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Plate's Villain RAW novel - Chapter (96)
홈플레이트의 빌런-97화(97/363)
# 97
개빈의 방식으로 (4)
1
누군가 슈퍼스타 대접을 받는다면, 그것은 괜히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다. 팬의 무언가를 자극할 줄 알기에 슈퍼스타 취급을 받는 것이다.
개빈의 홈런은 그런 의미에서 정말 끝내줬다. 그가 어떻게 스타가 되었고 왜 아직도 스타로 남아 있을 수 있는지 보여 준 한 방이었다.
같은 홈런이라도 팬들을 전율시킬 수 있는 홈런이 있는 법이다.
그랜드슬램은 절정의 흥분을 끌어낼 수 있는 최고의 결과 중 하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상황이 너무나도 완벽했다.
지구 우승을 거의 결정 지은 순간에, 팀이 가장 사랑하는 노장이 팬들이 가장 싫어하는 팀을 상대로 4타점을 쓸어 담으며 쐐기를 박는다.
그리고 야구를 떠나기 싫어하는 감정과 몇 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감격, 늙고 지친 자신을 여전히 사랑하는 홈 팬들에게 감명받아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든다.
내가 개빈 혹은 팬이라도 울컥할 것 같은 상황이다.
“11개만 더 때리고 은퇴할까?”
경기 내내 고생한 선수들을 제치고 만루 홈런을 때려 경기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 개빈을 집에 모셔다 드리는데 개빈이 한 말이다. 라커룸에서 터뜨린 샴페인을, 개빈이 몽땅 마셔 버렸다. 개빈은 자율주행차 따위는 타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개빈의 저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기왕 하는 거 4백 개 채우죠.”
물론 내가 한 말은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개빈의 본심은 모른다.
그가 정말 은퇴하고 싶어하는지, 은퇴할 준비가 되었는지.
내가 본 많은 노장들은, 그러니까 한국에서 뛸 때 은퇴했던 많은 선수들은 제대로 준비된 은퇴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팀에서 전력 외 통보를 받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혼자 어딘가에 처박혀서 운동하며, 친한 기자에게 자기가 아직 뛸 수 있다는 기사를 써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대부분 아름다운 마무리 따윈 없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코치직 같은 걸 수락하는 경우도 있었고, 호주나 중국 리그로 떠나는 일도 있었다. 야구 교실을 하거나, 아니면 식당을 개업했다가 쫄딱 망하는 것도 한둘이 아니었다.
나?
나는 당연히 축복받은 은퇴였지… 겉으로 보기에는. 팬들이나 구단 관계자들이 제발 조금이라도 더 뛰어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어차피 나는 상황이 달랐으니까.
하지만 개빈은, 야구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그런 은퇴를 눈앞에 두고 있다.
“농담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곤 그답게 웃었다.
어쩌면 오늘 그 큰 거 한 방을 치고 나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조금 더 할 수 있을 거 같은데라고.
“아쉽지 않아요?”
“안 아쉬워.”
ㅇㅅㅇ : 거짓말이다.
ㅇㅅㅇ : 대머리는 아쉬워한다.
“거짓말을 잘하시네요.”
“개빈 폴체스키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
ㅇㅅㅇ : 구라 폴체스키다.
누구나 꿈꾸는 은퇴를 앞두고 있으면서, 은퇴하기 싫은데 은퇴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나는 모른다.
내가 개빈에게 은퇴하면 안 된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야구 선수 개빈 폴체스키를 좋아하는 다른 모든 사람처럼, 그가 은퇴하는 걸 아쉬워할 뿐이다.
“그냥 플레잉 코치 제안을 받아들여요. 얼마나 좋아요? 코치는 박봉인데, 적당히 메이저리거 연봉을 받으면서 노후 대비도 할 수 있잖아요. 어차피 돈도 많은 구단인데. 안 그래요?”
개빈은 내 말에 그냥 씩 웃었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며 내게 말했다.
“넌 내 은퇴를 걱정할 때가 아니야.”
“그럼 뭘 걱정해야 하죠? 월드시리즈?”
개빈은 코웃음을 쳤다.
“네 루키 헤이징 의상은 내가 직접 준비할 거다.”
예?
“개빈.”
“왜.”
“뭘로 할 건지 말해 주면 안 돼요?”
“안 돼. 잘 가. 내일 봐.”
개빈은 그렇게 말하곤 정말 뒤돌아서 미련 없이 가 버렸다.
요정님.
ㅇㅅㅇ : 왜.
뭔지 좀 가르쳐 주실 수…….
ㅇㅅㅇ : 안 돼. 꺼져.
젠장.
2
시즌 7경기를 남긴 상황에서, 와일드카드 진출권을 4경기 차이로 밀려 버린 메츠는 마지막 발악을 시도했지만, 지난 경기에서 노히터를 달성한 지미 플로렌스에게 무려 11개의 삼진을 헌납하며 7 대 1로 패배했다.
메츠는 애당초 타격이 아니라 투수력과 수비력으로 승부를 보는 팀이다.
1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상태의 필리스 타선을 막아 내지 못한 데다가 상대 선발투수에게 완전히 털리기까지 했으니 이길 방법이 없었다.
필리스 팬들은 가까운 라이벌인 메츠의 시즌이 사실상 끝난 것에 매우 기뻐했고, 이날을 메츠 멸망의 날로 정하기까지 했다.
[메츠 멸망의 날에 깃발까진 필요 없으니 깃발 대신 중지를 들고 모두 기뻐하라!]┕언제나 메츠 놈들이 징징대는 건 보기 좋지.
┕지미 롤린스의 저주가 통했다!
┕고작 메츠 따위를 이기는 데 저주까지 필요하지도 않아.
┕LOL. 메츠 놈들이 한국인 포수를 데려오려고 애쓰고 있다던데, 다들 들었어?
┕역시 메츠는 멍청해. 한국인 포수가 모두 레드 빈 같았으면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이 모두 한국인 포수를 데려왔을걸?
┕메츠의 멍청한 짓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네. 아주 좋아.
┕메츠 멸망! 메츠 종말! 메츠 절망!
┕필리스가 메츠 선수단의 불알을 모두 뜯어 버렸어!
필리스 선수단의 사기뿐만 아니라 팬들의 사기마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축구에서 12번째 선수로 팬을 꼽기도 하듯, 필리스의 팬들은 또 다른 선수로 꼽히기에 무리가 없었다.
감정적인 부분이나 팬 감사의 날 행사 같은 의미가 아니라, 경기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즌 마지막 원정 경기를 치르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건너온 LA 다저스 선수단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Dodgers의 D는 Damn it이지!”
“서부 얼간이 놈들아! 몽땅 지고 집에 돌아갈 준비 됐냐!”
“홈런을 하나 맞을 때마다 한 놈씩 살려 보내 주지!”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 필리스와 라이벌리를 형성한 적은 있지만, 최근에는 그다지 큰 충돌도 없었던 게 다저스와 필리스의 관계다.
물론 필리스가 대부분의 다른 팀에게 불쾌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다저스 선수들은 필리스 관중들에게 이 정도로 격한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혹시 누가 SNS로 필리스 욕이라도 했냐?”
필리스 팬들은 그저 필리스와 다저스가 플레이오프에서 만날 가능성이 있기에 일종의 선전포고를 한 것뿐이다.
다른 팀 팬들이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저런 비난을 퍼부었다면 역으로 비난을 더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당황한 다저스 선수들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필리스가 필리스 하고 있다.’ 정도의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다저스의 리드오프로 나선 루키 외야수 루카스 에비아스는 1회 초에 타석에서 홍빈에게 말을 걸었다. 좋은 콘택트 능력과 수비 능력으로 다저스 팬들에게 호평받고 있는 선수다.
“와우. 필리스는 정말 멋진데? 팬들 때문에 야구 경기를 하기 싫을 때도 있지 않아? 왜 이렇게 다들 심각한 거야?”
하지만 루카스 에비아스는, 곧 필리스 팬들보다 더 과격한 홍빈의 반응 때문에 마음에 조금 상처를 입었고.
“입 닥치고 머리통에 공 처맞을 준비나 해. fucking 머리통에 맞은 공이 펜스를 넘어가면 홈런으로 인정해 줄 테니까 징징대지 말고 베이스로 달려가.”
그리고 정말로 머리 근처로 날아오는 초구에 식겁하며 뒤로 넘어지듯 공을 피했다.
“볼!”
3
루카스 에비아스.
다저스 미래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골드글러브급 수비력을 선보일 외야수다.
나약한 다저스 프랜차이즈의 상징으로, 벤치클리어링이 벌어졌다 하면 두들겨 맞았던 선수다.
자이언츠랑 붙었다가 대븐포트한테 한 대 맞고 울면서 도망가는 영상이 그를 평생 괴롭혔다.
그 시즌에 자이언츠 상대 타율이 1할대. 확 기를 죽여 놓으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는 선수다.
로빌은 짐이 노히터를 하는 걸 보고 내 팬이 되다시피 했다.
그는 짐이 저런 선수가 된 것이 다 내 덕이라 믿는다.
나는 짐의 잠재력을 알고 개조한 거지만, 로빌이 보기에는 별 볼 일 없던 짐이 내 손을 거쳐 환골탈태한 걸로 보일 테니까. 그래서 그런지 로빌은 내 말을 꽤 잘 믿는 편이며, 내 의견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
애당초 경기 시작 전부터 루카스 에비아스를 상대로는 초구에 위협적인 공을 던지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일어나, 겁쟁이 자식아. 자빠져서 울고 있냐?”
어쨌든 기를 죽이기 위해 평소보다 더 거칠게 말했다.
플레이오프에서 만날지도 모르는 다저스 놈들의 기를 다 죽여 놓을 생각이고, 루카스 에비아스는 첫 희생양이다.
원래는 다저스가 와일드카드 게임을 치르고 올라온 카디널스를 상대로 디비전시리즈에서 승리하고,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컵스를 만나 패배한다.
하지만 혜성처럼 등장한 에이머 시나의 활약으로 강력한 모습을 보였던 컵스는 없다.
이번 시즌의 플레이오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이제 나도 모른다.
하지만 만날 가능성이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고, 짓밟아 놓는다 해서 나쁠 것은 전혀 없다.
“젠장. 뭐야? 왜 날 싫어해?”
개빈이 여기 앉아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개빈처럼 생각해 보자. 내가 만약 개빈이라면?
“걸스카우트 모임에라도 온 줄 아냐? 너 같은 얼간이랑 친하게 지내야 할 이유라도 있나?”
다저스는 강한 팀이지만 큰 무대에서 자주 고배를 마시는 편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약한 정신력을 지적하곤 하는데, 상관없다.
그게 뭐든 이용할 뿐이고, 조금 더 효율적으로 이용할 방법을 찾을 뿐이다.
“스트라이크!”
몸쪽 높은 공은 꽤 많은 타자가 까다로워하는 공이지만, 루카스 에비아스는 몸쪽 낮은 공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스트라이크!”
물론 다른 구단에서는 아직 이 선수에 대해 분석이 되지 않아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에비아스가 이 약점을 극복하는 데 5년이 걸렸다는 것을 나는 안다.
“스트라이크-아웃!”
기를 죽여 놓고 약점을 무자비하게 때리면 승률이 올라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첫 타자에게 삼진을 따내 기뻐하는 로빌을 보며 엄지를 세워 칭찬한 후, 다시 한 번 개빈처럼 말했다.
“더그아웃에서 울어. 여긴 투사들이 나와서 싸우는 곳이니까.”
승리하는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주전 선수들의 체력 안배를 선택한 다저스에게 지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우리는 이 높은 사기와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을 택했다.
물론 한두 자리 정도는 비주전 멤버로 계속 돌려 가며 경기에 나설 테지만, 절반 이상을 비주전으로 내세운 다저스에 비할 바는 아니다.
“셜롯은 어디 가고 웬 허수아비가 여기에 앉아 있는 거야?”
“제기랄. 너도 루키면서 무슨 소리야?”
“루키라고 다 같은 루키인 줄 아냐?”
심지어 다저스는 셜롯조차 라인업에서 제외했고, 내 기억 속에서 흔적조차 없는 애송이가 포수를 보고 있다.
내가 저렇게 말하는 게 자만인가?
내 생각엔 아니다.
[데니스 윌리엄스.] [우투우타, 선발투수.] [키워드 : 팔색조, 홈 스위트 홈, 이닝 이터, 맞혀 잡기.]셜롯이 홈 플레이트에 앉아 있다면 조금 까다로웠을지도 모르겠지만, 다저스의 루키 선발투수는 긴장해서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따악-!
“Nut and nuts!”
나는 보란 듯이 29호 홈런을 때려 냈다.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허수아비처럼 앉아 있는 포수를 상대로, 같은 루키 신분에 같은 포수 포지션이라고 해서 동등한 급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증명한 셈이다.
“좋은 불알!”
“강한 머리!”
머리에 빈볼을 맞고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 내게, 우리 동료 선수들이 붙여 준 이상한 별명 중 하나다.
별명이 너무 많다. 근데 좋은 불알이라고 부르는 놈은 로즐 하나뿐이다.
나는 내 사타구니를 타격 헬멧으로 가리고 로즐에게 말했다.
“좋은 불알이라고 부르지 마, 이 처진 불알아.”
“뭐? 나는 처지지 않았다고.”
웃기시네. 샤워실에서 내가 똑똑히 봤는데.
어쨌든, 로빌은 똑똑한 투수다.
여기서 좋은 활약을 펼치면 내년 개막전 로스터에 포함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안다. 어쩌면 플레이오프 로스터에도 들어올지도 모른다.
우리 팀 불펜에 좋은 사람들은 많지만, 확실하게 중간에서 허리 역할을 해 줄 만큼 좋은 투수는 별로 없고 고액 연봉을 받는 스타 불펜 투수도 없다.
오늘 로빌의 기록은 5이닝 무실점.
그 뒤로 다른 신인급 투수들의 등판이 이어졌고 3명의 투수가 4점을 내줬지만, 이 경기를 승리하기는 충분했다. 그는 5이닝만에 내려갔다 해서 실망하지 않았다. 남은 경기에서 불펜으로 등판해 가능성을 시험할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헤이, 꼬마. 그래서 30홈런 치겠어?”
개빈은 자기 차를 주차장에 내버려 둔 채, 경기가 끝나고 내 차에 올라탔다.
“Come on, 고작 한 개 남았다고요.”
“언제나 마지막이 어려운 법이지. 자, 내 집으로 출발해.”
언제나 마지막이 어려운 법이라…….
뭔가 의미심장한 말인데.
뭐 할 말이라도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