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Plate's Villain RAW novel - Chapter (300)
홈플레이트의 빌런-301화(301/363)
# 301
레드 스트라이프 (6)
1
바니 앤그레이프가 시대를 지배하는 유일한 선수는 아니지만, 202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리그를 대표하는 선발투수 중 하나임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 자리를 근 10년 가까이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가 가진 최고의 가치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메이저리그 최고 명문 팀 중 하나고, 월드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된 적도 있었다.
이 가을에 강한 투수에게 또 다른 목표가 있다면 또 한 번의 우승.
카디널스는 분명히 강한 팀이고, 거의 매 시즌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거나 진출권을 노릴 수 있는 팀이긴 하지만, 이번 시즌 필리스의 모습은 분명히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흠…….’
내심 부러운 마음도 있었지만.
그는 이미 카디널스에서 4천만 달러 이상의 연봉을 받고 있는, 카디널스 유일의 고액 FA 계약자나 마찬가지.
올스타전 이후 홍빈과 호흡을 맞추는 것에 대해서는 꽤 흥미를 느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필리스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앵그리버드를 죽여 버려!”
“새대가리를 깨 버려!”
저런 끔찍한 놈들이 4만 명씩 들어차는 경기장에서 뛸 생각을 잠깐이라도 한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
비교적 얌전한 성향의 카디널스 팬들은 이곳이 홈 경기장인데도 저렇게 난동을 부리는 필리스 팬들에게 밀리고 있었다.
화력(?)이 부족한 카디널스 팬들을 원망하려는 것이 아니라, 늘 겪었던 일이긴 하지만 필리스 팬들의 지독함에 혀를 내두르고 있는 것이었다.
“흡!”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든 경기는 경기.
바니 앤그레이프는 힘차게 공을 던졌다.
오늘따라 타석에서 홈 가까이 바짝 붙는 필리스 타자 놈들을 떼 놓아야 했다.
퍽!
“히트 바이 피치 볼!”
하지만 곧, 오늘 경기의 작전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그런 스타일이 아닌, 필리스의 베테랑 타자인 진 테프먼마저도 몸 쪽으로 날아드는 공에 몸만 돌리며 팔꿈치를 들이대는 것을 보고.
“빌어먹을 개자식들…….”
카디널스 포수가 또 일어서서 고의로 맞은 거라고 주장했지만, 바니 앤그레이프는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며 이걸 잊으려고 노력했다.
필리스 타자들의 태도를 보고는 어차피 긴 하루가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겨우 판정 하나하나에 화를 냈다간 공을 던질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필-리-스-가-!”
“너흴!”
“지옥으로!”
“필-리-스-가-!”
“우릴!”
“천국으로!”
“필-리-스-가-!”
“너를!”
“죽일 것이다!”
품위 없이 지독하게도 반복되는 끔찍하게 못 부른 노래를 들으며, 앤그레이프는 다음 타자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팔꿈치를 피해 몸 쪽 낮게도 못 던지겠군.’
몸 쪽으로 던졌다간 풍성한 뱃살에 맞을 것만 같은 필리스 1루수를 본 앤그레이프는, 포수에게 바깥쪽 낮은 코스로 시작하자는 사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2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은 선수라면 누구나 하루 정도는 빛나는 날을 맞이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정말 그 확률이 낮은 선수라면 그런 날을 맞을 때까지 여기서 견딜 수 없을 가능성이 크지만.
하지만 골든 데니스가 짐을 두들겼던 그날처럼, 커리어 초반에 그런 날이 터지면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프는 일평생 한 번 그런 날을 맞이할 선수가 아니다. 특급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좀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범한 선수도 아니다.
성실한 이 투수는 언제든 그런 날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고, 오늘이 바로 그날인 것 같다.
[저빈 위스프] [우투우타, 2루수] [키워드: 밀어 치기, 장타, 호타준족, 전천후]딱!
2루타의 달인이자 올스타 2루수 저빈 위스프가 절묘하게 떨어지는 싱커의 윗부분을 때렸다.
날카롭게 밀어 치는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를 날리는 저빈 위스프지만, 이번 타구는 투수 앞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아웃!”
거프는 타구를 잡아서 깔끔하게 처리했고, 저빈 위스프는 답답하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곤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케스퍼 텐브루] [좌투좌타, 좌익수] [키워드: 호타준족, 인내심, 스프레이 히터]“헬로, 캐스터네츠 콜드브루.”
“좋아. 네가 할 말을 맞춰 보지.”
“해 봐.”
“저빈 위스프가 내 마누라가 바람났다고 말해 줬다고 할 거야?”
“흠. 아니.”
“그럼 헥터가 나한테 발 냄새가 난다고 했어?”
“그것도 아닌데.”
“Oh, 알았다. 혹시 맥이 그랬어? 내 수비력이 똥 같아서 정말…….”
“그냥 불러 본 거야. 와서 땅볼이나 하나 쳐.”
“Okay.”
여전히 맥없는 놈이다.
우리 팀은 래키 할아버지 때문에 몽땅 불타고 있고, 카디널스 선수들은 우리의 그런 태도 때문에 당황하거나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하는 편이다.
하지만 케스퍼 텐브루는 예전에도 그랬듯, 팀보다는 자기 자신만을 우선시하는 타입이다.
불타고 있을 때 가장 조심해야 할 놈은 이런 놈이다.
냉정하거나 같이 불타는 놈이 아니라 그런 것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는 놈.
이런 놈한테는…….
“볼!”
필리스의 초구가 제격이지.
텐브루는 놀란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있잖아.”
“왜.”
“한 발짝 뒤로 갈게.”
“두 발짝 가.”
“그럼 바깥쪽 공을 건드리지도 못하잖아.”
“건드리지 마.”
“젠장.”
텐브루는 타석에 들어서서 두 번 뒤로 움찔거리며 물러났지만, 그건 반 발짝도 안 되는 거리였다.
웃긴 놈이라니까.
딱!
그런데 뒤로 물러선 것 때문인지 땅볼 타구에 스핀이 묘하게 먹혀서 에이머의 다이빙 캐치를 피해 갔다.
나는 거프에게 견제구를 던지라고 사인을 보냈고, 케스퍼 텐브루는 양팔을 들어 항복을 표하며 1루 베이스 위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두 발을 모두 베이스 위에 올리고.
주머가 그런 텐브루를 이상하게 쳐다봤고, 텐브루는 턱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놈 때문에 긴장감 떨어지게 생겼네.
딱!
“아웃!”
“아웃!”
거프가 집요하게 바깥쪽 낮은 코스 싱커를 던져 병살타를 유도해 이닝을 끝낸 후, 주머가 내게 다가와서 물었다.
“대체 뭐라고 했길래 저 녀석이 1루 베이스에 얌전히 서 있는 거야?”
케스퍼 텐브루는 도루를 한 시즌에 20개 정도는 할 수 있는 선수다.
하지만 평소보다 훨씬 얌전히 있었으니…….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흠.”
주머의 표정이 묘해진다. 내가 뭐 협박이라도 한 거라고 의심이라도 하는 건가 지금?
( ಠωಠ): 착한 의심…….
뭐?
( ಠωಠ): 충분히 합리적 의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
3
“그거 알아? 어제 그 할아버지, 브루스 윌리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필리스 팬이었대.”
“What?”
“잘 들어. 그건 그 할아버지가 20세가 되기 전에 필리스의 첫 우승을 봤고, 그다음 우승을 본 것은 아들이 결혼할 때쯤이었다는 말이지.”
“Oh.”
“그리고 작년엔 몸이 안 좋아서 제대로 야구를 못 봤대.”
“Holy shit.”
“그러니까 올해 래키 할아버지에게 우승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 주자고.“
“Hell yeah!”
“그 전에 오늘 이 경기에서 이기는 모습을 보여 줘야지!”
“Hell the fucking ya!”
“좋아! 가자!”
“죽여 버리러!”
“래키 할아버지를 위해!”
“Whooooo!”
가끔 보면, 이 사람들은 정말 단순하다 싶다.
하지만 이 단순함이 싫지는 않다.
클리닝 타임 때 둥글게 모여서 열의를 불태우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괜히 나도 뭉클하는 느낌이다.
“그를 월드시리즈에 초청해서 우승 트로피에 키스할 기회를 주는 게 어때요?”
여전히 다들 의욕이 넘치는 가운데 내가 한마디 하자, 다들 소리를 지르다가 날 바라보았다.
“Oh, 꼬마.”
“좋은 아이디어야.”
“무조건 그래야 할 거야.”
“우승에 실패하면 할아버지가 혈압 때문에 쓰러질지도 모를걸.”
“반드시 우승해야지.”
“좋아. 내 홈런으로 우승을 확정 짓고, 그 트로피를 그에게 가지고 가면 정말 멋지겠지.”
곧 소란스러워졌지만, 뭐라도 동기를 부여해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절대 나쁠 일은 없다.
클리닝 타임이 끝나 갈 때까지 각자 떠들던 선수들은 경기가 재개되자마자 집중력을 되찾았다.
“아웃!”
홀든은 미끄러지듯이 타구를 잡아챘고.
“아웃!”
라이언은 강습 타구를 잡고 흙바닥에 두 바퀴 구른 후 공을 번쩍 들어 보였다.
거프는 어느 상황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언터처블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준 거프의 싱커는 무지막지하게 범타를 유도해 냈다.
거프의 오늘 성적은 9이닝 3피안타 3사사구 5K 무실점. 완봉 승을 거둔 것치고는 삼진 개수가 좀 적긴 했지만, 그만큼 효율적으로 카디널스의 강타선을 틀어막아 버렸다는 것을 뜻한다.
몸값이 30배 가까이 차이 나는 바니 앤그레이프가 6이닝 5실점을 하고 내려간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언더독의 반란이라 할 수 있었다.
거프는 완봉 승을 완성하는 마지막 땅볼을 조니 프랭크에게 끌어낸 후, 필리스 팬들을 향해 손 키스를 날렸다.
카디널스 감독은 경기가 끝난 후 필리스 타자들이 몸 쪽으로 오는 공을 피하지 않았는데, 심판이 히트 바이 피치볼을 선언해서 바니 앤그레이프가 흔들렸다고 투덜댔다.
[거프 로저스, ‘이 완봉 승을 우리의 팬, 래키에게 바친다. 그는 1950년대부터 필리스를 응원해 왔고, 필리스는 승리로 그의 응원에 보답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그리고 거프의 이 인터뷰는 카디널스 감독을 굉장히 옹졸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필리스 팬들은 카디널스 감독이 SNS를 닫게 만들었고, 로드니를 통해 전달된 내 아이디어는 발 빠르게 움직인 필리스 홍보팀에 의해 기사화되었다.
[부시 스타디움을 찾아 선수들과 만난 필리스 광팬 조지프 래키(1947년생), 필리스의 올 시즌 전 포스트시즌 티켓 무료로 제공 받기로.] [필리스 선수단, 조지프 래키를 위해 부시 스타디움에서 승리를 쟁취하겠다고 결의.]야구는 길고 때론 이겨야겠다는 마음가짐을 살짝 잃어버릴 수도 있다.
래키 할아버지는 눈물까지 흘리며 우리에게 고맙다고 말했지만, 아주 잠깐 강력함을 잃어버렸던 우리 팀에게는 오히려 그의 행동이 큰 선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
내가 연일 활약하며 70홈런을 달성하자 한국에서는 아주 난리가 났다는데…….
“아들 덕분에 어딜 돌아다니질 못해.”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기분은 굉장히 좋아 보이셨다.
심지어 부모님은 예능이나 뉴스, 아침 TV 프로그램에도 몇 번 출연하셨다.
아버지야 뭐 그런 걸 되게 좋아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어머니까지 그런 걸 즐기실 줄이야.
“아들아.”
“예, 아버지. 요새 연예인 다 되셨다면서요?”
“크흐흐.”
“…….”
“흠.”
“좋아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미국 언제 오실래요? 포스트시즌 미국에서 보셔야죠.”
“…그래. 가야지.”
“갑자기 목소리가 왜 그러세요?”
“…….”
“…….”
“자이언츠가… 가을 야구…….”
“자이언츠가 가을 야구를요?”
“…이미 글렀으니 갈 수 있겠구나.”
아하.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매일 6시 30분만 되면 자이언츠 야구를 보시겠다고 TV를 트셨고, 거의 항상 야구를 보시다가 화를 내며 끄신 후, 누워서 멍하게 계시다가 다시 TV를 틀고 끄고를 반복하셨다.
“언젠간 자이언츠도 우승할 수 있을 거예요. 뭐… 언젠가는요.
“…흠. 너희 팀 응원하는 할아버지를 봤다.”
“아, 그분…….”
“어쩌면 나도 한 4~50년 뒤에 자이언츠를 응원하는 노인 팬으로 그렇게 TV에 나올지도…….”
“아버지…….”
아버지는 어쩌면 래키 할아버지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보셨을지도.
음…….
잘 좀 하지. 나 하나 없다고 그 꼴이 나는 게 말이 돼?
나 없이도 KBO 연봉 총액 1위 팀인데 거참.
어쨌든 자이언츠와는 별개로, 우리는 다음 날도 카디널스를 꺾고 오랜만에 필라델피아로 돌아왔다.
“아쉽지만, 꼬마. 아리는 친구들과 여행을 떠났어. 3일 뒤에나 돌아오지.”
개빈은 괜히 내게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딸 가진 아버지는 다 그런가?
“어쩔 수 없죠.”
나는 웃으며 그렇게 말한 뒤, 내 집으로 돌아오면서 팀의 젊은 선수들에게 메시지를 돌렸다.
-한동안 혼자 있을 거니까 경기 끝나면 날 찾지 마.
몇몇 녀석들에게 억울하다는 듯한 답장이 왔지만, 내 알 바 아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집에 도착하자, 아리가 날 반겨 줬다.
“자기! 고생 많았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를걸?”
뭐…….
개빈.
미안해요.
“내가 더 보고 싶었어!”
“꺅!”
나는 한쪽 팔로 아리를 어깨에 둘러멘 후 간드러지게 웃는 아리를…….
(¬‿¬): …ㅎㅎ.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