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cult can save the world RAW novel - Chapter 108
108화
“히익……!”
잘 벼려진 칼날이 대사제의 목에 닿았다. 그가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그대로 살결이 베일 정도였다.
대사제는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할머니를 보았다.
“헤, 헬레나 님. 이,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대사제의 옆에 앉아있던 사제는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서는 할머니에게 외쳤다. 그러고는 다급히 할머니에게 다가가 그녀의 근처에서 안절부절못했다.
“거, 검을 거두어 주십시오! 헬레나 님!”
사제가 또 한 번 말했지만, 할머니의 표정은 완강했다. 전장을 휩쓸고 다니던 소드마스터의 냉정한 시선이 고스란히 대사제를 꿰뚫었다.
서재에서 유일하게 평온해 보이는 이는 맥스뿐이었다. 맥스는 마치 할머니의 행동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 아이야, 네 할머니는 아주 강단이 있는 자로구나.
‘네. 그러게요. 처음 뵈었을 때는 예전 모습이 잘 상상이 안 갔는데, 지금 보니 소드마스터 시절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기분이에요.’
– 그러게나 말이다. 분명 전장을 제대로 휘젓고 다녔을 게다.
나는 카이로스와 함께 속으로 감탄하며, 할머니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반듯한 자세로 선 채 차디찬 시선으로 대사제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그 모습은, 한껏 진지해졌다고 생각했던 훈련 때조차 본 적이 없었다.
현재의 헬레나 홀든은 그 모습 자체가 한 자루의 검과 같았다.
자칫 숨이라도 함부로 내쉬었다가는 나까지 베어질 듯한 기분.
‘……할머니.’
그리고 헬레나 홀든, 나의 할머니의 저 행동이 나를 비롯한 가족들로부터 기인했다는 것에 약간의 감동까지 받고 말았다.
“헤, 헬레나 님. 어, 어찌……!”
목에 검이 겨눠진 대사제는 혹여 자칫했다가는 베이기라도 할까 싶어 몹시 작게 할머니를 향해 호소했다. 그러자 할머니의 한쪽 입꼬리가 느릿하게 올라갔다.
입매는 올라갔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차가운 그 스산한 미소에 대사제의 손이 작게 떨려왔다.
이어 할머니의 차가운 음성이 고저 없이 흘러나왔다.
“내 여태 그대의 무례를 눈감아 준 것은, 그대를 위해서가 아닐세.”
할머니의 목소리마저 직전에 들려왔던 평소 같은 음성이 아니었다. 한층 낮아지고, 묵직해졌으며, 약간의 쇳소리까지 섞여 공포감까지 조성하고 있었다.
“이 집에 머물고 있는 내 귀여운 손주들 때문이지.”
할머니의 목소리와 그녀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온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냉정한 외모와 음성 때문인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태도로 인해 대사제의 팔과 다리가 점점 크게 떨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대사제의 목이 베어질지도 몰랐다.
‘물론 할머니께서는 안 그러실 것 같지만.’
그리 예상할 수 있는 건, 할머니 입에서 흘러나온 ‘이유’가 바로 나와 세베누스였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에게 더러운 꼴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야.”
할머니가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며 나긋하게 말했다.
역시.
“죄, 죄송합니다…… 헤, 헬레나 님.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대사제가 황급히 할머니께 사과했다. 하나 할머니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할머니는 대사제를 잠시간 노려보다가 천천히 검을 내렸다.
“내 생각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테니, 다시는 찾아오지 말게. 그럼 썩 물러나게나.”
할머니가 검을 거두자 대사제와 사제가 허둥지둥하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내가 몰래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되니, 나도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 몸을 움직였다.
다행히 근방에 커다란 조각상이 있어 곧장 그 뒤로 몸을 숨겼다. 길이가 그리 길지는 않아도, 몸을 쪼그리고 앉으니 딱 가려질 정도는 되었다.
– 아이야, 그러고 있으니 꼭 네가 도둑이 된 것 같구나.
‘저도 도둑이 된 심정이에요.’
속으로 한탄하고 있을 때. 서재의 문이 열리고 맥스가 나왔다.
“이쪽으로 오시죠.”
“예, 예. 알겠습니다.”
맥스의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기는 대사제와 사제의 낯은 희게 질려있었다. 그들은 힘겹게 숨을 내쉬며 복도를 지나갔다.
세 사람의 인영이 시야에서 멀어지고 난 뒤에야 나는 조각상 뒤에서 나왔다. 그리고 여전히 열려 있는 서재의 틈새로 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
할머니는 어느새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할머니를 대체 어떻게 설득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안에서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렴, 레비.”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기분이 들었다.
‘맙소사.’
– 세, 세상에! 네 할머니는 알고 있었나 보구나! 역시 소드마스터구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카이로스는 할머니를 극찬하였지만, 내 귀에는 제대로 들려오질 않았다.
몰래 듣고 있었다는 걸 들키다니, 온갖 수치심이 몰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 이대로 모른 척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결국,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서재의 문을 밀었다.
“죄송해요, 할머니.”
나는 안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사죄했다. 그러자 할머니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괜찮다, 레비. 내 강아지. 이리 와서 편하게 앉으렴.”
할머니의 목소리는 직전까지 대사제를 대할 때와는 정반대로 달라져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나긋하고 다정한 음성에 고개를 들자, 나를 보며 환히 웃는 할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아, 알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나는 머쓱해져서 목덜미를 매만지며 할머니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그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나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모르기가 더 힘들단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최대한 기척을 숨기려무나.”
할머니가 온화한 미소와 함께 내게 충고했다.
“네, 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나는 할머니로부터 다시금 사과하며, 그게 최대한 기척을 숨긴 거라는 말을 뒤로 삼켰다.
‘정말 괜히 소드마스터가 아니구나.’
원작에서 주인공인 테르디안도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소드마스터에 이르렀으니, 젊은 시절의 할머니는 그보다 더 강했을 것이다.
문득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할머니가 더 존경스러워졌다.
똑똑. 그때, 노크와 함께 맥스가 돌아왔다.
“아, 도련님께서 계셨군요.”
“그래, 맥스. 그러니 레비를 위해 수면에 좋은 차를 한 잔 갖다주겠어?”
“알겠습니다.”
맥스가 차를 준비하기 위해 나가고, 서재에는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나저나 이 시간까지 깨어 있던 거니?”
“아, 네. 책을 좀 보다가…….”
“그랬구나. 그래도 일찍 자는 게 좋단다, 레비. 그래야 오늘의 피로가 풀리고 내일 또 제대로 훈련을 할 수 있으니깐 말이다. 육체의 피로를 제대로 풀 줄 알아야 하지.”
할머니의 말에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짧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맥스가 차를 가지고 돌아왔다. 내 앞에 따라지는 향긋한 차의 내음을 맡고 있자, 할머니가 맥스에게 말했다.
“수고했어, 맥스. 얼른 돌아가서 쉬렴. 나는 레비와 이야기를 하고 잘 테니.”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주인님.”
맥스가 떠난 후. 나는 김이 모락모락 흘러나오는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정확히 무슨 맛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 화한 느낌이 허브가 섞인 건 분명했다.
“심신을 진정시켜 숙면에 도움을 주는 차란다.”
“그렇군요.”
작게 답하고 차를 삼켰다. 그리고 찻잔을 내려두고는 할머니를 보았다. 그리고 조심히 물었다.
“저, 할머니.”
“그래, 레비.”
“궁금한 게 있어서요.”
“편히 물어보렴.”
나의 말에 할머니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두고는 내게 집중했다. 나는 신중히 물었다.
“조금 전, 할머니를 찾아왔던 그자들은 디에고교 사제죠?”
“……그래. 그렇단다.”
할머니의 눈매가 일순 가늘어졌다가 돌아왔다.
“혹시 그들이 언제부터 찾아온 건가요?”
“내가 마나 번에 걸렸다는 사실은, 레비 너도 알고 있었지?”
“아, 네. 형님에게 들었습니다.”
“그래. 그랬구나.”
할머니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디에고교에서 나를 찾아온 것은, 내가 마나 번에 걸린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단다. 아무래도 소문이란 쉽게 퍼지기 마련이었으니, 언젠가 퍼지리라 생각은 하였으나 그렇게 빠를 줄은 몰랐었지.”
할머니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덧붙였다.
“그들은 내게 병을 낫게 해주겠다면서, 한 가지 제안을 했단다. 너도 조금 전 들었을 테지만, 디에고교의 성기사단장이 되어 기사들을 육성해달라는 조건이 덧붙여져 있었지.”
“그랬군요.”
“디에고교에서 나를 찾아온 건 내가 마나 번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일주일 뒤부터였단다.”
설마 싶었는데, 디에고교에서 이렇게 빠르게 움직였을 줄이야. 심지어 그 시기도 대략 내가 빙의하기 직전이나 다름없었다.
‘여태껏 히든 루트의 변수에 대해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까지의 일을 정리해보자면, 대략 원작과의 줄거리는 같지만, 내가 생각지 못한 부분들에서 난이도가 급상승하여 있었다.
‘……심지어 원작에 등장하지 않은 엑스트라의 일들까지도.’
아마 원작과 같은 난이도였다면, 할머니가 마나 번에 걸리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하나 원작에서는 할머니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도, 그녀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이것도 역시 히든 루트로 인해 생긴 게 맞을지도 몰라.’
아마 빙의 직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면 크게 감흥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들은 그저 게임에 등장하던 캐릭터 중 하나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이 세계에 머무른 시간이 이제 1년 가까이 되어서 그런 것일까. 점차 게임이 아닌 현실로 받아들여지는 상황들은 내가 각자에 대해 느낄 죄책감까지 만들어내고 있었다.
당장 내가 헬레나 홀든을 만나게 된 것만 해도 고작 며칠 전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사이 진짜 혈육의 정이라도 느낀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에 대한 내 걱정은 그 크기를 키워갔다. 어느새 할머니를 꼭 낫게 해주고 싶다는 감정이 내 마음을 전부 차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래서 할머니를 카이로스교 신도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카이로스의 성력을 받아 할머니가 건강을 되찾을 테니.
하지만 디에고교의 제안을 거절한 할머니를 보니 방법을 찾기가 더 어려워졌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는 할머니를 보며, 따라서 찻잔을 들었다.
‘할머니는…… 신념이 강한 사람이다.’
만일 제 건강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면 디에고교의 제안을 처음부터 수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러지 않았다.
“레비.”
문득 할머니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내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단다.”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할머니가 다정다감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할머니…… 할머니의 건강을 걱정하지 않을 수는 없어요. 만약 제가 할머니였다면, 디에고교의 제안을 수락했을 텐데…….”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자, 할머니는 미소했다.
“그래. 나 역시도 처음에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까 했단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단다. ‘나는 충분히 오래 살아왔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니, 앞으로도 후회 없는 삶을 살자.’”
할머니의 말에 나는 입을 벌린 채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했다. 그리 이야기하는 할머니의 표정에는 정말 한 치의 후회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할머니를 구하려는 행동 또한 오지랖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젠장.’
어떻게 해야 하지? 도통 갈피를 잡기가 힘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