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legendary returner lives RAW novel - Chapter (325)
#325화
세상은.
정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판타지아 제국은 물론 진나라까지.
약간의 혼란은 있었으나 모두 정리되었다.
판타지아 제국은 새로운 황제가 된 게르마니쿠스 황제가 모든 혼란을 수습했으며, 잊혀진 과거의 역사를 알고 있는 모든 자들을 숙청했다.
친형제, 친척, 심지어는 가까운 가문인 대공가까지.
피바람이 불었고 그 모든 피바람을 잠재우는 데에는 정확히 1년이 흘렀다.
진나라도 흡사했다.
마도를 걷던 만월도종과 혈교가 무너졌다.
마도란 무엇인가.
어떠한 수단을 이루고자 할 때, 사람을 죽이는 것이 목적인 이들을 뜻한다.
만월도종과 혈교는 마도의 정점인 가문으로서 사람을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니고 산 채로 사지를 뽑아 먹거나, 끓여 먹거나, 피를 꺼내 정제한 뒤 먹거나.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을 죽였다.
물론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일상인 세상이긴 하나, 이들은 도가 지나쳤다.
그냥 죽이는 게 아니라 먹는다. 찢어서 먹고 끓여서 먹고, 이 이상 뭐가 필요하겠나.
멸문하는 게 맞다.
그 혼란을 수습한 것은 무림맹의 단목천도였다.
안 그래도 밝게 빛나는 영웅이었는데, 마도를 척결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무림의 영웅이 되었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판타지아 제국의 혼란과 진나라의 혼란이 모두 잦아들었을 때.
또 다른 혼란이 그들을 찾아왔다.
단목천도가 천명한 것이다.
현 세상을 지배하던 장로원의 무신들이 모두 등선하여 신선이 되었다고.
판타지아 제국의 황제도 비슷한 내용을 발표했다.
집행원의 무신들이 별이 되어 흩어졌다고.
누가 봐도 단목천도와 황제가 만나서 공식적인 발표 시기를 정한 것이 확실했다.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진나라의 마도들을 가만히 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나.
장로원의 무신들이 그 뒷배이기 때문이다.
판타지아 제국이 만 년 동안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을 뒤에서 떠받쳐 주었던 집행원의 존재 덕분이었다.
중원에서 숨죽이고 있던 온갖 무인들이 고개를 들고 한 지역의 패주를 자처했다. 진나라 내부에서는 권력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최대한 수습하던 무림맹이었지만 타격이 없을 수가 없었다.
판타지아 제국도 마찬가지다.
온갖 곳에서 들고 일어섰다.
사병을 기르고 호시탐탐 하늘을 노리던 이들이 제국을 거부하고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제국이 찢어졌다.
이 혼란이 잦아들기까지는 무려 20년이 걸렸다.
현 무림에서 가장 최고의 단체는 분명 무림맹이다.
그 무림맹의 맹주전에는 철저하게 허가받은 이들만이 진입할 수 있는데.
중원의 복장이 아닌, 판타지아 제국의 그것과도 흡사한 복장의 여인이 들어섰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신수가 훤해지셨네요.”
“허허…… 그렇게 보이십니까.”
무림맹주, 현 천하제일인 단목천도가 웃으며 그 여인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요즘도 그곳에서 지내십니까.”
“그럼 거기 말고 제가 갈 데가 어디 있겠어요?”
헬레나 마이어스.
그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되, 역설적으로 너무나도 큰 존재감을 떨치는 여인이었다. 헬레나가 단목천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많이 늙으셨네요.”
“워낙 업무만 보다 보니, 결국 늘어나는 건 주름밖에 없습니다그려.”
단목천도.
그는 본래 청년의 모습이었다.
사실 반무극경이든, 무극경이든, 심지어는 무신경이든.
그들에게는 세월의 흐름을 비껴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목천도는 분명 반무극경의 힘을 사용할 수 있긴 하나, 지속하지는 못한다.
‘오래전’, 그때 그 사건 이후 원기가 크게 상하였고, 그것을 지금까지도 회복시키지 못했다.
늙어가는 것이 당연하다.
“그보다 오늘은 어쩐 일이십니까.”
“그냥 심심해서 들러봤어요. 아시잖아요. 거기서 멍때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거.”
단목천도는 웃고 있는 헬레나를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았다.
“……외람되지만, 전에 드렸던 말씀을 또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하셔봤자 제 대답은 같을 텐데요.”
“그래도 하고 싶습니다. 이쯤에서……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헬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40년’이 흘렀다.
두 국가에서 모든 혼란이 수습되고, 무신들의 죽음이 알려지고 그로 인해 생겨난 또 다른 혼란도 수습되고.
거기에서 수십 년이 또 흐른 게 지금이다.
모든 것이 안정화된 세상.
태평성대.
그것을 이루는 과정에서 헬레나의 도움이 컸다.
지대하다는 표현을 써도 무방했다.
그녀는 항상 뒤에서 움직였다.
그녀의 힘은, 현재 세상에서 진정한 의미의 ‘천하제일’이었다.
약화된 단목천도, 그리고 판타지아 제국에는 헬레나만큼의 강자가 없다.
그녀는 욕심부리지 않았다. 할 일만 하고 끝냈다.
반란을 일으키려는 이들이 있으면 가서 암살했다.
모든 일을 끝낼 때마다 그녀는 진나라의 장로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다, 지금 1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왜 왔는지.
헬레나는 본인의 입으로 심심해서 왔다고 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단목천도는 안다.
“한 달 정도, 남으셨나요?”
부정할 생각이 없다는 듯 단목천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는 없으시고요?”
“허허…… 있겠습니까? 저는 이루고 싶은 것을 다 이뤘습니다. 마도를 척결했고 무림에 평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물론 세상 모든 곳의 갈등들을 중재하고 해결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의와 협을 행하는 이들의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헬레나 님 덕분이죠.”
헬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진시후 님의 덕이죠. 어떻게 제 덕일 수가 있겠어요.”
“그분의 덕도 있고, 헬레나 님의 덕도 있습니다. 기회를 주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면서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헬레나가 웃었다.
“후회 없으시면 그걸로 된 거죠. 솔직히 처음에 진시후 님이 당신을 살려두겠다고 했을 때 회의적이었던 것도 사실인데…… 지켜보니까 진시후 님이 맞더라고요.”
“과찬이십니다.”
“고생하셨어요. 후임은 제대로 정하셨고요?”
“물론입니다. 의협이 넘치는 녀석으로 이미 낙점해 두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고개를 저었다.
“그냥 제 존재만 알려주세요. 그리고 좋은 마음, 변치 말라는 말도 전해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고생하시고요. ‘다음’에 봐요.”
헬레나가 몸을 돌렸다.
천천히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단목천도가 말했다.
“당신이 바라시는 일이 반드시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입니다.”
헬레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말없이 빙긋 웃었다.
다시 몸을 돌린 헬레나가 걸음을 옮긴다.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녀가 보았던 진시후의 마지막 모습은 무엇이었나.
그녀를 공간 밖으로 내보내며 행복하라던 그 모습?
아니다.
그다음이 있었다.
진시후의 육체가 폭발했다.
사지가 터지고 목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 이후에 공간이 완전히 닫혔다.
진시후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걸 본 헬레나가 가슴 편하게 지낼 수 있을 리 없다.
중간계로 돌아가라 했으나, 돌아가지 못했다.
아니, 돌아가지 않았다.
40년간.
헬레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아무리 초인이고 수명이 무의미해도 수면을 취하긴 해야 하는데, 잠에 들려는 순간만 되면 진시후의 그 모습이 오버랩된다.
땀을 흘리며 깨어나 덜덜 떨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진시후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헬레나에게 크게 닿아 있었다.
무한의 투기장에서 헬레나는 어떻게 버텼을까.
진시후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버틴 것이다.
어떻게든 돌아와서 도움이 되긴 했는데, 마지막으로 보게 된 모습이 그런 모습이었다.
돌아가라고? 어떻게 돌아가나.
헬레나는 정진하고 있었다.
진시후가 닿아 있는 그 경지에 닿아야 한다.
닿아야.
도울 수 있다.
분명 아직 진시후는 죽지 않았다. 적도 죽지 않았다.
여전히 싸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곳에서 40년이 넘게 흘렀으니, 그곳에서의 시간은…… 아마 수천 년, 혹은 수만 년이 될 수도 있다.
다시 신당으로 돌아왔다.
시간의 방.
그것을 작동할 방법을 알아내야 했다.
이곳에는 없다.
무극경의 강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림으로써 개념 자체가 사라졌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야속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있는 거다.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했다.
가상의 적과 싸우고 싸웠다.
땀을 흘리고 기운을 모조리 뿜어내고.
어떻게든 깨달음을 얻으려 발악을 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헬레나는 야밤에 조용히 단목천도의 거처로 향했다.
“허허…… 안 오실 것 같았는데…… 그래도 오시는군요.”
“와야죠. 마지막인데.”
단목천도가 빙긋 웃는다.
헬레나가 물었다.
“후회 없으시죠?”
“예. 없습니다. 원 없이 살았고 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이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단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등선이겠지요.”
단목천도가 헬레나의 손을 꼭 붙잡았다.
“당신께서도, 부디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루셨으면 좋겠습니다.”
한 달 전에 들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아마 죽음을 앞두고 있어서이지 않을까.
“고생하셨어요.”
다음 날 오전, 단목천도가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을 먼 거리에서 보았다.
성대했다.
수만, 수십만, 그리고 수천만.
거의 진나라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과 판타지아 제국에서 단목천도를 존경하는 이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지켜보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신당으로 돌아온 뒤 다시 수련에 매진했다.
1년이 흐르고, 10년이 흐르고.
20년이 흘렀다.
헬레나의 두 눈이 크게 떠진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공간이.
흔들렸다.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처음이었다.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날 것이 분명했다.
* * *
재미있는 사실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놈은 분신술을 쓰지 못한다.
아니지, 이게 분신술이라고 하는 게 맞나.
모르겠다. 그냥 육체의 분열 같은 건데 분신이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퍼걱, 얼굴이 젖혀진다. 피가 튀었다. 그대로 손을 뻗었다.
콰악.
천의 얼굴이 잡힌다.
“아픈데.”
[……질긴 새끼…….]그대로 힘을 주었다.
뻐걱, 놈의 얼굴이 박살 난다. 발을 내질렀다. 퍼엉, 놈의 육체가 폭발했다. 사방으로 비산하던 그것들은 마치 시간을 역행하듯 공중에서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터억.
놈이 자리에 착지한다.
놈이 숨을 몰아쉬었다.
웃음이 나온다.
“이제 슬슬 지치나 봐.”
[……너……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계속 말하고 또 말했는데, 더 말해 줘야 돼? 우리 이런 대화를 이미 수만 번 넘게 하지 않았나?”
[……어찌 그 정도의 정신력을 가질 수 있는 거지? 고작 인간 따위가.]어깨를 으쓱했다. 저것도 이미 들은 이야기지만 그러려니 했다.
[나는 신의 자손이다. 나처럼 신의 혈족이 아닌 네놈이 대체 어찌…….]“우리 폐하께서 수십만 년 투닥거리더니 치매에 걸리셨나. 탈혼경에 이르게 되면 종을 초월한다는 거 까먹으셨어요?”
[놈! 말장난하지 말거라. 아무리 종을 초월했어도 그 초월치에는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다. 신의 혈족만이 오직 수십, 수백만 년을 버틸 수 있는 정신력을 가지게 된다. 네놈 같은 인간은 아무리 종을 초월해 봐야 그것이 불가능하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이다!]웃고 말았다.
대충 놈의 입에서 모든 진실을 들었다.
이 진계라는 곳이 생겨나기 전에 일어났던 전쟁.
그것은 왜 일어났는가.
일단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로 인해 이념 갈등이 격화되었다.
천좌의 주인을 중심으로 한 존재들과 그 천좌의 주인을 끌어내리고자 하는 이들.
그 전쟁은 심화되었고 판타지아라는 땅을 파괴시키기에 이르렀다.
가히 신들의 전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천이 왜 진계로 이주를 결심했는가.
간단했다.
이미 전쟁의 흔적으로 판타지아는 폐허가 되었으니까.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는 땅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창조의 권능을 지닌 존재여도 그렇게 거대한 별의 모든 것을 창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과정에서 힘을 소모하게 되면 승냥이 같은 놈들이 가만히 있을까.
그럴 리 없다.
피 냄새를 맡은 상어들이 달려들듯, 신이 피를 흘리면 가장 먼저 물어뜯는 것은 신도들이다.
천은 결정해야 했다.
인을 중심으로 한 상대파와 협력을 하고 판타지아를 되살리거나, 새롭게 이주할 별을 만들거나.
천은 후자를 택했다.
인을 못 믿었고, 신도들도 못 믿었다.
아무리 천이 대단하다 해도 별 하나를 창조하는 데에는 온전히 자신의 힘을 사용해야 하지만, 새로운 별을 만드는 데에는 신도들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었다.
모두가 지쳤는데, 피를 흘리는 신을 물어뜯을 힘이 있을까.
그럴 리가.
진계를 창조하며 천과 함께했던 이들 중 충신이라 할 수 있는 이들 소수를 남겨두었고, 반란의 싹이 될 법한 이들은 모조리 제물로 바쳤다.
그렇게 해서 전쟁이 끝난 거다.
중간계는 제2대 천좌의 주인인 인을 중심으로 우리 모두가 아는 작업을 시작했고 진계를 창조하는 데 큰 힘을 사용한 천은 영면에 들었다.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진실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사실 신들의 싸움이나 인간들의 싸움이나 결국 궤는 같다.
누가 이득을 얻는가.
누가 배신을 하는가.
누가 변수가 되는가.
이권, 관계, 변수, 의지, 충신.
그게 전부다. 여기나 저기나 다를 바 없다.
그저 웃었다. 그런 내 얼굴에 천이 주먹을 박아 넣는다.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주먹 한 대를 맞았을 뿐인데 골 전체가 흔들린다. 사지가 저릿저릿하다.
땅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은 주먹을 내지른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대로 발을 휘둘렀다.
뻐어억-!
천이 그대로 날아가 보이지 않는 허공에 처박힌다. 그의 몸이 줄 끊긴 마리오네트처럼 으스러졌지만 그 상태에서도 눈빛은 살아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대가리를 터트려 버리고 싶지만 그게 또 어렵다.
나도 한계고, 저놈도 한계다.
놈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선다.
“징하네.”
[……네놈은…… 설명이 불가능한 존재다.]피식 웃었다.
“지금 이 현상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려줘?”
[…….]놈은 답하지 않았으나, 듣고 싶어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해주었다.
“네 말대로 날 때부터 시작점이 다른 놈들이 있어. 드래곤도 그렇고 네가 말하는 신의 혈족이라는 것도 그렇고, 다르겠지. 충분히 이해해. 그런데 그 모든 종들을 넘어서서 차별이 없는 게 뭔지 알아?”
손을 뻗었다.
내 손에 ‘천하검’이 생겨난다.
이건 기존에 사용하던 그 천하검은 아니었다. 그건 저놈과의 계속된 싸움으로 가루가 되어 흩어진 지 오래다. 이건 새로 만든 거다. 내 창조의 권능으로.
묵묵히 말을 이었다.
“무학이야. 무학에는 끝이 없거든. 출발선이 그렇게 다르지도 않고.”
[…….]“내가 타이탄에서 왜 무학에 매달렸는지 알아?”
[…….]“드래곤들이랑 싸우려면 그것밖에 답이 없더라고, 아니 태어날 때부터 마스터급에 달하는 괴물들을 어떻게 싸워 이겨?”
얼핏 들으면 모순되는 점이 있을 수 있으나,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출발선이 다른 것은 무학에 대한 숙련도가 아니다.
드래곤들은 태어날 때부터 마스터급에 달하는 힘을 사용하지만, 그것은 종족의 특성으로서 그저 그 정도의 기운을 어떤 식으로든 불러오는 것에 불과하다.
갓 태어난 드래곤들에게 ‘무학’이라는 것은 없다.
사용할 수 있는 기운이 다를 뿐이다.
무학에는 끝이 없다.
“그거에만 매달렸거든. 마법을 배우고…… 서클을 만들고, 온갖 사람들이 있었는데, 결국 내가 옳았네.”
천하검을 내려 베었다.
서걱.
천의 몸이 반으로 갈린다.
“내가 옳았으니, 지금 이런 싸움이 가능한 거 아니겠나.”
갈라졌던 놈의 몸이 다시 붙었다.
[……네놈이 말하는 무학의 끝에는 나도 닿았다.]“그러시겠지.”
천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저게 맞다.
그나마 마지막까지 숨겨두었던 ‘한 수’를 꺼내 들려면 지금 힘을 회복시키는 게 맞다.
나도 마찬가지고.
괜히 이런 시답잖은 대화를 나눈 게 아니다.
끝이 도달했다.
이미 시간 감각을 잊었다.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대강 짐작할 뿐이었다.
만년? 십만 년? 모르겠다.
나는 그 시간 동안 놈을 수만 번 죽였고 놈에 의해 수만 번 죽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기술이 있었다.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아껴왔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간 전체에 균열이 가 있었다.
나는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놈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서로 모든 것을 쥐어짜면 된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내던지면 된다.
결국 승자는 한 명이다.
혹은.
둘 다 뒈지거나.
놈의 몸이 다시 분열된다. 놈이 중얼거린다.
[천경지위(天經地緯).] [만법일여(萬法一如).] [일체만상(一切萬象).] [만유일체(萬有一切).]순간 놈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이 공간 안으로 퍼졌다. 균열이 갔던 공간이 좁혀진다.
시공간이 일그러진다.
느낄 수 있었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인과율의 결과가 내게 꽂혔다는 것을.
이 한정된 공간의 규칙이 완전히 변했다.
숨을 쉬게 되면 나는 죽는다.
몸을 움직이면 나는 죽는다.
입을 열면 나는 죽는다.
내 눈이 주변을 훑는다면 나는 죽는다.
세상에 존재한다면 나는 죽는다.
행동 하나하나에 제약이 걸린다. 인과율을 틀어버려야 한다.
아니.
틀 수가 없었다.
웃고 말았다.
비장의 한 수가 뭔가 했더니, 저거였구나.
평소의 나였다면 인과율을 완벽하게 틀어버리는 식으로 대응했겠지만 지금은 힘들다.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손을 뻗었다.
천하정…….
잠깐.
사고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진다.
천하정폐, 이것이 내 영역 전개가 맞을까.
아니다.
이건 내 영역 전개가 아니다.
닫혀 있던 기억들이, 무학의 끝에 도달했던 과거의 경험들이.
싸우느라 떠올리지 못했던 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재정립된다.
두 눈이 번뜩였다.
천하정폐라는 이름은 더 이상 맞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을 흐리는 이름이다.
나의 그것은 육도선인의 그것과 다르다.
그의 무학과 나의 무학은 동일 선상에 있지 않다.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시간을 멈춘다는 것은 절대적이지만 인과율을 피할 수는 없다.
시간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법칙을 멈추는 것.
세상의 흐름에서 완전히 빗겨나갈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내 영역 전개다.
미소가 그려진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쩌어어엉-!!
세상이 멈춘다. 인과율도 멈춘다.
당황한 천이 보인다. 웃고 말았다.
과거 나는 영역 전개를 펼쳐 본 적이 없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게 아니다.
나는 영역 전개를 펼쳤다.
그저, 수준이 닿지 않아 펼쳐지지 않았던 것이다.
내 영혼은.
이미 진리를 찾아 그 끝을 추구하고 있었다.
봉인된 기억 속에서 무학과 진리의 끝에 도달했던 내가 깨달았던 것.
임시로 붙여두었던 그것이 내 영역 전개가 맞았다.
그것의 본질이 드러난다.
절대적인 존재.
신, 그 위의 존재.
만상을 쥘 수 있는 존재.
손을 뻗었다.
내 손이 천을 가린다.
그렇게.
꽈아아아아앙-!!
귀가 멀 듯한 굉음과 함께 공간이 무너진다.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멍했다.
여기가 어딘지 순간 헷갈렸다.
수풀이 무성하다. 저쪽에는 거대한 나무들도 있다. 구석에는…… 항아리 같은 것이 보인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그 항아리 너머에.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직 안 갔어?”
헬레나다.
헬레나가 울면서 내게 달려왔다. 나를 그대로 끌어안았는데.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쿵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입에서는 피가 터져 나왔다.
헬레나가 크게 놀란다.
“괘…… 괜찮으세요?”
“쿨럭, 좀…… 비켜줄래. 뭐 이리 무거워졌어.”
“저는…… 진시후 님이 죽은 줄 알…….”
헬레나가 말끝을 흐린다. 그녀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녀가 내 명치를 밟더니 뛰어올랐다. 쿨럭, 또 입에서 피가 터져 나온다. 바닥에 드러누운 채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뼈만 남은 기이한 형체의 천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죽여…… 버릴…… 것이다……!]그런 그의 얼굴을.
꽈아아앙-!!
헬레나가 주먹으로 후려쳤다.
머리가 사라진 천의 육체가 뒤로 넘어간다.
천천히.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헬레나가 고개를 돌렸다.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묻고 싶은 게 많은데…….”
묻지 못했다.
달려온 헬레나가 내게 키스했기에.
자리에서 다시 엎어졌다.
머지않아 정열적으로 키스하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다.
그래서.
“얼마나 지났어?”
“……85년 하고도 38일이요.”
“그걸 다 세고 있었어?”
“시간도 말해줄까요? 4시간 33분 21초.”
말을 정말 안 듣는 여자다.
그런데 이만큼 나를 원하던 여자도 없던 것 같다.
근처에 있던 나무에 등을 기댔다.
그녀가 웃는다.
모든 것이 끝났다.
중간계는 안전할 것이고, 진계도 안전할 것이다.
서로는 서로의 세상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것이다.
“헬레나야.”
“네.”
“이제 돌아가자.”
한 손으로 안겨 있는 헬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는 나를 위해 좀 살아 볼 생각이다.
판타지아로 재건된 지구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긴 했으나. 아마 큰 문제는 없을 거다.
누나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곳은 머나먼 과거 속에 존재했던 폐허가 된 판타지아가 아니다. 새롭게 재건 된 판타지아다.
흩어진 별들에 생명이 깃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천 개의 별들이 하나로 뭉쳤다. 같을 수가 없다.
그런데 85년이면…….
할머니가 되어 있겠네.
* * *
수천 개의 별들이 하나로 뭉치고,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혼란이 찾아왔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쟁이 일어났다.
같은 이름을 쓰는 존재.
같은 영혼을 쓰는 존재.
그리고 다른 방식이지만 결국은 같은 갈등.
이 모든 것들을 해결하는 데에는 구심점이 필요했다.
진송이는 행동했다.
전쟁을 일으키는 이들을 죽였고.
모략을 꾸미는 이들을 죽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죽이고 또 죽였다.
필요한 살생이었다.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았다.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패왕의 길을 걸었다.
그녀는 세상의 정점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존재였으며, 유일한 ‘무극경’의 강자였다.
모든 혼란을 수습하고.
세상 전부를 발아래에 두었다.
그렇게 해서 건국되었다.
판타지아.
초대 황제,
태조(太祖), 진송이.
그녀는 영웅이었다.
모든 전쟁을 끝내고, 건국하고, 모든 왕들과 지배자들의 충성 서약을 받았다.
연명서에 그들이 피로 찍은 손도장이 지금도 선명하다.
이 모든 일에 40년이 걸렸다.
그 이후로 45년이 더 흐른 게 지금이다.
진송이는 별 #2403의 대한민국에 있던 구원 길드 건물 옥상에 있었다.
그녀를 호위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늑대인간들과 뱀파이어들이 그들이었다.
특히 그중 인상적인 남자가 있었다.
그가 진송이에게 다가온다.
“폐하, 날이 춥습니다.”
진송이가 빙긋 웃었다.
판타지아 제국의 총리, 라자루스에게 그녀가 말했다.
“그런 거 못 느낀 지 꽤 됐는데, 모르셨나 봐요?”
“모를 리가요. 그냥…… 아시잖습니까. 제가 왜 이러는지.”
이곳은 과거 별 #2403의 대한민국에 있던 구원 길드 건물 옥상이었다.
진송이는 매일, 어떤 일이 있어도 항상 이곳에서 최소 1시간을 보낸다.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세 가지 경우다.
그곳에서 동귀어진했거나, 패배했거나, 혹은 아직도 싸우고 있거나.
대책 없이 기다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진계와 다시 연결되는 순간까지 힘을 길러야 했다.
침략이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으나.
책임을 지는 자리에 있다는 것은 항상 최악을 대비해야 한다.
진송이가 손을 내밀었다. 기다렸다는 듯, 구석에 있던 돼지가 그녀에게 다가온다.
돼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죽었을까요?”
“…….”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라자루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폐하의 생각이 맞겠지요. 같이 기다리겠습니다.”
진송이는 단 하루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내 동생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웃으며 돌아왔던 녀석이다.
나이가 서너 살 많은 사람들 다섯과 싸워서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조차 웃으면서 왔다.
이 세상 모두가 믿지 않는다 해도 진송이는 믿고 싶었다.
가족이니까.
내 동생은 돌아올 거다.
그렇게 2시간이 흘렀다.
안타깝게도 오늘은 아닌가 보다.
몸을 돌리려던 진송이가 멈칫한다.
온몸의 솜털이 삐죽 솟는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진송이의 앞에 착지했다.
진송이의 입가에서 미소가 피어오른다.
85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울어 본 적이 없는데.
참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옆에서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라자루스에게 말했다.
“거봐요. 내가 말했잖아요. 안 죽었을 거라고, 꼭 돌아올 거라고.”
이 세상 하나뿐인 남자가 걸어온다.
농담 삼아 물었다.
“도플갱어는 아니지?”
진시후가 빙긋 웃었다.
“도플갱어겠어?”
“아닌가 보네.”
“그런데 결혼은 안 했나 봐.”
안 했다.
여전히 진송이는 독신이었다.
서로를 마주한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침묵했다.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두 눈도 바라보고, 계속 바라보았다.
의심은 없다.
말없이 서로 끌어안았다.
진송이가 울면서 진시후의 등을 쓰다듬었다.
“고생했어.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