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633
◈ 난세 (3)
* * *
―양천.
―불초 숭례천중궁(崇禮天重躬) 양천(敭泉)이 태황태후 전하께 문안을 여쭙니다.
―내상은 어떤가.
―근래 들어 만전에 이르렀습니다. 화제의 신검단주에게 들를지, 곧장 장성으로 향할지 고민하던 참이지요. 광중궁(光重躬) 어웅이 신검단주에게 잠시 몸을 의탁했다고 하여… 헌데, 전하.
―말하라.
―소생은 바람 왕의 눈길에 몸 둘 바가 없음을 말씀드렸사온데….
―이리 말을 건넨 것이 불쾌하다?
―소생이 어찌 감히.
―네 무례는 불문에 부칠 테니, 마경 백뢰협(帛瀨狹)으로 가라. 시급을 다투는 일이니 온 힘으로 경공을 펼쳐야 할 것이다.
―시급을 다툰다 하셨습니까?
―입신검의 계승을 저지하라. 명나라 사직(社稷: 나라와 조정)이 모두 동의한 일이다.
―그 칼의 상징성이 북제에게 온전히 넘어가는 것을 경계하시는…?
―추후에 구두로 교지를 내릴 테니, 신검단주직을 망검 용희명에게 귀속시켜라. 권위보다는 명분을 앞세워야 할 것이다. 지금의 신검단은 이가 빠진 검. 그들이 회복되기 전까지는 네 존재만으로도 큰 압박이 될 터다.
―소생이 조심스럽게 간언 드리기로, 몹시 옹졸한 처사… 오, 끊어졌군. 죽지 못해서 사는 고목 늙은이.
* * *
영생에 가까운 삶이 약속된 칠사도.
흑룡강(黑龍江: 아무르강)의 지류 인근에서 삼만 대군을 맞닥뜨렸다. 동시에 모든 것이 흑도고궁에 최대한 늦게 닿도록 힘썼다.
실로 압도적인 숫자의 창칼과 도끼, 그리고 포문에서 터져 나오는 기파의 향연까지.
잠시나마 천재지변을 막은 격이다.
스스로의 구명절초마저 꺼낼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고도 무공군세가 지닌 거병(巨兵)의 해일에 휩쓸릴 뻔했다.
돌연 남제의 의념이 강대한 북새풍처럼 번지지 않았다면, 정말로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백뢰협(帛瀨狹)의 신검단 진지였다.
백수십에 이르는 혈왕적가.
그중 상당수가 칠사도의 신들린 싸움을 고스란히 눈에 담은 지 오래다. 그녀는 혈왕의 혈육이 맞았다. 혈통에 대한 의심은 나오기도 전에 사그라들었다.
“혈귀 중에서도 혈귀다. 그 광기, 압도적인 전투 감각, 연배가 무색한 절세지경의 무위…….”
백발의 미남자가 말했다.
칠사도의 침상 옆에 그림처럼 다리를 꼬고 앉은 채다.
이 순간 그녀의 뺨에 손을 갖다 대었다가 멈칫거리길 천천히 반복하는데, 그럼에도 칠사도의 촘촘한 속눈썹이 들려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경이로운 무력으로 삼만의 정예 무공군세에 맞선 이후였다. 그녀의 몸 상태가 정상일 리 만무했다.
새하얀 살갗은 무인의 완전무결을 상징하는 것마냥 한 줄기의 상처도 없이 매끄러웠지만, 그것은 재생의 공능 때문일 뿐이다.
전쟁이 막 멎었던 시점의 칠사도는 혈인(血人)인에 가까웠다.
우두커니 선 채로 의식마저 날아가 있었던 그녀를 혈왕이 데려왔다.
“그래… 혈염교주 백락이 후계자로 탐할 만했다. 긴 세월, 아주 긴 세월 동안 이 아이를 보지 못할 만했어.”
혈왕이 스스로 느릿하게 고개를 젓는다. 어떤 눈부신 재능이 일가(一家)의 단란함을 파탄 내는 것은 난세에 흔한 일이었다.
사마외도가 힘을 부풀리는 방식은 그랬다. 군부의 강제적인 징발과 다르지 않았다.
진혈지체의 상실.
혈왕적가의 고수들이 깡마른 이유다. 척박한 북방 땅에서 사람을 먹지도, 사람의 피를 탐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격조에 미친 귀족으로서 혈염교를 굉장히 혐오했고, 그 같은 기조는 마경에서도 유지되었다.
한쪽에서 흑발적안의 여인이 묻는다.
“북제의 오른팔이 혈귀였어요. 혈염교 쪽 인물일까요?”
칠사도와 닮은 동시에 그녀보다 부드러운 얼굴선을 지닌 모습. 혈왕의 후계자인 한편 칠사도를 친동생으로 둔 적이서였다. 이 순간 무심한 얼굴에 작은 감회가 어려 있었다.
“아닐 것이다.”
천천히 고개를 젓는 혈왕. 기이하리만치 매끄러운 백발의 끝단에서 윤기가 물결친다. 순수한 혈통에 가까울수록 짙게 타고나는 마성(魔性)이었다.
“입황성 신검단에 보혈대란 곳이 있다. 이처럼 명나라의 황립방파는 쓸모만 있으면 혈귀조차 중용하는 집단… 그래서 천하제일이다.”
적이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신경은 여전히 반박귀진의 혈귀에게 쏠려 있었다. 북제 휘하의 신검부대주 진명조.
“그 잡혈 사내, 기이한 영성을 품은 것 같았어요.”
“내가 확실히 느꼈다. 분명히 혈염교주 백락의 상단전 신(神)이었느니라. 즉, 북제의 오른팔이 교주를 죽인 것이다. 추후에 반드시 대화해야 할 일이니 기억해 두거라.”
“교주를…!”
적이서의 불그스름한 안광이 풍랑에 섞인 핏물처럼 찰랑일 때쯤, 칠사도의 뺨에 닿기 직전까지 내려간 혈왕의 손은 새하얀 손아귀에 소리 없이 잡혔다.
칠사도였다.
“죽으려고?”
그녀가 갈라진 음성으로 묻는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누운 모습도 그대로다. 보는 이에게 무(武)의 귀신마냥 전율을 일으키는 면모였다.
하지만 혈왕의 얼굴엔 웃음이 번졌다.
“네 상단전이라면 천륜을 느끼고 있겠지. 아비의 맥을 살펴보거라. 네 모친을 처음 만났을 때, 네 언니가 세상에 나왔을 때, 갓 난 너를 봤을 때와 같다.”
“…….”
“너를 잃은 뒤로는 맥박이 이처럼 뛰지 않았다. 이제야 우리 왕가가 완전해졌음이다. 참으로, 참으로 그리웠다, 내 아가야.”
소름 끼치도록 부드러운 음성이 막사를 채운다. 오래전부터 삶의 목표에 대한 혈귀의 집착은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었다.
혈왕에게는 스스로 꾸린 일가(一家)의 완전함이 그랬다.
북왕 신분으로 잠시나마 정연신에게 협력한 이유다. 존귀한 혈왕적가의 숙원이 작은 막사에서 이루어진 셈.
사아아―
불현듯 일어난 바람이 혈왕의 입꼬리처럼 꿈틀거리는 중이다. 북방 자연체에 한없이 다가간 내공의 흐름 때문인데, 당연히 혈왕의 공력 파동이었다.
“난 양친이 없어.”
불현듯 칠사도의 음성이 웃음기 어린 바람 줄기를 가라앉힌다. 그녀의 말은 매끄럽게 이어졌다.
“진혈교주는 스스로 완전하거든. 뒤늦게 혈육을 찾는 건 불완전성만 더하는 일이고. 난 이제 큰 조각 하나만 맞추면 돼.”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武)로 이루어진 입술이 말하는 듯했다. 순간 적이서의 안색이 변했고, 혈왕도 입을 뗐다.
“…이 아비를 보거라. 천하 남제와 북제마저 세력의 그늘에 들어앉는 세상이다. 본가는 네가 더욱 완전해지도록 떠받쳐 줄 수 있다. 듣자 하니 혈염교의 지부들은 네 손에 멸문당하여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
“양친도 없다니까?”
“무엄하오!”
장내를 지키고 있던 혈왕적가의 정예 고수들 사이에서 터진 외침이다.
곧이어 칠사도의 눈꺼풀이 살짝 들려 올라갔고, 그것만으로도 막사 내부에서 산발적으로 요동치던 기파들이 일시에 잦아들었다.
“…….”
의념으로 침묵을 강제한다. 혈염교 고금제일기재가 흡정이 아니라 상단전을 집중적으로 갈고 닦은 것처럼.
혈왕은 천천히 중얼거렸다.
“무위는 놀랍다만 기예가 이상하구나. 그러고 보니, 그 외눈도….”
동시에 칠사도는 어찌 된 영문인지 거짓말처럼 다시 눈을 꼭 감아버렸고, 바닥까지 억눌려 있던 공력 파동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쿵― 터져 나왔다.
사방팔방에 손톱자국 같은 고랑들이 남았음은 물론이다.
정연신이 신소빈과 함께 막사로 들어선 것도 그때였다.
혈왕은 어느새 산송장이 된 칠사도를 묘한 눈으로 내려다보고는 정연신에게 고개를 돌렸다. 고아한 미소를 그리고 있던 입매를 미미하게 굳히면서였다.
“북제.”
“결례를 범했습니다. 기별을 넣어도 답이 없어서….”
“아닐세.”
사락.
혈왕은 느릿하게 손을 내저었다. 동시에 하얗게 늘어뜨린 머리칼이 살짝 흔들리고, 자그맣게 물결치는 백발의 끝단에서 원인을 알기 힘든 적대감이 묻어난다.
혈왕은 어느새 자신의 팔을 놓아버린 칠사도의 손을 역으로 쥐고 있었다.
아버지의 기질이었다.
“몹시 염치없지만, 잃었던 딸의 마음을 얻고자 힘쓰던 참일세. 자네의 용무에 집중하지 못하더라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군.”
혈왕은 당장 품은 기질과 별개로 정연신을 점잖게 대했다. 흑도 대회전을 기점으로 북제란 별호가 반투신파의 북왕들에게도 통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연신의 언행도 정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따님의 몸은 괜찮습니까?”
그의 눈길이 내려앉자마자 검명(劍鳴)처럼 극도로 미미하게 전율하는 칠사도의 몸. 어떤 의구심으로 주름져 있던 혈왕의 미간도 흉년의 논바닥처럼 갈라졌다.
“진혈지체의 건강을 염려하는 것만큼 의미 없는 일은 없을 걸세. 여하간 본가는 이미 자네의 뜻대로 크게 움직여 주었네. 혹, 다른 용무라도 생겼나?”
“…멀리까지 오셨습니다. 새 보금자리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정연신의 담담한 물음에 혈왕의 입꼬리가 천천히 말려 올라간다.
혈염교 귀족마냥 사람을 현혹하는 미소인데, 어떤 혈염교의 사도와도 격이 다른 마성(魔性)을 품고 있었다.
“정말로 남제와 대등한 눈높이에서 겨루었나 보군. 언행이 닮았어. 분에 넘치는 힘을 원하는 것도 똑같군.”
“본성 산하에는 많은 명문가가 있습니다. 신가, 운가, 하후가, 유가… 모두 명예를 지녔고, 무공을 익혀야 하는지라 웬만해선 굶주리지 않습니다. 각지에서 우러러 봐주는 경우가 많은 가문들뿐입니다.”
“마가는 왜 빼나?”
“척박한 마경에서 혈왕적가처럼 격조를 지키기란 힘든 일입니다. 양양 땅으로 오신다면 크게 환영받을 겁니다.”
“입황적가가 되어라?”
혈왕의 입에 맺혀있던 웃음이 음험한 기질을 품는다. 이 순간 신검단의 진지를 통틀어 가장 만전인 절세고수의 미소였다.
“북방의 왕에게 할 말인가. 일개 협객들의 가주로 남으라니.”
정연신은 나지막이 대답했다.
“협객이 군왕보다 귀한 세상입니다.”
혈왕은 이 이야기가 얼마나 큰 고민 끝에 흘러나온 것인지 모른다.
오랫동안 은원을 맺은 신검죄수의 족쇄에 대의란 열쇠를 들이밀었다는 것도 알 수 없다. 죽은 남제와 검성, 또 신검부대주만이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정연신의 눈에 선했다.
황금빛 갈대의 물결과 흑안개로 빚어진 큰 키의 허수아비, 그리고 적막한 바람. 이 순간에도 ‘칼의 별자리’ 아래에 고스란히 새겨지고 있는 풍경이었다.
혈왕은 고개를 저었다.
“별호처럼 북방의 황제로 행세할 요량인가? 남제 외에는 감히 본가를 휘하에 두고자 했던 자가 없네. 이미 완성된 가문이었던 까닭이야!”
완성이란 말을 들은 정연신의 표정이 묘해졌다.
“저 여자의 부친이 맞군요.”
“여인, 따님, 영애. 셋 중 하나로 칭하게. 나머지는 용납하지 않겠네. 자네의 말처럼 본가가 남녘으로 터를 옮긴다면 더욱 그래야지. 이 아이에게 부왕(父王)이란 말을 듣기까지 인고의 세월이 필요한 형편이지만, 엄연히 내 슬하의 왕가 씨족으로….”
“아빠?”
찰나지간에 파고든 진혈지체의 음성이 새로운 가문을 열어젖힌다. 말 그대로 개파(開派)의 전조. 존귀한 혈통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입황적가였다.
그때쯤 정연신은 묵묵히 뒤돌아서고 있었다.
아득한 마기(魔氣)의 파동이 먼 하늘에서부터 천둥마냥 빠르게 가까워졌던 까닭이다. 명백히 소천무적 특유의 조롱 같은 기파로, 정연신이 깨어나길 기다린 움직임이었다.
이만한 근거리에 그녀의 상단전 신(神)이라면 정연신의 맥박까지 감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연신 아우, 의식이 들었으면 이 우형(愚兄: 어리석은 형)과 묵은 은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먼저 아닌가?
순식간에 내려온다.
쿠르릉!
무지막지한 파공음과 함께 천막이 송두리째 뽑혀 올라가고, 그 속으로 진명조 특유의 검붉은 잔상이 파고들어 왔다.
이변에 즉각 반응하여 정연신의 호법을 서는 움직임. 곧이어 소천무적도 희미한 털구름을 염라대왕마냥 디디며 상공에 나타났다.
[음?]새하얀 설원을 배경으로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전성기 이상의 혈염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