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Plate's Villain RAW novel - Chapter (54)
홈플레이트의 빌런-55화(55/363)
# 55
Big 고추, 작은 고추 (2)
1
조금 더 노력하라는 말의 당위성 문제를 떠나서, 지금보다 더 이를 악물 필요는 있다.
나는 지금 야구를 즐기고 있나?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내게 야구를 즐길 여유가 있나?
이 질문에 대한 답도 굉장히 애매하다. 즐기면서 잘하는 게 최고지만, 마냥 즐기기엔 내 처지가 그리 좋지 못하다.
내 야구에는 나 자신만 달린 것이 아니다.
돈도 좋다. 수백만, 수천만, 수억 달러. 싫어할 사람이 있을 리가 있나. 그게 싫었다면 파워볼 번호를 외우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내게 야구는 그저 돈이 아니다. 그저 자아실현을 위한 수단도 아니다. 내가 유일하게 잘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단지 내가 이걸 할 수 있기에 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야구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게 내 야구의 모든 이유는 아니다.
실패하면 부모님을 잃는다. 아마 나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고백하자면, 크고 높은 목표와 새로운 무대에서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변명으로 회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3천 안타? 메이저리그 역사상 단 36명에게만 허락된 성역(聖域)이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는 보증수표나 마찬가지다.
KBO에서도 3천 개 치려고 그 고생을 했는데, 메이저리그에서 그걸 하려면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게다가 3천 안타를 친 36명의 명단에 포수는 단 한 명도 없다. 크레이그 비지오는 포수로 시작했지만 2루수로 전향했고, 메이저리그에서 이름을 날린 풀타임 포수 중 그 누구도 하지 못한 게 3천 안타다.
마이크 피아자? 2,127개다. 이반 로드리게스? 2,844개다.
홈런 맞았다고, 입 벌린 채 타구나 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안타 3,000개는 스킬 팩이랑 스킬 레벨업권 몇 개로 해결될 일이 아니지만, 그런 걸 악착같이 모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높여야 하니까.
“스티븐. 몸 쪽 공 던질 수 있겠어?”
“뭐… 물론이지. 필요하다면.”
다행인 건 홈런을 맞은 이후에도 기죽지 않고 던져서 이닝을 종료하긴 했다. 겁먹고 기죽어서 볼만 난사하는 투수보다야 훨씬 낫다.
점수를 내주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근성’ 키워드를 가진 게 다행인 부분이다.
하지만 홈런을 때려 낸 대븐포트를 상대로, 다음번에 얼마나 잘 던질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일단, 해 보자.
2
타자와의 직접 대결에는 내 능력이나 노력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 나는 투수가 아니라 포수다. 내가 요구한다고 해서 투수가 완벽하게 던질 수 있다는 보장 따위는 없다.
흔히 대븐포트의 약점은 바깥쪽 변화구로 알려져 있다. 사실 나도 경기 전에 그 부분에 집중했었다.
하지만 불현 듯, 대븐포트가 자신의 소포모어 징크스가 몸 쪽 공 때문이었다고 밝혔던 것이 떠올랐다.
“맞혀도 좋다는 각오로 던질 수 있겠어?”
“대븐포트의 약점이 몸 쪽이란 이야기야?”
맞다.
몸 쪽 공에 지나치게 신경 쓴 나머지, 홈 플레이트 가까이 붙지 않고 몸 쪽 패스트볼을 치려 하다 보니 바깥쪽 변화구에 약점을 드러낸 거라고 했었지. 아직은 제대로 분석되지 않은 것뿐이다. 시즌 막판에 페이스가 줄어드는 것도 분석이 시작되어서다.
“내가 보기엔 그래. 스카우팅 리포트에는 바깥쪽이라고 되어 있지만, 몸 쪽을 제대로 공략할 수만 있다면 넌 다시는 대븐포트에게 홈런을 안 줄 수 있을 거야. 그의 천적이 되는 거지.”
당연히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제대로만 된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스티븐이 선호하는 코스이기도 하니까, 주눅 들지만 않는다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거다.
“음…….”
스티븐은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스카우팅 리포트를 믿을 것인가, 내 말을 믿을 것인가.
어차피, 어떤 공을 던지겠다는 최종 결정은 투수의 몫이다.
“좋아, 일단 널 믿어 보지. 작전이 뭐야?”
그 약점, 어떻게 하면 제대로 후벼 팔 수 있을까.
나도 확실히는 모른다. 모험을 걸어 보는 수밖에.
“다음 타석에 대븐포트가 들어오면, 세 번까지는 몸 쪽에 바짝 붙여. 볼이 되어도 상관없으니까. 맞혀도 좋다는 생각으로.”
“OK.”
스티븐은 대범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저리그는 정말 미묘한 곳이다. 이런 멘탈을 가진 투수가 롱런하지 못하다니.
어쨌든, 경기는 지속됐다.
나는 안타를 치고 도루를 성공했다.
앤드류의 타구에 미친 듯이 내달려 홈을 밟았고, 끝내기 득점이라도 올린 것처럼 더그아웃으로 돌아와 소리 질렀다.
다른 선수들이, 에이스가 부상으로 실려 갔다고 경기를 포기하지 않게 만들기 위한 액션이었다.
그리고 대븐포트가 2번째 타석에 들어선 4회 말 투 아웃 상황.
퍽!
“읍!”
“히트 바이 피치 볼!”
스티븐의 97마일 패스트볼이 대븐포트의 옆구리에 꽂혔다.
몸에 맞히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물론 맞혀도 좋다는 생각으로 던지라고 하긴 했지만, 제구가 잘 안 따라 줬을 뿐이다.
“젠장.”
대븐포트도 그걸 알기 때문인지, 나를 힐끗 바라보고는 이를 악물고 1루로 나갔다.
그리고 대븐포트의 세 번째 타석이 돌아왔을 때, 그는 평소보다 더 먼 곳에 자리를 잡고 섰다.
3
“스티븐 파코, 갑작스레 투입되긴 했지만 아주 잘 던지고 있습니다. 타석에는 그를 상대로 홈런을 쳐 낸 폴 대븐포트가 들어서는군요. 불펜에는 우완 투수인 히스 로건과 스캇 케이슬러가 몸을 풀고 있습니다. 교체될지도 모르겠군요.”
우타자인 폴 대븐포트를 상대로 투수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필리스의 맥마나만 감독은 스티븐 파코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홍빈이 투수 코치에게, 스티븐이 대븐포트를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이야기했던 것 때문이기도 했다.
어린 나이는 한 달 전의 홍빈에게는 큰 장벽이었지만, 더 이상은 아무도 그렇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같은 기간 동안 홍빈보다 뛰어난 활약을 펼친 포수가 얼마나 된다고. 홍빈은 이미 코칭스태프들에게 신뢰를 사고 있었다.
“그대로 가는군요. 대븐포트는 홈런 하나와 사구(死球)하나를 기록하고 있지만, 홍은 1안타 1도루에 1득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론은 두 선수를 라이벌로 지칭하고 있으며, 두 선수 모두 훌륭한 플레이를 보여 주고 있죠. 물론 홈런을 친 대븐포트가 오늘은 조금 더 점수를 받고 있지 않나 봅니다만… 볼! 몸 쪽 가까이 95마일 패스트볼이 파고듭니다. 깜짝 놀라는 대븐포트.”
불나방 키워드를 가진 투수라 그런지 스티븐의 구속과 구위는 예상보다 더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대븐포트는 초구 볼에 기뻐하기는커녕, 몸 쪽 공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직전 타석에서 몸에 맞은 것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군요. 자이언츠 팬들이 투수에게 야유를 퍼붓습니다.”
필리스 팬들은 타격을 못하는 타자에게, 차라리 맞아서라도 나가라고 윽박지르곤 한다.
하지만 상대 투수가 그 타자를 정말로 맞히면, 투수를 죽여 버릴 듯이 야유한다.
하물며 필리스 팬들도 그럴진대, 자이언츠 팬들이 금지옥엽으로 여기는 대븐포트라면 어느 정도겠는가.
한 번 맞혔는데도 또 몸 쪽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투수에게 야유를 쏟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구, 볼! 몸 쪽 높은 코스! 대븐포트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집니다!”
“어쩌면 지난 타석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가 디백스전에서 팔꿈치에 사구를 맞고 난 후, 15타수 연속 무안타에 그친 것이 기억나는군요. 그가 나약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95마일이 넘는 속구를 맞으면 공포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긴 하죠.”
“이겨 내야 합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선수예요. 이런 약점을 보이면 모든 구단이 그에게 이런 식으로 접근할 겁니다!”
4
“만약 나라면 당장 일어나서 저 야유를 멈추라고 말할 거다. 엄살은 그만둬. 솔직히, 맞을 공도 아니었잖아?”
그를 경멸하지 않는다.
하지만, 경멸하는 것처럼 말했다.
“Mother fu…….”
대븐포트는 손을 부르르 떨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하려는 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나는 말을 끊으며 마스크를 바로 썼다.
“Mother? 엄마가 보고 싶으면 감독한테 교체해 달라고 해. 그게 아니라면 당장 타석으로 돌아와.”
그러자 이를 악물고, 하던 말을 그만둔 대븐포트가 타석으로 돌아왔다.
뭔가 이유 없이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다. 너무 진지해졌었나? 너무 어렵게 생각했었나?
그도 대단한 선수지만, 나도 그의 라이벌 소리를 듣고 있지 않나.
야구. 즐기면 되잖아? 즐기면서 잘하면 되는 거지. 즐기는 것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있나?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분노하면서 야구한다고 해서 더 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걸 이용할 수 있다면, 상대방에게 내가 분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 된다.
‘이번엔 존 아래로 떨어지는 커브.’
존 아래?
솔직히, 웃기는 소리다.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붓고 방전되어 버린 스티븐의 제구는 엉망이다.
1구째에 위협적인 공을 던진 것도, 사실 사인보다 몸에 더 붙은 거였다. 그리고 2구째에는 대븐포트가 뒤로 더 물러섰기에 바깥쪽으로 공을 요구했다.
그런데 머리 근처로 날아간 것뿐이다. 완전 정반대로 던져 버린 거지.
“스트라이크!”
그리고 3구째,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앞에서 바운드된 커브볼에 대븐포트의 헛스윙이 나왔다.
스티븐의 제구 난조로 인해 만들어진 상황이지만, 그의 타격 밸런스가 무너지기 직전이다.
“스트라이크!”
이번에도 얼토당토않은 볼에 헛스윙.
대븐포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다는 듯,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도박 한번 걸어 봐?
어이없는 공에 두 번 연속으로 헛스윙이 나왔다.
그러고는 마치 자기는 겁을 먹은 게 아니라고 시위라도 하듯, 홈 플레이트에 가장 가까운 곳에 섰다. 긴장된 표정으로.
지쳐 버린 스티븐이 존 안으로 공을 꽂아 넣을 수 있을까.
그리고 머릿속이 복잡해진 대븐포트는 이번 공에 배트를 낼 것인가.
세상에 확실한 것은 없다.
나는 스티븐에게 낮게 던지되 무조건 존 안으로 공을 넣으라고 주문했다.
4개의 공이 연속으로 존 밖으로 갔다.
대븐포트는 복잡한 머릿속을 다스리며, 공 하나를 지켜보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는 타격 실력에 비해 선구안은 덜 여물었다.
이건 도박이다.
만약 스티븐의 제구가 영 좋지 못하고 대븐포트가 이걸 그대로 넘겨 버린다면, 요정 미션을 실패할지도 모른다.
스티븐이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닦고 천천히 와인드업했다.
‘제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은 감각.
명확하게 공의 궤적이 보였다.
하필이면, 존 중앙으로 공이 날아온다. 실투다. 분명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순간적으로 머리에 번득하고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간다.
‘1초 무적, 왼손.’
충격에 대비하면서, 배트가 나올 위치로 왼손을 쭉 내밀었다. 배트에 손이 맞겠지만, 그에게 공을 제대로 맞을 바에는 차라리 타격 방해로 1루로 내보낼 생각이다.
“스트라이크-아웃!”
하지만 대븐포트는 뻣뻣하게 굳은 자세 그대로 배터 박스에 서 있었고, 마치 배팅 볼같이 날아온 공에 스윙도 하지 못하고 루킹 삼진을 당했다.
“Yeah!”
나도 모르게 미트에 들어간 공을 잡아 빼며 소리 질렀다.
5
[필라델피아 필리스 5 : 3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최고 포수 유망주 맞대결! 폴 대븐포트 1홈런 1사구, 홍빈 2안타 2도루 2득점.] [필리스 에이스 쇼 부상 경미, 깜짝 호투를 보여 주며 승리투수가 된 스티븐 파코.] [득점을 올리고 더그아웃에서 팀 사기를 끌어올리는 홍빈.] [두 번의 도루를 모두 막아 낸 홍빈, 홍빈에게만 두 번의 도루를 내준 폴 대븐포트.] [파워를 보여 준 D-Port,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을 보여 준 Red bean.]┕이건 레드 빈의 승리지.
┕폴은 홈런을 쳤어. 헛소리 그만해.
┕홈런 치고 난 뒤에 그가 뭘 했는데? 타석에서 피겨스케이팅을 한 거? 예술 점수 최고점을 받았나?
┕비열한 놈들. 빈볼을 던지고 어떻게 그렇게 당당한 거지?
┕그게 빈볼로 보여? 그랬으면 마운드로 달려갔어야지.
┕그래. 그랬으면 레드 빈이 대븐포트를 펜스 밖으로 날려 버렸을 텐데.
┕빈은 스윙 스피드도 훌륭하지만, 펀치 스피드는 완벽하다고.
┕미친놈들아. 이건 야구지 종합 격투기가 아니야.
┕닥치고 꺼져. 진 놈들이 뭐 이렇게 말이 많아?
┕폴이 너희 아시안보다 덩치가 커. 폴이 질 리가 없지.
┕악당은 결국 슈퍼히어로에게 응징되기 마련이야. 내일은 폴이 너희 악당에게 정의의 철퇴를 내릴 거다.
┕저기,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레드 빈이 너희 말대로 빌런이라면 대븐포트는 빌런에게 처맞는 엑스트라에 불과해.
┕맞아. 그가 빌런이라면 그냥 빌런이 아니라고. 슈퍼 빌런 정도면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