체 뭘까. 뭔가 공을 던지는 게 이상하긴 했다. 위화감이 느껴지긴 하는데, 무슨 수를 써야 이놈을 사람처럼 던지게 만들 수 있을까?
대충 대답해 주며 고민에 빠져 있는데, 요정이 내게 힌트를 줬다. TV로 짐의 투구 영상을 보면서 말이다.
ㅇㅅㅇ : 쟨 왜 저렇게 팔을 멍청하게 휘두르는 거지?
ㅇㅅㅇ : 네 녀석처럼 공을 던지는군. 멍청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