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Druids Live with the Beast RAW novel - Chapter (116)
드루이드가 환수와 살아가는 법-116화(116/302)
116화. 꿈은 꿈이다(4)
소름이 돋아 단아는 뒤로 물러났다. 놀란 눈으로 은호를 바라보았다.
은호는 어디로 갔을까.
정말 은호일까.
단아는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은호, 정신 차려. 여기는 꿈이야.”
“나도 이 모든 게 꿈이면 좋겠는데. 여긴 엿같은 현실이야.”
힘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날 방해할 생각하지 마라.”
단아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올렸다.
차디찬 시선이 쏟아지자 단아의 눈꼬리와 귀가 내려갔다.
“이건 은호가 아니야!”
“너는 나를 알아? 나는 나를 모르겠는데. 나는 뭘까. …뭘 하는 걸까.”
“은호는… 처음 본 나한테 도와주겠다고,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게 도와주겠고 말해준 따뜻한 인간이야!”
푸핫.
은호의 입에서 비웃음이 터졌다.
“내가? 내가 그렇다고?”
은호는 단아를 업신여기듯 바라보았다.
“정신 차려. 아니지, 정신 차리면 안 되지. 그런 건 나한테서 찾을 생각 하지 마.”
“제발, 정신 차려줘.”
단아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악몽하고 너무도 동화됐다. 얼마나 끔찍했던 순간이기에 꿈이라는 걸 자각도 하지 못할까.
“다들, 널 기다리고 있어! 아주 큰 검은 존재하고, 눈이 작은 존재하고, 다!”
“날 기다리는 건 아무도 없…….”
콰앙!
은호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바닥에 고개를 박았다.
“……은호?”
그대로 고개를 올린 은호는 따스하게 단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큰일 날 뻔했네. 멍멍이 형님하고 삐죽이가 화낼 뻔했어. 지금 화를 꾹 참고 기다리고 있는데.”
은호는 목을 조를 듯 꽉 메인 넥타이를 풀어 헤쳐 던졌다.
“미안해, 단아야.”
은호는 단아를 꼭 안아주었다.
꿈임을 자각하지 못했다고 해도 무슨 말을 지껄인 걸까.
“정말, 미안해.”
“…괜찮아. 은호가 정신 차렸으면 괜찮아. 지금 나가야 해. 내가 빨리, 빨리했어.”
“정말? 대단한데?”
단아는 낯선 칭찬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은호를 데리고 위로 올라갔다.
“울지 마, 단아야.”
“…꿈에서 나가면, 네가 나를 잊을까. 그게 너무 무서워.”
“만약에 그렇다면 다시 기억할게.”
“다시?”
“다시, 너를 기억할게. 그리고 절대 잊지 않을게.”
“…응. 응!”
은호는 힘찬 단아의 대답에 덩달아 키득거렸다.
잠깐 은호는 시선을 내려 아래를 보았다.
그렇게 끔찍했던 집이었지만, 다시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단아야. 혹시 괜찮으면 다른 애들한테 비밀로 해줄래?”
“…미안해.”
“아니야. 악몽을 꾸겠다고 한 건 나니까, 사과하지 않아도 돼. 그것보다 내 말에 네가 상처를 받은 건 아닐까 걱정되네.”
“나한테 한 말이 아니라는 건 알아. 하지만, 하지만 나 때문에 악몽과 너무 동화하고 말았어! 하마터면 악몽에 잡힐 뻔했어. 은호의 마음에 상처가 났을지도 몰라.”
“단아야.”
“……으응.”
단아는 훌쩍거렸다.
“너는 모르겠지만, 네가 오자마자 내 세계가 변했어. 색이 만들어졌어. 보자마자 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그건 아쉬웠어. 하지만 다시금 알았겠더라.”
은호는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세계를 바라보았다.
아파트고 뭐고 다 무너지고 있었다.
세계가 아주 커다란 손으로 변해 자신들에게 손을 뻗었다.
은호는 그 손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내 세계는 너희들이야.”
앞으로도 절대로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이곳으로 와 행복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는, 꺼져.”
은호는 악몽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원래 세계에 남은 미련마저 던져버렸다.
* * *
은호는 눈을 떴다.
시야 안으로 흑견과 일렉트가 보였다.
파직.
일렉트의 앞발에 전기가 맴돌았다.
저걸 사용하려고 했을까.
흑견의 꼬리가 자신의 몸을 감싼 게 느껴지자 너무 반가워 웃음이 터졌다.
‘역시 내 세계는 여기야.’
양팔을 넓게 벌려 그들을 힘껏 안았다.
“봤지? 나 아무 문제…….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은호는 웃다 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이 울렁거리는 게 무슨 상황인지 몰랐다.
“나 왜 여기에 있어?”
이어진 은호의 말에 흑견과 일렉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은호는 희미한 누군가의 흐느낌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환수가 있었다.
아주 예쁜 환수였지만,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친구야. 왜 울고 있어? 무슨 일 있었어?”
은호가 다정히 묻자 단아는 쏟아지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자신을 잃은 은호는 처음부터 따뜻했으니까.
“…안녕.”
단아의 말에 은호는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처음 본 환수였는데, 그리움을 담아 자신을 보고 있었으니까.
“멍멍이 형님. 내가, 내가 멍멍이 형님한테 맡긴 게 있지?”
은호는 흑견에게 손을 뻗었다.
“인간. 때론 모르는 게 좋을 수도 있다.”
“…어?”
일렉트가 놀란 눈으로 흑견을 바라보았다. 말이 달랐다.
“멍멍이 형님. 아까 은호가…….”
“다시 반복된다는 보장이 있는가. 이 상황이 처음이라는 보장도 있는가.”
“…그건, 없어.”
일렉트의 꼬리가 추욱 늘어졌다. 은호가 기억을 잃는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직접 보니 너무 무서웠다.
여러 생각이 났다.
흑견 말대로 이번 일이 처음이 아니라면 어떡할까.
“멍멍이 형님. 내가 맡긴 거 줘.”
“인간. 너는 저 존재 때문에 기억을 잃었다.”
흑견은 단아를 가리켰다. 단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데 저 존재를 위해서 무언가를 할 셈인가?”
“당연하지.”
은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 말에 흑견은 피식 웃었고, 휴대전화를 넘겨주었다.
“은호, 저 모래시계가 끝나면 우리도 기억이 잃는대.”
일렉트가 알려준 사실에 은호는 모래시계로 잠깐 시선을 뒀다.
서둘러 휴대전화를 살폈다.
[기억을 잃을 테니까, 적어뒀음.]웃겼다.
하지만 저 메모장에 적힌 건 모두 진실이었다.
“단아야!”
은호는 단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단아가 깜짝 놀랐다.
“내가 도와줄게. 걱정하지 마.”
“왜 또… 그 말을 하는 건데? 날 처음 본 거잖아.”
“아니, 우리는 처음 보지 않았어.”
은호는 확신을 담아 말을 꺼냈다.
단아의 품에 찬란하게 빛이 나는 동그란 무언가가 꿈의 열매였고, 단아는 정말로 울보였으니까.
“예쁘다. 왜 네가 탐냈는지 알 것 같네.”
“…은호.”
“고마워, 단아야. 날 꿈에서 데려와 줘서.”
은호는 바로 가방에서 토템을 꺼냈다.
헤어드라이어보다 자연의 바람을 흡수한 토템이 더 빨리 머리카락을 말린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평소에도 열심히 사용하고 있었다.
모래시계에 모래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비록, 기억이 없어도 단아를 보니 자신이 왜 이 무모함을 감수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주 따뜻한 환수였다.
은호는 칼마저 꺼냈다.
“놀라지 마, 단아야.”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바로 왼쪽 손바닥을 깊게 베어버렸다.
“으, 은호!”
단아가 크게 소리쳤다.
은호의 손바닥에서 새빨간 피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괜찮아.”
은호는 아무 힘도 없는 토템을 쥔 채 반대 손으로 교감의 힘을 끌어내 마치 양손으로 감싸는 듯한 형태를 취했다.
토템이 뜨거워졌다.
이미 한 번 경험했던 열기였다.
성장을 위한 열기라고 할 수 있었다.
“친구야.”
치이이이익.
손바닥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토템에서 타오르는 열기가 은호의 얼굴로 넘어온 것처럼 뜨거워졌다.
하지만 저번보다 더 감당할 수 있었다.
“자라나자.”
은호는 교감의 힘을 더 끌어왔다.
주변으로 퍼지는 빛을 따라 싹이 자라고 꽃이 피어났다.
단아가 입을 벌렸다.
봄의 냄새가 진해지고, 주변에 있는 식물이 춤을 추듯 바람이 불지 않음에도 흔들렸다.
은호의 손아귀를 따라 그저 퍼져가던 빛이 고리를 이루며 빙글빙글 돌았다.
달라진 변화에 이어 그의 귓가에 콧노래가 들려왔다.
고리를 이루며 몇 바퀴나 돌던 빛이 그의 손 위로 올라가 불꽃처럼 터져 잔잔하게 떨어졌다.
토템을 쥐었던 손을 떼자 싹이 자라나 있었다.
싹은 저번처럼 물었다.
뭐가 되길 원하냐고.
은호는 단아에게 손을 뻗었다.
단아는 흔들리는 눈으로 꿈의 열매를 주었다.
자신이 적은 메모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눈물을 잘 흘리는 마음 따뜻한 친구가, 모두에게 기억이 될 수 있도록.
은호는 꿈의 열매를 쥐어 싹을 향해 천천히 합쳤다.
-꿈이 되어 사라지지 않도록, 나는 꼭 돕고 싶어.
‘…그렇게 네가 도와줬으면 좋겠어.’
싹이 흔들렸고, 어느새 은호의 손바닥에 위그드라실이 서 있었다.
발재간을 따라 토템에서 피어난 싹이 꿈의 열매를 향해 손을 뻗듯 내밀었다.
꿈의 열매에서 나온 빛이 새싹으로 쏟아지던 그때, 은호는 묵직함을 느끼며 땅으로 내려놓았다.
힘껏 발을 내밀 듯 뿌리가 땅을 파고들었다. 점점 굵어지는 줄기를 따라 자라나던 가지가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었다.
가지를 따라 팔을 뻗듯 잎이 자라났는데 기존의 나뭇잎과 달랐다.
꼭 몽글몽글한 구름이 뭉쳐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 사이 사이마다 크지 않지만, 꽃들이 자라났다.
몽우리를 틀며 올라온 꽃은 천천히 솜털 같은 꽃잎을 내렸다.
그 중앙에 꿈의 열매를 닮은 환한 빛을 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단아가 알아버렸다.
“…꿈의 열매다!”
형태가 전혀 다른 꿈의 열매라는 걸.
따사로운 그 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꽃은 하나만 피어 있는 게 아니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수없이 자라나 빛을 내뿜고 있었다.
구름에 햇살이 살며시 묻은 그 느낌에 멍하니 바라보던 도중 은호가 말을 꺼냈다.
“손을 내밀어 봐.”
벅찬 숨소리가 들려왔지만, 단아는 저 꽃나무를 향해 천천히 앞발을 뻗었다.
도르르.
빛이 굴러오듯 단아의 앞발 위로 떨어졌다.
손아귀에 쥐어서야 단아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뚝.
빛 위로 단아의 눈물이 떨어졌다.
“이건 은호의… 꿈의 열매야.”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빛을 뿜어내던 그 꿈의 열매였다.
“모래시계가 멈췄어.”
일렉트가 앞발로 모래시계를 가리켰다.
“…정말이다. 멈췄어.”
단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모래시계를 바라보았다. 이 꿈의 열매를 쥐자 뭔가가 바뀌었다.
아직 무엇이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흑견과 일렉트가 자신을 잊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단아야.”
은호는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응.”
단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건 오직 너만을 위한 나무야.”
단아가 직접 딴 꿈의 열매일 테지. 저 꽃나무에는 자신의 힘도, 단아의 힘도 섞여 있었으니까.
“…나만을 위한 나무야?”
은호는 저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종이 탄생되었습니다.》
시야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온 태블릿이 그걸 증명했으니까.
“이러면 너는 더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사라지지 않아도 되는 거겠지?”
필요할 때마다 가져갈 수 있을 테니까.
더는 쫓기듯 누군가의 꿈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원하는 친구도 사귀고, 꿈지기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아쉬웠다.
이 모든 건 메모 적혀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단아를 기억했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래도 단아가 앞으로 그려나갈 미래를 꿈꾸니 미소가 저절로 새어 나왔다.
기억은 앞으로 채워가면 될 테니까.
“내가. 내가… 가져도 되는 거야?”
“당연하지. 이건 너의 나무야, 단아야.”
“…고마워.”
단아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나오는 건 눈물뿐이었다.
이게 꿈이 아니라니.
이게 현실이라니.
은호는 자신이 이상하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은호는 자신을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은호는 기억을 잃었음에도 자신에게 다른 삶을 주었다.
‘정말로… 날 도와줬어.’
앞으로 무엇이 펼쳐질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더 환하고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겠지.
“고마워, 은호!”
단아가 은호에게 달려가 힘껏 안았다. 단아의 떨림에 은호가 토닥거리려다 그대로 손이 추욱 땅으로 떨어졌다.
“…은호?”
“은호, 잠들었어.”
일렉트가 눈을 깜박거리며 말을 꺼냈다.
“미안해에!”
단아는 사과했다.
자신의 몸 주변으로 누군가를 재울 힘이 있다는 걸 말해줬어야 했는데.
“나는 바보야아!”
“하!”
흑견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렇게 되면 바비큐는 어떻게 되는 건지.
흑견은 어둠으로 은호를 데려갔다.
“집으로 돌아가거라.”
“어디 가게?”
일렉트가 물었다.
“연구소로 간다.”
짜증이 섞인 말을 내뱉으며 어둠 속으로 파고들었다.
일렉트는 사라진 흑견의 흔적을 멍하니 보았다.
곧 빠르게 입꼬리가 뒤틀렸다.
집을 찾아갈 수 있지만, 그래도 너무 했다.
일렉트는 밀려오는 침묵과 뭔가 시선이 느껴져 힐끔 눈동자를 굴렸다.
단아가 울고 있었다.
“…울지 마.”
“미안해에.”
잠이 들지 않으려 저 존재의 힘이 미치지 않는 범위까지 떨어져 있는 상황이라 일렉트는 뭔가 불편했다.
고개를 올려 구름처럼 몽글몽글한 나무를 바라보았다.
은호의 힘은 언제 봐도 참 신기했다.
왜 모래시계가 멈췄을까.
하지만.
“네 나무도 예쁘다? 하지만 내 나무는 더 예뻐.”
“…너도 은호가 만들어줬어?”
“내가 먼저야.”
“예쁘겠다.”
“그냥 예쁘지 않아! 내 집은 진짜, 진짜 아름답다고!”
일렉트가 꼬리를 올려 파르르 떨자 단아는 눈물을 닦으며 활짝 웃었다.
“응. 은호가 만든 거라면 그럴 거라고 생각해. 은호는 진짜 대단하니까. 그리고 따뜻해.”
“…그건 맞아.”
세상에서 뭐가 가장 따뜻하냐고 묻는다면 일렉트는 주저 없이 은호를 말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은호는 자신을 더 좋아했다.
삐죽이라는 별명은 싫지만, 오늘은 괜찮을지도.
일렉트는 그 사실에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걸 느꼈다.
“여기 기억했지?”
“응. 나랑 은호 냄새가 나서 기억했어.”
“집에 가자.”
“집? 네가 말한 그 나무 말이야?”
“아니. 우리 집. 난 집이 두 개야.”
“…정말?”
단아가 놀라며 묻자 일렉트는 으쓱거리며 앞으로 날아갔다.
그 뒤를 따라 단아가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 * *
“…아니, 멍멍이 형님. 날 위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은호는 다친 손을 내보이며 흑견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흑견이 자신을 대신해서 바비큐를 구워주다니.
“그럼 그냥 먹거라, 인간.”
흑견은 어둠으로 새빨간 고기를 은호에게 내밀었다.
“아이고, 아파라.”
은호가 손을 붙잡으며 엄살을 부렸다.
괜히 링거 거치대도 한 번 만지작거려줬다.
몸이 아픈 건 사실이었으니까.
―은호 씨. 서은호 씨!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오늘도 아윤이 온도계를 부수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단아가 본의 아니게 자신을 재우는 바람에 계획이 조금 엇나갔다.
연구소 병실에서 아윤이 나가자마자 바로 집으로 도망쳤다.
밥도 먹고, 애들도 데리고 와야 했으니까.
‘이번 도망은 최고의 선택이었네.’
“아프면 자거라!”
“하지만 애들하고 바비큐 구워 먹기로 했는데. 나 배도 고픈데. 멍멍이 형님이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우르르 손길이 느껴졌다.
“은호는 아프니까, 앉아 있어.”
폭시가 고개를 가로저었고, 레비아탐은 나무껍질을 든 앞발로 다급히 링거를 가리켰다.
“맞암! 이거 달았잖암! 이거 달면 은호는 가만히 있어야 햄!”
“멍멍이 형님이 굽고 있느니라. 은호는 먹으면 된다.”
라비가 은호의 옷에 대롱대롱 매달려 말을 꺼냈다.
“아이고, 애들이 말려서 안 되겠네.”
크흠.
은호가 다시 자리에 앉자 목에 휘감긴 일렉트가 앞발로 그의 볼을 찌르며 키득거렸다.
“은호 뭔가 치사해.”
“원래 삶은 치사한 거야, 삐죽아.”
이럴 때이기에 흑견을 부지런히 놀려줘야 했다.
화가 났는데, 뭘 어쩌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치이이이익.
고기가 구워지는 소리도 꽤 즐거웠고,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도 좋았다.
“멍멍이 형님. 고기 구워본 솜씨가 진짜 장난 아닌데? 아, 그거 좀 더 구워줘. 나는 바싹 굽는 걸 좋아해서…….”
콩!
뭔가 이마를 치고 갔다.
“……?”
은호가 놀라며 흑견을 보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게 보였다.
‘……와. 치사하게.’
아프지 않았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히히힛!”
그때, 조용히 웃음이 들려와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멀리서 수줍게 웃고 있던 단아가 쏟아지는 시선에 당황해 눈망울이 당장 일렁거렸다.
“미안해!”
눈치도 없이 웃어버렸다.
하지만 저들 모두 너무 행복해 보여서 저절로 웃음이 났다.
레비아탐의 더듬이가 움직였다.
“괜찮암. 웃어도 ?? 나도 신이 났으니깜!”
고기는 먹지 못하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레비아탐은 두 손에 쥔 나무껍질을 보다 단아를 보며 활짝 웃었다.
단아도 고기를 먹지 못하면 가장 맛있고, 고소한 나무껍질을 좋아할지도 몰랐다.
두 손으로 쥔 채로 단아에게 달려갔다.
“잠시만!”
은호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먹을…….”
레비아탐이 단아 근처로 오자마자 그대로 앞으로 철푸덕 쓰러졌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미안해에!”
단아가 눈물을 뚝뚝 흘렀다.
말을 하는 걸 또 깜박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