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Plate's Villain RAW novel - Chapter (171)
홈플레이트의 빌런-172화(172/363)
# 172
누가 누가 잘하나 (6)
1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공은 원래 둥글게 만들어졌고, 그 둥근 공을 사용하기에 때론 어디로 굴러갈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 내 상황도 그렇다.
회귀 직전의 나는 S급 스킬 5개만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간악하기 그지없는 요정의 흉계에 휘말려 S급 스킬을 빼앗기고 그 뒤로 스킬 수급이 힘들어서 그런 꼴이 되긴 했지만, 지금은 벌써 S급 스킬만 열 개다.
내 기록을 내가 깬 건 인정 안 해 주는 옹졸한 요정 놈 때문에 갈수록 S급 스킬의 수급이 힘들었는데, 작년 포스트 시즌 때 내 설계가 완전히 제대로 먹혀들면서 상황은 확 바뀌었다.
사실 그 뒤로는 요정도 좀 정신 놓고 포기한 거 같긴 하지만.
ㅡㅅㅡ: 크나큰 오해를 하고 있군.
ㅍㅅㅍ: 요정님은 언제나 작은 뇌를 가진 아기자기한 포수가 1인분을 하도록 온 힘을 다해 지원하고 있다.
뭐, 그래도 예전보단 열심히 하는 거 같으니 넘어가 준다.
어쨌든, 우리는 또 승리했고 나는 잘나간다.
“레드 빈! 사진 좀 같이 찍어 줘요!”
“사인 좀 해 줘요!”
“오늘은 큰 거 한 방 부탁해!”
항상 느끼는 거지만, 평일 낮 경기를 보러 오는 저 사람들은 직업이 있는 걸까.
어떤 광팬들은, 특히 아이를 데리고 오는 광팬들은 아침에 내가 구장으로 출근할 때를 노리곤 한다.
아무래도 이 시간에는 나도 여유가 조금 더 있기도 하고 아침 일찍 오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기에, 사진을 함께 찍고 꼬마가 가져 온 어린이용 배트나 유니폼에 사인을 해 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애를 앞세워 과격한 말을 할 때도 있지만, 오늘은 그런 사람이 없다.
두 명의 꼬마와 함께 사진을 찍어 주고 사인을 해 준 후에 세 번째 꼬마가 우물대며 내게 다가왔다.
“사진 찍어 줄까? 사인? 아니면 둘 다?”
“홈런 때려 주세요.”
“응? 홈런? 지금?”
뜬금없이 홈런을 때려 달라고 말한 이 꼬마는, 처음의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말과는 달리 밤새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내게 다다다다 쏘아붙였다.
“에슬레틱스 타자들은 어제 홈런을 많이 쳤잖아요. 근데 레드 빈은 못 쳤어요. 레드 빈이 에슬레틱스 타자들보다 더 좋은 선수잖아요? 오늘도 홈런 못 치고 에슬레틱스 타자들이 홈런 치면 레드 빈이 지는 거 맞죠?”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아니 뭐, 홈런이 분명 야구의 꽃인 건 맞지만 그게 또 홈런이 다는 아니라고…….
홈런이라는 게 꼭 치려 한다고 해서 나오는 건 아니고…….
하지만 동심을 깨는 건 좀 께름칙하지.
“좋아, 꼬마야. 이름이 뭐지?”
“바트에요.”
“Okay, 바트. 그래, 오늘은 꼭 홈런을 때리고 수훈 선수 인터뷰에서 네 이름을 불러 줄게. 약속할게.”
나는 씩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 꼬마는, 그런 동심 가득한 것보단 현실적인 꼬마였다.
손가락을 내밀긴 했지만.
“약속 안 지키면 천벌받는댔어요. 오늘 홈런 못 치면 레드 빈은 지옥에 갈 거예요.”
…….
세상 무서워서 살겠나.
야, 요정.
ㅇㅅㅇ: 왜.
ㅇㅅㅇ: 뭐.
지옥 안 가려면 오늘 홈런 꼭 쳐야 하니까 좋은 거 하나 내놔 봐.
ㅇㅅㅇ: 퉤.
협조 좀 하자.
ㅇㅅㅇ: 퉤퉤퉤.
[요정님이 당신에게 침을 뱉습니다!]쓸데없는 거로 이딴 메시지 띄우지 마라.
팍 씨, 그냥.
“좋아, 바트. 지옥에 안 가려면 지금 당장 들어가서 스윙 연습을 해야 할 것 같아. 나중에 보자.”
“좋아요. 약속 지켜요. Nut and nuts.”
바트는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음.
넛 앤 넛츠가 저렇게 음산하게 들릴 수도 있는 단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약속을 못 지키면 내 머리와 불알을 파괴해 버리겠다는 뜻 같은데?
2
“듣던 대로 끔찍한 애송이들이었어.”
“레드 빈이 셋 정도? 그런 건가?”
“글쎄. 저 꼬마보다 힘 좋은 놈 하나, 저놈보다 스윙 좋은 놈 하나, 저 꼬마 놈보다 볼 잘 고르는 놈 하나?”
“Holy shit. 그런 끔찍한 팀이 있단 말이야? 우린 이 친구 하나로도 벅찬데.”
“누군가를 욕할 땐 그 사람이 없는 데서 합시다.”
“욕 아니야.”
“칭찬이지.”
쇼와 개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동시에 대답했다.
아니 뭐, 나보다 힘 좋은 놈도 있고 공 잘 보는 놈도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리고 벨라티의 스윙은 정말 끝내주는 것도 사실이고.
“어제 저 꼬마가 거프에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랬는데?”
“자기가 다 방법이 있다고 자기만 믿으랬지.”
“그래?”
“그리고 거프는 3실점을 모두 홈런으로 했어.”
“오우.”
“이겼으니 됐죠.”
“거프의 기록지에 홈런 세 개가 추가됐지.”
“솔직히 말해도 돼요?”
“돼.”
“실투만 아니었으면 하나였을걸요. 그리고 그 하나는 진짜 어쩔 수 없었어요. 그걸 홈런 친 놈이 미친놈이지 누구도 잘못한 게 아니라고요.”
“젠장. 나쁜 놈. 역시 넌 악당이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흐흐. 근데, 쇼. 그거 알아?”
“뭘?”
“홈런 맞는 건 전적으로 투수 잘못이야.”
“젠장. 포수들은 다 이렇다니까.”
우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함께 웃었다.
사실 포수가 투수 탓을 하는 건 꽤 힘든 일이다.
투수들은 대체로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이고, 실투를 던져서 홈런을 맞아도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드물다.
하지만 쇼는 조금 다르니까.
“도루를 내주는 것도 투수 탓이죠.”
“암, 그렇지.”
“제기랄.”
“볼넷도 투수 탓이라고요.”
“이봐! 투수 누구 없어? 여기 포수들이 날 공격하고 있다고!”
쇼가 호들갑을 떨자, 근처를 지나가던 투수 하나가 우리의 회의실로 들어왔다.
“큭큭. 쇼, 든든하겠는데?”
“개빈, 이러면 우리가 지겠는데요?”
쇼에게 슬픈 일인지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든든한 지원군은…….
“무슨 일이에요?”
마운드에서 미친 공을 던져 대는 그 모습과는 달리, 긴 팔을 흐느적대며 들어온 짐이었다.
그리고 쇼는, 자기도 이 상황이 웃긴지 눈을 가리며 낄낄대더니 이렇게 말했다.
“큭큭. 짐, 아무 일도 아니야. 너라도 어서 이 지옥에서 떠나.”
3
메이저리그가 팀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를 앞선에 배치하기 시작한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1회가 시작되면 1, 2, 3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선다. 하지만 예전처럼 3, 4, 5번에 가장 강한 타자를 배치했다면, 4번이나 5번은 대기 타석에서 경기를 마감할 가능성이 크다.
사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
에슬레틱스의 세 타자가 모두 발이 지나치게 느린 관계로 뛰어난 선수가 1번부터 차례대로 나서지 않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1번부터 최고 타자가 나오면 그 압박감은 상당하다.
“스트라이크-아웃!”
쇼와는 경기 전부터 그 이야기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경기 시작 직후에 리드오프를 잡고 들어가자고.
물론 그게 반드시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성공했다.
어제도 그렇긴 했는데.
“헤이, 잘 잤어?”
“제기랄. 어제 스마트폰 진동을 끄는 걸 깜빡해서 평소보다 잠을 좀 설쳤어.”
“인기 많은가 보네.”
“어제 홈런을 쳤다고 너희 팬들이 SNS를 엉망으로 만들어 놨다고.”
일상다반사지 뭐.
굉장히 좋은 스윙을 하는 알버트 벨라티를 상대할 방법은, 허를 찌르는 볼 배합.
물론 위험성도 있지만, 에슬레틱스가 가지고 있을 데이터와 상반되는 투구다.
쇼는 초구 바깥쪽 낮은 패스트볼로 카운트를 잡고 들어가는 타입이지만, 이번에는 몸 쪽 싱커.
“파울!”
1스트라이크 노 볼에서 쇼는 공격적인 투구로 2번째 카운트를 잡는 걸 즐긴다.
그리고 카운트가 밀린 상황에서 벨라티는 밀어 치는 것을 좋아한다. 괜히 스프레이 히터가 있는 게 아니지.
몸 쪽 높은 코스 패스트볼. 존 안으로 들어오게.
“파울!”
좀 위험했다.
몇 미터만 옆으로 갔더라면 홈런이었을 거다.
그리고 투수의 카운트인 2스트라이크 노 볼에선 잔재주보다는 투수가 가장 잘하는 걸로. 보더 라인으로 꽂히는 슬라이더.
딱!
됐다.
“아웃!”
“빌어먹을!”
투수 정면으로 힘없이 굴러가는 땅볼.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공에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약간 억지로 당기다 보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
다음은 켈리 드레드먼.
출루의 황제라고까지 불릴 이 녀석 뒤에 있는 놈 때문에라도 꼭 잡아야 한다.
어제 그 홈런은 진짜 끔찍했으니까.
그리고 오늘 심판은, 존이 살짝 넓은 타입이다.
타격할 때는 좀 피곤하지만, 켈리 드레드먼처럼 자신만의 존을 좁혀 놓고 타격하는 타자를 상대할 때는 오히려 타자의 멘탈을 무너뜨리기 좋은 존이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아웃!”
아주 깔끔하게.
1구와 2구에는 배트도 내지 않다가 3구째 헛스윙 삼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대라 하더라도, 어제는 처음 상대해 보는 거였으니까.
“좋아! 어제보다 훨씬 나은데!”
“봤죠? 제 말대로잖아요. 이렇게만 해요.”
쇼와 가볍게 주먹을 맞부딪치며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오늘의 경기 전 전략 수립은 굉장히 성공적.
이제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홈런만 치면 되나?
4
홍빈의 경기 전략은 홍빈이 자평한 것처럼 꽤 성공적이었다.
볼카운트 하나하나에 상대가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모두 머릿속에 넣고 허를 찌르고, 심판의 존을 이용하고, 그리고 뺄 때는 어설프게 빼지 않고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빼 버리는 볼 배합.
“아웃!”
지난 경기에서 엄청난 파워를 확인했지만, 브렛 대거의 미친 공갈포 기질도 확인한 바.
데이터와 함께 한 번 겪어 본 상대를 철저히 분석해 낸 홍빈의 리드가 완전히 먹혀들었다.
1회부터 철저하게 쇼에게 틀어막힌 에슬레틱스와는 달리, 필리스는 조금씩 에슬레틱스 투수를 공략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안드레 헤수스] [좌투좌타, 선발투수] [키워드: 폭포수, 그라운드 볼러, 전천후, 홈 스위트 홈]2회 말 무사 만루 기회에서 병살타와 투수 타석 내야 플라이로 무득점에 그치긴 했지만, 불안한 모습을 보인 안드레 헤수스를 상대로 에이머 시나는 2루타를 치고 나갔다.
그리고 돌아온 홍빈 타석.
첫 타석에서 볼넷을 골라 나갔던 홍빈은, 여전히 자신과의 승부를 피하려 하는 상대 선발투수의 실투만을 노리고 있었다.
‘진 테프먼이 부담스러울 텐데…….’
홍빈을 피해 가면 진 테프먼이 언제든 적시타를 때려 낼 준비를 하고 있으니.
하지만 1루가 비어 있는 득점권 상황에서는 투수들이 홍빈을 피해 가기 나쁜 상황이 아니다.
물론 그러다가 후속 타자에게 맞은 투수가 한둘이 아니지만, 비교적 발이 느린 진 테프먼을 병살로 잡아낼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볼!”
1구 볼.
하지만 홍빈은 이번 타석에서 기회가 있으리라고 느꼈다.
어려운 승부라고 포장한, 피해 가는 승부를 펼치는 투수들은 볼을 하나 내줬다고 해서 아쉬워하지 않는다.
웃긴 일이라고 느꼈다.
다른 심판보다 비교적 넓은 존을 적용하는 이 심판에게서조차 볼을 선언받을 정도면, 상당히 빠졌다는 이야기인데.
어쩌면 포수의 프레이밍이 어설퍼서 그럴지도 모른다.
“투수가 너한테 짜증이 좀 난 거 같은데.”
“아니, 그는 내게 화를 내지 않아.”
“그럼 네가 화를 내. 당장 달려가서 엉덩이를 걷어차 버리라고.”
“젠장.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홍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타격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도 볼넷이야? 차라리 고의 사구를 하는 게 어때?”
투수가 투구 동작을 시작하자마자, 에이머는 3루로 뛰었다.
“볼!”
마침 투수는 낮게 떨어지는 커브를 던졌고, 포수는 튕기는 공을 온몸으로 받는 사이 에이머의 3루 무사 안착.
홍빈은 다소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무사 3루라면 볼넷이 나올 가능성이 더 커진다.
하지만 외야수들의 움직임이 보였다.
살짝 앞으로 나오려는 움직임.
어차피 주자가 3루에 있으니 타구의 깊이에 따라 홈에 길게 던져 승부할 생각이라고 판단한 홍빈은, 슬쩍 오른팔의 각도를 높였다.
공을 펜스로 보내기 위한 어퍼 스윙.
타자의 카운트인 2볼 노 스트라이크에서 패스트볼을 노리는 홍빈의 날카로운 움직임이, 마치 권총의 방아쇠처럼 당겨졌다.
따아악-!
투수는 어쩌면 차라리 볼넷을 내주는 게 나았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홍빈의 타구는 펜스를 넘어갔다.
브렛 대거의 거대한 포물선도, 알버트 벨라티의 총알 같은 타구도 아니었지만 펜스를 넘기는 효율적인 궤도와 속도.
에슬레틱스 선발투수 안드레 헤수스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곤, 시티즌스 뱅크 파크의 끔찍한 종소리와 필리스 팬들의 조롱 섞인 노래를 함께 듣고 있었다.
“자, 이제 누가 더 홈런을 잘 치지?”
“Nut and nuts!”
“여기선 레드 빈이 왕이라고! 사실, 너희 홈에서도 왕이 될 거지만!”
“Nut and nuts!”
“그가 네 불알 대신에 공을 때린 걸 다행으로 생각해!”
“Nut and nuts!”
“빈이 네 불알을 때렸다간, 넌 다시는 네 작고 사랑스러운 꼬마를 볼 수 없을 테니까!”
“Nut and nu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