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Black Tea RAW novel - Chapter 31
31화
횡단보도 앞에 전학생이 서 있고, 그 뒤에 있는 가로수에 남자가 숨겨지지도 않는 몸을 숨기고 서서 전학생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신호등이 바뀌고, 전학생이 걸음을 떼는 동시에 남자의 뒷덜미를 잡아 그의 손에 있는 핸드폰을 뺏어 들었다.
“어! 내 핸드폰!”
“쟤가 혹시 스냅 사진 부탁했나요?”
“예, 예?”
남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보았다.
검은색 구두에 검은색 정장, 검은색 타이까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상한데 머리에 검은색 선글라스까지 올리고 있다. 얼굴에 쓰고 있다가 앞이 캄캄하니 안 보여 머리에 올린 듯했다.
“아, 그런 거 있잖아요. 자연스럽게 걸어가고 있으면 사진 찍어주고 그런 거.”
“뭐, 뭐예요, 당신? 그거 이리 돌려줘요!”
남자가 손을 뻗자 핸드폰 든 손을 더 높이 들었다. 고개를 올려 남자가 찍은 사진을 슥슥 옆으로 넘겨 확인했다.
“그게 아니면, 몰래 찍는 건가?”
“주, 주라니까요?”
“아이고, 많이도 찍으셨네.”
표정을 서늘하게 굳히며 잡고 있는 목덜미를 놓았다.
“뭐야, 너?”
“….”
“뭐 하는 새끼인데, 사람 미행하면서 몰래 사진을 찍고 그러냐고.”
옷깃을 정리하던 남자가 급하게 머리에 쓴 선글라스를 내려 눈을 가렸다. 그러고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목소리를 깔았다.
“도련님 경호원입니다.”
“도, 뭐?”
도련님도, 경호원도, 둘 다 어감이 너무 동떨어져서 서늘하게 굳은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남자가 어깨를 탁탁 털고 얼굴을 들었다.
“홍차연 도련님 경호원이란 말입니다.”
*
조용한 카페, 경호원이라는 남자와 마주 보고 앉았다. 빨대를 입에 물고 음료를 쪽쪽 들이켜 마신 뒤 탁, 잔을 내려놓자 남자가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었다.
경호원 맞아? 남자를 훑어 내리는 눈에 의심이 덕지덕지 묻었다.
남자, 그러니까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치장한 그는 먹이사슬 구조에서 맨 밑바닥에 있었는데, 심지어 홍차연 집의 정식 경호업체 소속도 아니라고 했다.
오늘 딱 하루 고용된 일일 알바라나?
남자는 모 대학교의 경호학과 재학생으로 현장에 투입되었다고 했다. 지시받은 일이라고는 학교 교문을 나오는 사진 몇 장과 집으로 들어가는 사진 몇 장을 찍어 오는 거라고.
“도련님 하교 사진만 찍어 오면 된다고 그래서.”
“아아.”
“원래 이런 건 말하면 안 되는데….”
남자가 툭 고개를 떨어트렸다. 내가 경찰에 스토커로 신고를 하겠다고 112까지 누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게 된 것이었다.
“다 말했는데 사진은 왜 지우냐고요.”
남자가 휴지를 북북 찢으며 입을 내밀었다. 사진이 없으면 오늘 활동에 대한 증빙이 없고, 증빙이 없으면 일당을 못 받게 될지도 모른다며 책임을 운운했다.
“그건 죄송해요. 걔한테 경호원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두 손을 바람막이 주머니에 넣고 손가락을 까닥까닥 움직였다. 남자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
“내일 다시 와야겠네….”
테이블을 응시하며 상황을 정리해봤다. 도련님이라고 하는 걸 보면 잘사는 집의 자제일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게 이상했다.
턱을 쓸다가 눈을 올려 앞에 앉은 남자를 보았다.
“내일은 저 봐도 모른 척해주세요.”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찢은 휴지를 쓸어 모은다.
“아! 당연하죠. 모른 척해야죠.”
웃는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남자 쪽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그런데 이런 거 의뢰받을 때 사진도 받고 그럴 거 아니에요.”
“뭐, 그렇죠.”
“와, 멋있다.”
그 말에 남자가 멋쩍게 웃었다.
“사진 보고도 요즘은 사람 알아보기 힘든데. 어떻게 그렇게 바로 찾았어요?”
“똑같던데요?”
“아, 그래요?”
“네.”
주머니에서 손 하나를 빼 테이블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홍차연 사진, 볼 수 있을까요? 무슨 사진이었기에 그렇게 바로 찾았는지 궁금한데.”
눈이 마주치고,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늘여 싱긋 웃었다.
*
경호원이라는 남자가 보여준 홍차연의 사진. 남자가 사진을 내놓으라고 하는데도 뚫어져라 봤다. 전학생은 전학생인데, 묘하게 달랐다.
뭐지, 뭔가 다른데.
미간을 좁히고 사진을 보다가 눈 옆에 난 점을 발견했다. 보건실에서 전학생의 얼굴을 훑어보다가 눈길이 갔던 점이었다.
진짜 도련님인가 보네. 새끼.
사진을 돌려주면서도 혹시 몰라 점의 위치를 기억해뒀다.
그리고 다시 학교, 전학생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자 순간 소름이 돋았다. 점의 위치가 미묘하게 달랐다. 사진 속의 애는 눈꼬리 바로 아래에 점이 있었는데, 전학생은 눈 밑에 도드라진 도톰한 살 아래에 점이 있었다.
“야… 너 혹시.”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올려 전학생의 얼굴을 막 문질렀다. 혹시 지워지는 점인가. 이 새끼 막 점을 그리고 다니는 건가 싶어서.
“뭐, 뭐냐?”
전학생이 내 손을 쳐내고 인상을 쓴다.
“아니, 여기 점 있으면 잘 운다고 그래서.”
“나 원래 잘 울어.”
그렇게 말하곤 무심한 얼굴로 지나가 버린다. 전에 그랬던 것처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미친, 우리 학교에 여자애가 전학을 온 건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심장이 뛰었다.
처음엔 전학생이 들고 오는 가방의 변화에 시선을 뺏겼다. 백팩에서 에코백으로, 에코백에서 빵집 쇼핑백으로 변화하는 그 과정이 꽤나 황당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그런데 시선을 뺏긴 게 가방만이 아니었다. 가방을 가방 걸이에 걸고 앉은 전학생의 모습에도 시선을 뺏겼다.
전학생은 수업 시간에 눈을 뜨고 잤다. 잘 거면 그냥 엎드려서 자지 고개는 꼭 빳빳하게 들고 잤다.
오랜 시간 눈을 뜨고 있지는 않았다. 한 몇 분 지나면 자연스레 눈꺼풀이 내려와 눈동자를 가렸다.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는 것엔 변함이 없었다.
눈 감고 선생 얼굴이라도 보겠다는 건지 뭔지. 그러다 한 번씩 잠에 취한 머리가 아래로 추락했다.
그때마다 전학생은 눈을 부릅뜨며 안 잔 척을 했다. 수업 진도가 어디까지 나간 줄도 모르면서 무작정 연필을 잡고 뭔가를 끄적였다. 그게 너무 웃겼다.
밥을 먹을 때도 그랬다. 키도 작고 몸도 작은 게 먹성 하나는 끝내줬다. 매번 한가한 시간대를 골라 급식을 먹으러 오는 전학생은 늘 구석진 자리에 앉아 혼자서 밥을 먹었다.
혼자서 밥이라니, 의기소침해질 만도 한데 야무지게 잘도 먹었다. 남기는 꼴을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 깨달았다. 시선을 완전 뺏겨버렸다. 남자인 척하는 전학생에게.
콩알만 한 게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귀여운 게 아니고 존나 귀여웠다. 그걸 알게 된 순간 망했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제 정체를 감추기에 모르는 척해주고 싶었는데, 이젠 왠지 그게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불현듯 긴장이 됐다. 죽도 밥도 안 되면 어쩌지. 그건 싫은데. 고민이 깊어졌다.
고민이 깊어가는 와중에 다행인지 뭔지 손이 삐끗했다. 알알한 게 하루 지나면 괜찮아질 걸 알면서도 보건 선생님에게 팔 하나 떨어져 나간 것처럼 인상을 썼다. 그 덕에 손에 붕대를 감았다. 무기를 얻은 셈이었다.
교실로 돌아가는데 이상하게 휘파람이 불어졌다. 미쳤나,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스멀스멀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교실로 들어섰다. 나를 보는 전학생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뭔, 눈이 저렇게 커.
“…야, 너, 너, 손 왜 그래?”
전학생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묻는다. 귀찮은 얼굴로 보건실로 꺼져 버리라는 듯이 말할 때는 언제고. 무표정한 얼굴로 붕대 감은 손을 들었다. 자, 보아라. 이것이 너를 구하고 얻은 결과이니라, 하고 말하듯.
“왜겠어.”
“어?”
“너 때문이지.”
전학생의 입이 벌어진다. 그 모습에 웃음을 참느라 콧구멍이 벌름거리는 것 같았지만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놀릴 생각은 없었는데, 묘하게 재미있었다. 놀라는 얼굴이 도토리를 도둑맞은 다람쥐 같다.
이제 어쩔 수 없다. 덫을 놓고 어떻게든 너와 엮일 거다.
*
숙제를 하고 전학생을 집에 바래다주는 길, 전학생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전학생, 홍차, 콩알에게 온전한 자기 이름이 붙게 된 거다.
홍차가 김누리가 되었을 뿐인데,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순간 무언가가 마음속 깊이 내려왔다. 밧줄을 휘휘 풀며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침투했다.
그 밧줄에 대체 뭐가 묶여 있었던 걸까. 마음이 이상해졌다.
‘콩알만 한 게 귀엽네’ 그게 수면 위에 떠 있는 부표라면, ‘김누리’ 그 이름은 심해 깊은 곳에서 헤엄치는 생명체 같았다.
남 대신 위험하게 학교를 다니고 있는 김누리가 마음에 걸렸다. 고요한 새벽, 혼자서 우웅, 우웅 하고 우는 냉장고 소리처럼 신경이 쓰였다. 신경이 쓰이는 순간 냉장고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가서 문이라도 열어봐야 직성이 풀리는데. 해맑기만 한 김누리의 속을 도통 알 수가 없다.
누리가 들어간 간판만 보면 걸음이 멈췄다. 온누리 교회, 봄누리 병원, 누리 피아노, 들어간 이름도 많았다. 걸음을 멈추고 서서 웃는 나를 보며 남윤수는 미쳤나 봐, 하며 혀를 찼다. 이해했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미친 것 같았으니까.
자려고 누운 천장에 김누리가 있고, 잠이 안 와 베개를 품에 안으면 김누리를 안으면 가슴께 정도 오려나, 그런 미친 생각을 하게 됐다.
“아… 이러다 병나겠다….”
새까만 어둠이 내린 방 안에서, 벽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점심을 먹는데 후식으로 나온 요플레를 싹싹 긁어 먹으며 김누리가 말했다.
“후식으로 통 아이스크림 같은 거 나오면 좋겠다.”
“야, 너 그 한 통 설마 앉은 자리에서 다 먹는 건 아니지?”
김누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헐, 그렇게 먹으면 안 되는 거야?”
툭 웃음이 터졌다. 진짜 종잡을 수 없는 아이다.
그 종잡을 수 없는 아이를 위해 청소 시간, 몰래 담을 넘었다.
걸리면 죽는 건데 제발 학주 눈에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며 후문 뒤에 있는 편의점으로 갔다. 김누리가 제일 좋아한다는 쿠키앤크림 아이스크림이 없어서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오레오 세 개를 샀다.
담을 넘는데 학주랑 딱 마주쳤다.
“이 새끼, 이거, 슬리퍼 신고 담을 넘고. 운동장 돌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하지?”
“어, 어, 선생님.”
“이름이 뭐야, 너. 몇 학년이냐.”
다급하게 명찰을 가렸다. 그러곤 잽싸게 튀었다. 뒤에서 안 서, 새끼야!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여기서 섰다간 오리걸음으로 안 끝난다. 청소 시간이 끝나고도 한참을 굴러야 한다. 그러면 아이스크림이 녹는다. 김누리가 후식을 못 먹는다.
바로 동관으로 들어갔다간 2학년인 걸 들킬 게 뻔해서, 본관으로 들어갔다가 창문을 넘어서 뒷길로 기어가다시피 이동해 동관으로 들어왔다. 내가 생각해도 미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교실에서 김누리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 왔다는 애의 머리가 쫄딱 젖어 있었다.
“왔어? 그런데 너 머리가 왜 그래?”
“어? 아, 별거 아니야.”
머리칼을 털며 자리에 앉은 김누리가 기분 좋은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본다.
그래, 이 얼굴이 보고 싶어서 사 왔던 건데.
“야, 너 나갔다 왔어?”
김누리가 나를 보며 눈을 깜박인다. 내가 뭐라고, 머리 젖은 거 가지고 따져 묻기도 뭣해서 눈썹 끝을 매만졌다. 어쩐지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것 같아서.
그런데 눈썹을 문지르는 손가락 사이로 김누리가 입고 있는 체육복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체육복 어깨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틀어진다.
“왜 찬영이 체육복을 입고 있어?”
“응? 아닌데. 내 체육복인데.”
“그거 찬영이 건데.”
김누리의 오른쪽 어깨를 가리켰다.
“여기 별, 이거 내가 그린 거거든. 김찬영 체육복에.”
“어, 진짜네.”
“찬영이한테 체육복 빌렸어?”
“아니, 빌린 건 아닌데.”
김누리가 잠시 침묵한다. 눈동자 굴리는 게 보였다.
티가 안 나면 좋겠는데, 쟤는 얼굴에 다 티가 난단 말이지. 거짓말을 하려고 하는 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