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Plate's Villain RAW novel - Chapter (67)
홈플레이트의 빌런-68화(68/363)
# 68
갓 혹은 갓댐 (1)
1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 있는 수준의 선수라면, 누구나 경기 전에 무언가 계획이 있기 마련이다.
솔직히 재능만으로 가득 찬 선수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배트를 휘둘러서 담장을 넘길 거야’ 혹은 ‘오른손으로 공을 던져서 삼진을 잡을 거야’ 같은 어처구니없는 생각으로 가득한 경기 계획을 가진 선수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포수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경기 전체를 손에 쥐고 흔들 계획을 가지고, 경기에 임하기 마련이다.
상대 팀과 우리 팀의 투수(선발 및 불펜 모두)를 분석하고, 상대 타자의 타격 실력과 우리 수비수들의 수비 실력을 모두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한다.
공격은 포수로서가 아니라 타자로서 접근하는 거고.
어쨌든, 여러 가지 계획 속에 상대 타자의 집중력을 헤집어 놓고, 상대 포수의 평정심을 무너뜨리는 것도 들어가 있다.
트래시 토킹이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상대 선수의 성향을 파악해 아주 조금의 틈을 만들어 보려는 발버둥일 뿐이다.
그런데 종종 이게 엄청나게 잘 먹히는 친구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얘?
“자, 다음 번호 알려 줄게. 메모할 준비 됐어? 17.”
“Shut up. Mother fucker.”
뭔 말만 하면 욕부터 튀어나오는데, 재밌지 않나?
도발 후에 정석처럼 날아오는 몸 쪽 높은 공은 위협적이지만, 존 안으로 들어오는 몸 쪽 높은 공은 대비만 되어 있다면 충분히 대처 가능하다.
그러다가 존 밖으로 벗어나면 볼이 쌓인다.
그리고 볼이 2~3개 쌓이면 존 안으로 울며 겨자 먹기로 패스트볼을 넣어야 한다.
투수와 포수가 신뢰 관계에 놓여 있다면, 투수는 얼마든지 포수를 위해 위협적인 공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카운트마다 포수가 그걸 요구하면 조금 곤란해질 수도 있다.
상호 신뢰의 문제이고 서로를 배려해 주는 차원이지, 누구 하나의 욕심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브루어스의 포수인 피오 고슬랭에게 파워볼 당첨 번호 세 개를 가르쳐 줬고, 네 번째 타석에서는 번호를 가르쳐 주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내일 나머지를 가르쳐 줄게.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잘하면 그 다음 기회를 잡을 수도 있겠지.”
하긴, 나 같아도 안 믿긴 하겠다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게 볼만하긴 했다.
경기가 우리의 승리로 끝난 후, 피오 고슬랭의 SNS가 꽤 뜨거워졌다.
역시 SNS는 인생의 낭비다. 확실하다.
2
@Fio_MIL_No45
-Motherfucker.
@Fio_MIL_No45
-Fuck you!!!!!!!!
@NOAMBELLFORT
-헤이, 피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Fio_MIL_No45
-내일 그 자식을 죽여 버릴 거야. 반드시 죽여 버릴 거라고, 노엄.
@NOAMBELLFORT
-누구를 말하는 거야 아까부터?
@Fio_MIL_No45
-I’m talking about goddamn Korean.
@NOAMBELLFORT
-메이저리그 팬 여러분. 피오가 온라인 게임에서 한국인한테 20연패를 당해서 그래요. 다들 한국인한테 많이 져 봤잖아요? 이해해 줘요. 😀
3
재밌는 일은 별거 아닌 것에서 시작한다.
어제 경기에서 결장했던 브루어스의 중견수인 노엄 벨포트가 헛소리를 하며 저걸 진화하려 했지만, 사건은 꽤 커져 버렸다.
사실 경기 도중에 우리가 입씨름을 하는 게 방송을 타기도 했었으니까.
ㅇㅅㅇ : 흠.
ㅇㅅㅇ : 사람들은 피오란 포수를 욕하는군.
ㅍㅅㅍ : 분명 네 녀석이 시비를 걸었을 텐데.
맞다. 대외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내가 피오 고슬랭에게 지속적으로 시비를 걸었다.
아니,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긴 했는데.
[MIL 포수 피오 고슬랭, PHI 포수 홍빈에게 SNS로 욕설?] [인종차별적 제스처? 밀워키 감독, ‘피오는 그런 선수가 아니다.’] [초구 홈런, 루키, 아시아인, 팀 성적. 과연 이날 경기에서 무슨 일이?] [고슬랭의 팀 동료 벨포트, ‘온라인 게임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수습 나서.]┕게임에서 코리안에게 당했으면 그럴 수도 있어.
┕그래서 그게 무슨 게임인지 왜 말 안 하는 건데?
┕맞아. 그냥 개소리일 뿐이지. 갓댐 코리안이란 건 홍을 가리키는 거야.
┕홍을 죽이겠다고? 필라델피아 경찰은 오늘 시티즌스 뱅크 파크에 총기 반입을 막아야 할걸.
┕벌집이 되고 싶냐, 고슬랭? 감히 누굴 죽인다고?
┕하지만 온라인 게임에서 한국인들은 정말로 지독하다고.
하여튼 일이 조금은 커졌다.
한국 네티즌들은 고슬랭의 그 SNS 캡처를 퍼 나르며 즐거워하고 있다. 일부 네티즌들은 심각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인종차별이나 국가 모독 같은 그런 이야기로.
하지만 어제 경기 영상을 보면, 내가 고슬랭에게 말을 걸고 피식대며 웃는 장면이 꽤 있어서, 일부에 불과하지만 내가 그를 약 올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자연스레(?) 내 별명은 갓댐 코리안이 되었다. 거참 별명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일세.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로즐이 다가와서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빈, 싸움이 벌어지면 내가 없다고 해서 서운해하지 마. 내일 선발이라서 못 나가.”
“안 싸울 거야.”
“정말이야?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이 내기까지 하고 있는데?”
난 정말로, 진심으로 그와 주먹다짐할 생각이 없다.
물론 걸어오면야 받아 주겠지만.
괜히 퇴장당하기라도 하면 기록 세우는 데 방해가 되잖아. 게다가 출장 정지당하고 감이라도 떨어지면 안 되니까.
“무슨 내기?”
로즐은 클럽 하우스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너흴 떼 놓으러 홈 플레이트로 뛰어갈 때까지 네가 그를 몇 대 때릴 수 있나. 참고로 네가 맞고 있을 거라는 데 건 사람도 있어. 한 명.”
뭐?
50경기를 채울 때까지 사고를 칠 생각은 없지만, 내가 맞을 거라는 데 돈을 건 사람이 있다고?
“…그게 누구야?”
“그건 말해 줄 수 없어. 난 네가 동료와 서먹해지는 걸 원하지 않아.”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굳이 와서 이간질하는 놈이 누군데?
이 황당한 필리스 스타일들 좀 보소.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필리스 스피릿을 마구 뿜어내는 필리스맨들이 환호하며 날 맞이해 주었다.
“빈! 이리와! 한 번에 세 방 때리는 법을 알려 줄게!”
“Wheeek! 챔피언이 왔다!”
“인종차별주의자를 다 함께 묵사발로!”
“Go on! Do it!”
아무래도 이 양반들, 오늘 싸움이 나리라는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는 분위기다.
한참이나 후에야 겨우 분위기가 진정됐고, 내가 발언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됐다.
“혹시 안 싸운다에 건 사람 없어요?”
“…….”
언제 떠들었냐는 듯 일동 침묵. 진심으로?
“헤이, 짐. 넌 어디 걸었어?”
내가 질문하자 잠시 눈을 돌린 짐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자리를 떴다. 어디가냐, 이 새…….
“큭큭. 짐은 네가 맞는다에 걸었어.”
범인이 저놈이었구나.
“좋아요. 나는 내가 싸우지 않는다는 것에 천 달러 걸죠. 누구 여기에 베팅 하실 분?”
“…….”
제기랄.
4
안 싸운다, 안 싸운다.
나는 오늘부터 비폭력 평화주의자다. 50경기를 다 채울 때까지 나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다. 나는 결코 남들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며, 싸움의 빌미도 제공하지 않을 테고, 누가 시비를 걸어도 웃고 넘길 것이다.
홈런 네 개를 칠 시간이 일곱 경기밖에 남지 않았다고. 타격을 하기 위해 피오 고슬랭에게 걸어가는 이 시간이 괜히 길게 느껴진다.
심호흡하자. 자, 그냥 입 다물고 경기하면 되는 거다. 어려운 거 아니잖아? 홍빈, 너 그렇게까지 나쁜 놈 아니잖아?
“오, 이게 누구야. 양육비 필요하신 분 아니신가. 자, 4번째 번호는 37이야.”
뭐?
미친. 입이 왜 자기 맘대로 내뱉는 거지?
“죽여 버리겠어.”
“젠장. 지금 죽이면 파워볼 번호를 다 못 들을 텐데? 그러지 마. 그 돈이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
…….
음.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고, 나란 놈은 욕을 먹고 살아야 하는 놈인가.
착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고슬랭이 더 화를 내기 전에, 심판이 우리를 제지했다.
“둘 다 그만. 경기에 집중해. 강조하겠는데, 오늘 자네 둘이 주먹질을 해선 안 될 거야.”
“물론이죠, 미스터 세스.”
“…….”
“젠장, 고슬랭. 어제 거스리한테 들었어. 너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건 그냥 인터넷과 미디어가 만들어 낸 콜로세움일 뿐이야. 어제 일은 여기서 언제나 벌어지는 일일 뿐이고, 나는 자네 둘과 내가 미디어의 어릿광대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아.”
“…알아요, 안다고요. 젠장.”
일이 커진 것뿐이라는 것도 맞고, 언제나 야구장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도 맞는 말이다.
내가 퇴장만 당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다.
보아하니 고슬랭도 SNS에서 감정이 격해져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지, 시작부터 싸우려는 마음은 없어 보인다.
이제 잠시 접어 두고 경기에 집중하자.
타구를 펜스 너머로 날려 보내는 것만 신경 쓰면 되는 거다.
“자, 이제 공이 어디로 올지 알려 줘.”
제발 그만둬, 입아.
부탁이니 습관적으로 싸움을 걸지 말아 달라고.
5
9회 초, 필리스가 6 대 4로 브루어스에 앞서고 있는 상황.
홍빈은 오늘 경기에서 홈런을 때려 내지 못했다.
홈런이 어디 마음먹는다고 매일 때려 낼 수 있던가.
만약 그랬다면 40홈런을 쳐도 똑딱이 취급을 받을 것이다.
어쨌든, 필리스 마무리인 그레이 밴델튼은 2아웃을 잘 잡아 놓고, 안타와 볼넷으로 동점 주자까지 내보내고 말았다.
마지막 타자 하나로 경기의 결과가 뒤바뀔 수 있는 상황.
평소라면 크게 위협적이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평소보다 훨씬 좋은 실력을 발휘하는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피오 고슬랭.] [우투우타, 포수.] [키워드 : 당겨 치기, 공갈포, 불펜 킬러, 굿바이.] [그레이 밴델튼.] [우투우타, 마무리 투수.] [키워드 : 소방수, 핀포인트, 닥터 K, 스터프.]불펜 킬러와 굿바이 키워드. 게다가 공갈포까지.
경기 후반 극적인 상황에서, 불펜에서 뛰어나온 투수를 두드려 인상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조합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즌 타율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외야수들.’
홍빈은 당연히 수비 시프트 사인을 냈다.
타자는 좌측 펜스 근처로 공을 날리려 할 것이다.
좌익수 진 테프먼을 펜스 근처로 이동시켰고, 중견수와 우익수도 좌측으로 상당히 치우치게 배치했다.
3루수는 좌측 파울라인에 완전히 붙어 섰고, 유격수는 거의 전진 수비를 펼치는 좌익수 자리. 2루수는 유격수 자리로 들어갔다.
우측 내야에는 1루수 주머 데이비스가 홀로 1루와 2루 중간쯤을 지키고 서 있었다.
홈런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건 투수의 영역이고, 그 외의 인플레이 상황에서 최대한 아웃을 따내거나 실점을 하더라도 1점만 내주겠다는 배치다.
팬들은 비어 있는 오른쪽 공간으로 타구가 날아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지만, 그런 상황이 더 많았다면 메이저리그에서 이런 극단적인 시프트는 사라졌을 것이 틀림없다.
‘바깥쪽 존 안으로 들어가는 스플리터.’
극단적으로 당겨 치는 우타자지만,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배트를 내는 타입은 아니다.
홍빈과 그레이는 초구로 무엇을 어떻게 던질지 결정했고, 그 계획을 알게 된 2루수 코난은 타이밍 안 맞은 타구에 대비해 좌측으로 스텝을 밟을 준비를 마쳤다.
“스트라이크!”
심판은 주저 없이 스트라이크 콜. 코난은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조금 멀지 않았어요?”
하지만 피오 고슬랭은 조금 불만이 있어 보였고, 홍빈은 무덤덤한 말투로 고슬랭의 불만을 끊어 버리려 했다.
“내가 삼진당했던 코스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그렇죠, 세스?”
사실, 애매한 코스였다. 홍빈이 삼진당했던 코스는 방금 코스보다 공 한 개는 더 안쪽으로 들어왔었다.
고슬랭은 딱히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했고, 홍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타자 몸 쪽 근처에 앉은 다음, 투수가 동작을 취하자마자 재빨리 바깥쪽으로 옮겼다.
“스트라이크!”
2구째 그레이의 커터가 존을 벗어났지만, 고슬랭은 크게 헛스윙 했다.
순식간에 2스트라이크 노 볼.
홍빈으로서는 홈런을 칠 기회를 위해 연장전으로 들어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고의로 맞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피곤하잖아. 그냥 삼진 먹고 끝내자고. 그럼 내가 파워볼 넘버를 네게 가르쳐 줄 테고, 넌 내 말을 믿게 되겠지.”
“갓댐 코리안.”
“너 때문에 그게 내 별명이 되어 버렸다고. 그냥 잠자코 삼진 먹고 파워볼 넘버를 들은 다음 숙소로 가서 TV에서 확인해. 그러면 거기서 댐을 빼고 날 갓 코리안이라고 부르게 되겠지.”
피오 고슬랭은 정말 지쳐 있었다.
파워볼은 취미로 매주 두 번씩 샀다.
하지만 당연히 저 말은 믿지 않았다. 파워볼 번호를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 사기꾼은 미주 전역에 수십 명은 될 것이다.
사실, 양육비 때문에 나앉을 처지는 아니었지만, 꽤 타격이 있다.
짜증 나는 부분을 집요하게 건드리는 새파란 동양인 포수 때문에 피로도가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런 집중력 하락은 필연적으로 스윙에 허점을 만들기 마련이다.
딱!
배트에 맞긴 했지만, 펜스를 넘어갈 정도로 잘 맞히지는 못했다.
“아웃!”
타구는 펜스 앞에서 몇 발자국 달려 나온 진 테프먼에게 가볍게 잡혀 경기 종료.
리버티 벨이 울려 퍼지는 시티즌스 뱅크 파크에서 고개를 숙이고 물러난 피오 고슬랭은, 숙소에서 파워볼 번호를 확인한 후 스마트폰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Wh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