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Plate's Villain RAW novel - Chapter (140)
홈플레이트의 빌런-141화(141/363)
# 141
할아버지의 야구공 (2)
1
정말 난감할 뻔했다.
[1초 무적이 자동으로 발동됩니다!]한참 난리를 칠 때는 정신없어서 몰랐는데, 1초 무적이라니.
엄청나게 곤란해질 뻔했다. 간담이 서늘해진다. 너무 격했나. 어디를 다칠 뻔한 걸까. 허리? 제기랄. 내가 이렇게 약했나?
그나저나 부상당하면 뭐라고 말해? 어, 제가 여자친구랑 그걸 하다가… 그렇게 말했다간 개빈에게 죽을 텐데.
ご,.ごメ: 널 죽여버릴 것이다, 꼬마.
혹시 개빈 흉내 낸 거냐?
ㅎㅅㅎ: 비슷했냐.
비슷하긴 개뿔이.
어쨌든, 나는 완전히 지쳐서 잠든 아리를 내 침대에 눕혀둔 채 집을 나섰다.
혹시 누가 들어올까 봐 입구의 지문 인식 데이터를 나와 아리를 빼고 싹 지워버리고, 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개빈, 어디에요?”
-내 집에서 널 기다리고 있지.
모시러 간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웃긴 양반이다.
-실을 짐 많으니까 트럭을 타고 와.
정말 웃긴 양반이다.
“알겠어요. 곧 갈 테니 기다려요.”
그러고 보면 개빈은 내가 차를 몇 대나 가지고 있고, 최저 연봉자 주제에 이런 큰 집에 사는 것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는다. 사실 개빈 말고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지만.
기껏해야 계약금을 궁금해하는 정도지.
문화적 차이일까. 낭비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참견하고 싶지 않아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뭐가 더 낫다거나, 어디의 방식이 잘못됐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어쨌든, 풀사이즈 픽업트럭에 시동을 걸고 개빈의 집으로 출발했다.
그리 먼 거리가 아니기에 금방 도착했고, 개빈의 짐을 함께 트럭에 실으며 물었다.
“근데 왜 갑자기 자선행사에요?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이라도 노리시는 거예요?”
개빈은 내 장난스러운 말에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상은 나랑 안 어울려.”
저도 알고 있는데요.
ご,.ごメ: 후후. 내 취미는 봉사활동. 특기는 자선활동이지.
미친놈아 좀.
“단골 술집에서 자주 보던 손님이 있었어.”
그것도 나름 대단하다니까.
술을 먹으면서도 40대까지 자기관리가 된다는 건.
“70대 노인이었어.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았고, 가장 싼 위스키 한 잔만 마시곤 나갔지. 그런데 어느 날, 그 노인이 위스키를 무려 석 잔이나 마시더라고.”
할아버지 생신이었나 보지 뭐.
8ㅅ8: 인성 상태가 18타수 18삼진 수준이로군.
내가 뭘 했다고 그런 욕을 해?
“들어보니, 그 노인의 손녀가 백혈병에 걸렸다더라고. 속상해서 술을 마시고 있었던 거지.”
…….
8ㅅ8: 거 봐라. 이 인성 쓰레기.
아니, 젠장. 내가 그걸 알았나?
“하여튼 인연이 닿아서. 알고 보니 우리 팀 팬이더라고. 알다시피 미국의 의료비는 엄청나. 그걸 감당할 형편이 아닌 거 같아서, 왠지 모르게 아리가 생각나서 돕겠다고 한 거야.”
…….
ㅡㅅㅡ: 죽을 준비는 끝났나.
゚益 ゚: 네놈을 지옥으로 데려가 주마…….
아니, 젠장.
알겠으니까 그 살벌한 면상 좀 치워봐.
오늘 내가 악역인 거 맞지?
“좋네요. 제가 뭐든지 도울게요. 사인 말고 더 해줄 일이 있나요?”
하나하나 말리는 기분이라 오늘 뭔가 좀 불길하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모를 죄책감에 그렇게 말했다.
“그래? 안 그래도 말하려 했는데, 오늘 빅터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기로 했어. 빅터가 네 팬이니 너도 오도록 해.”
“빅터요?”
“말 안 했나? 내가 술집에서 만난 노인의 이름이 빅터야.”
어차피 저녁은 개빈네 집에서 얻어먹으려 하긴 했으니까, 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말했고, 개빈은 악당의 포스를 철철 풍기며 내게 말했다.
“게다가 사인도 무지막지하게 해야 할 거야. 각오해.”
2
“레드 빈. 당신의 팬이에요. 작년 월드시리즈는 병원에서 봤지만, 이번엔 꼭 경기장에 가서 볼 거예요.”
“그래? 테리, 고마워. 네가 응원해주면 올해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할 수 있을 거야.”
“꼭 응원할게요!”
나는 웃으며 ‘테리’라고 이름표를 달고 있는 꼬마의 이름을 야구공에 쓰고, 꼭 건강해져서 월드시리즈를 보러 오라고 쓴 후, 내 사인을 했다.
“자. 여기. 빨리 나아서 야구장에서 날 응원해줘.”
“고마워요!”
테리는 헤실헤실 웃으며 내가 건네준 야구공과 홈경기 티켓을 받아서, 다음 타자… 아니, 다음 아이가 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이름이, 보자.
“좋아, 섀넌. 그 바구니는 뭐니?”
지은 죄(?)가 있어서 불평 없이 웃으면서 계속 사인을 해주곤 있는데, 입가에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다.
벌써 한 시간째인가.
그리고 섀넌이라는 꼬마 여자아이는, 바구니에서 야구공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랑 할아버지 친구들이 다들 레드 빈의 팬이래요.”
“오… 그래?”
침착하자. 이건 그냥 사인볼일 뿐이라고.
보자, 하나, 둘, 셋, 넷……. 11개네.
그래. 어차피 11명한테 해주나 1명한테 11개 해주나.
웃으면서 하자, 웃으면서.
ㅡㅅㅡ: 입만 웃고 있다.
아니 뭐, 입으로 웃지 뭐로 웃나?
ㅡㅅㅡ: 지금 초소형 포수의 눈은 마치 딸을 뺏긴 개빈의 그것과 같지.
아니, 정말 그렇다고?
나는 최대한 친절한 눈빛을 하고 섀넌을 바라봤다.
“혹시 제가 뭐 잘못했어요?”
“응? 아니, 왜?”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섀넌은 움츠러드는 목소리로, 갑자기 기가 죽어선 그렇게 말했다. 항암 치료 때문인지 머리카락이 없어서 모자를 쓰곤 있지만 씩씩한 모습이었는데.
ㅡㅅㅡ: 거 봐라. 네놈의 눈빛은 생각하기도 끔찍한 수준이었다고.
이런 젠장. 난 친절하게 바라본 건데.
“응? 아니야. 눈에 먼지가 좀 들어가서. 정말 아니야, 괜찮아.”
내 눈빛이 뭐 어쨌다고.
섀넌은 어깨를 으쓱하며 곧 내게 다시 다가왔다.
친절하게, 친절하게.
덕을 쌓아야 하느니라.
“할아버지는 어디 계셔?”
“먼 곳에 계세요.”
먼 곳?
그게 무슨 의미지?
설마 돌아가셨다는 의미인가?
아.
엄청나게 혼란스럽고 힘든 날이다.
차라리 더블헤더, 아니 트리플헤더를 풀로 치르는 게 낫겠어.
아리에게 오늘 내 운을 다 써버린 걸까?
ㅎㅅㅎ: 흥. 초소형 뇌를 가진 멍청한 초소형 포수.
요정이 뭐라 지껄여도, 나는 이제 녹초가 되어 버렸다.
특히 섀넌에겐 내가 뭐라 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같은 날은 괜히 입을 열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해 버릴 것 같기도 하고.
섀넌에게 11개의 야구공에 모두 사인을 해준 뒤, 몇몇 아이들에게 사인을 조금 더 해주곤 식전행사 격인 사인회가 끝났다.
곧 메인 행사가 벌어질 예정인데, 별도로 마련된 무대 뒤에서 만난 라이언은 살짝 울상이 되어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젠장. 그러니까 수백 명이 내 머리 깎는 모습을 본다는 거잖아?”
오늘부로 라이언의 저 찰랑거리는 장발을 못 보는 건가.
부상에서 거의 회복한 쇼도 모발을 기증하기로 했고, 우리의 새 불펜 투수인 보더 켈리도 마찬가지였다.
라이언은 구경거리가 되는 것 같다고 그리 좋아하진 않았지만, 나쁘진 않았다.
다들 박수를 쳤고, 이 지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슈퍼스타인 선수들이 지역의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긴 머리를 잘라 기증하는 건 꽤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동시에 세 선수의 머리카락이 준비되었다. 그리고 단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개빈이, 놀랍게도 늘 웃는 그 악마 같은 모습이 아니라 온화하게 웃는 얼굴로 한 꼬마아이를 안고… 그 꼬마 여자아이는 어디서 많이 보던 바구니를 들고…….
쟤 섀넌이잖아?
“제 동료들에게 감사합니다. 사실, 이거론 택도 없답니다. 300명이 머리카락을 기증해야 가발 하나를 만들 수 있다네요. 그런 의미에서, 머리카락을 기증하실 분들은 따로 저기서 신청을 하시면 되겠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개빈은 다행히도 오늘만큼은 ‘Fuck’ 같은 상스러운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나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개빈이 섀넌의 할아버지가 죽었다고 말했던가?
그런데 개빈의 뒤를 따라 나온 저 할아버지는 누구지?
ㅎㅅㅎ: 꼬마의 할아버지는 개빈과 함께 약간 떨어진 곳에서 커피를 한잔하고 있었지.
ㅎㅁㅎ: 꼬마의 짧은 다리론 먼 곳이 아닌가.
ㅋㅁㅋ: 트래쉬 토크를 하려거든 저 꼬마에게도 좀 배워야겠군, 코딱지만 한 뇌를 가진 초소형 포수.
음.
나는 슬쩍 화장실로 가 가슴팍에서 카드를 꺼내, 내 팬티 속으로 집어 넣어버렸다.
ㅠㅁㅠ: 놔라. 이놈아! 내가 뭘 잘못했다고!
ㅠㅅㅠ: 브라질리언 왁싱을 해버릴 것이다. 이놈…….
뭐.
요정은 계속 떠들어 댔지만, 나는 행사가 끝날 때까지 놈을 꺼내주지 않았다.
메이저리거들의 솔선수범으로 모발 기증은 꽤 성황리에 이루어졌고, 개빈과 다른 동료들의 애장품 경매도 반응이 꽤 괜찮았다.
특히 쇼가 내 놓은 디비전시리즈 1차전 완봉승 때 마지막으로 던진 야구공이 이 지역의 사업가에게 꽤 비싼 값으로 팔렸다.
더 놀라운 것은 누군가가 주머가 월드시리즈 4차전에 그랜드슬램을 쳤을 때 사용한 배트가 나왔을 때 단번에 30만 달러를 불러 버렸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팀 구단주였더라. 구단주 할아버지 통도 크셔.
어쨌든, 행사는 성황리에 끝났다.
“젠장. 다음부턴 네가 해.”
개빈은 행사가 끝나자마자 그에게서 처음으로 볼 수 있었던 온화한 표정을 즉시 마피아 보스의 표정으로 바꾸어 버려서 주변에 있던 동료 선수들을 웃겨 버렸고, 라이언은 이렇게 말하며 동료 선수들을 다시 한 번 웃겼다.
“개빈, 머리를 30cm만 길러요. 그럼 내가 개빈의 머리카락을 기증하는 행사를 주최할 테니까.”
개빈이 머리 30cm를 기르는 데 과연 얼마나 걸릴까.
개빈은 넌더리를 치며 이렇게 대답했다.
“차라리 300명의 머리카락을 사서 기부하겠어. 난 머리카락이 있으면 안타를 못 친단 말이야.”
개빈이 대머리를 고수하는 이유가 그거였다니.
이런 빌어먹을 징크스의 노예를 봤나.
3
“그랬단 말이야?”
“푸훕.”
“오, 이런. 섀넌.”
개빈의 집에서 개빈의 가족과 빅터, 섀넌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도중, 나는 사인을 하다가 섀넌을 만난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예, 혹시라도 실수할까 봐…….”
“왜요? 할아버지는 나랑 100미터는 떨어져 있었다고요!”
테이블이 너무 높아 플라스틱 박스를 하나 깔고 앉은 섀넌은 그렇게 말하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샐러드를 포크로 집었다.
“하긴, 섀넌에겐 먼 거리였을 수도 있죠.”
나는 그렇게 말하곤 한숨을 슬쩍 내쉬었다. 오늘은 뭔가 내 몰래카메라라도 하는 날 같다.
아리는 나른하게 날 바라보며 웃었다. 음, 아리의 모든 게 섹시해 보이는 건 착각일까. 그 속옷 같지도 않은 속옷은 이미 갈아입었겠지?
“그나저나, 내 친구 녀석들이 부러워서 기절할 거야. 개빈 폴체스키의 집에서 레드 빈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다니. 게다가 섀넌의 치료비도 순식간에 해결됐잖소. 개빈, 정말 감사하다는 말로도 모자라네. 바바라, 내가 눈감는 그날까지 당신의 가족을 위해 기도하겠소.”
“저도요.”
샐러드를 오물오물 씹던 섀넌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자,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빈, 자네는 내일도 못 나오지?”
“네, 내일까지죠. 그 뒤론 개빈이 한가해질 거니까 다시 술집에서 개빈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젠장. 봤죠, 빅터? 이 녀석이 이렇다니까요.”
“개브, 아이 앞에서 젠장이라니.”
“오, 이런 젠장.”
하여튼 뭐 이런 분위기였다.
개빈은 이번 홈 3연전의 티켓을, 나는 빅터와 섀넌에게 내 유니폼을 선물했다.
사실, 남을 돕는 것에 대해선 별로 신경 써 본 적이 없다.
고작 사인만 열심히 했을 뿐이고 금전적으로 도움된 건 없지만, 이런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개빈과 빅터는 꽤 좋은 술을 나눠 마셨고, 나는 식사 후 내 픽업트럭으로 빅터와 섀넌을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내일은 못 보겠지만, 모레부터 경기에 나오면 꼭 응원하겠네.”
“나도! Nut and nuts!”
“고마워요, 빅터. 고마워, 섀넌.”
그 노래는 아주 나쁜 노래니까 부르지 말라고 하려다가, 어차피 얘도 필리스 팬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혹시 모르지,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는 병살을 치면 중지를 들어 올리며 욕을 하고 있을지.
어찌 보면 개빈이 마음이 동했다면 그냥 수술비를 지원해 줄 수도 있는 일이었을 텐데, 자선 행사를 벌여서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꽤 큰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섀넌 하나만을 돕고 끝나는 게 아니라 지역 사람들에게 소아암 환자들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끌게 만드는 거니까.
섀넌의 수술 비용에서 초과한 금액은 필리스 선수단 이름으로 재단을 만들어 지속해서 관리하기로 했고, 다음번에는 나도 애장품 기증에 참여하기로 했다.
어쨌든 굉장히 즐겁게 시작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가 또 즐거웠던, 복잡하고 미묘했던 하루가 지났다.
이 일은 뉴스에도 나왔고, 다음 날 내가 빠진 경기에서 경기를 관람하러 온 빅터와 섀넌의 모습을 중계 카메라가 잡아주었다.
나는 오늘까지 출장 정지이기에 클럽하우스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2회 말에 주머가 병살을 친 시점에서, 충격적인 걸 봐 버렸다.
-주머 데이비스! 1사 만루의 기회에서 병살타를 쳐 공격 기회를 날려 버립니다!
중계 카메라는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는 주머를 잡아준 뒤 관중석을 잡아줬는데, 곧 카메라를 급히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다.
음.
빅터.
당신도 역시 필리건이었군요.
내가 어제 준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을 찾은 빅터의 입 모양을 분명히 봤다.
똑똑히 봤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