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Druids Live with the Beast RAW novel - Chapter (146)
드루이드가 환수와 살아가는 법-146화(146/302)
146화. 그것 또한 다 지나간다(5)
‘뭐지? 뭐지…?’
산북은 혼란스러웠다.
인간이었다.
할아버지가 저런 형태를 인간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인간이 이곳에 있을까.
‘…뭐, 뭐라고 했더라. 인간을 만나면 할아버지가 뭘 하라고 했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갔다.
인간이 올 때마다 늘 숨어 있었기에 이렇게 가까이 만난 건 처음이었다.
“친구야? 괜찮아?”
“…하, 할아버지! 할아버지!”
산북은 놀라며 뒤로 움직였지만, 돌에 막혀서 더는 나아가질 못했다.
“갑자기 놀라게 해서 미안해.”
은호는 허둥지둥하는 산북을 향해 사과했다.
얼마나 놀랐으면 저럴까.
산북은 사과에 행동을 멈추더니, 은호를 물끄러미 보았다.
“…할아버지가 인간은 우리 말을 못 한다고 했는데?”
“아. 나는 알아들을 수 있어.”
은호가 웃자 산북은 갑자기 밀려드는 쑥스러움에 고개를 파묻었다.
놀라서 다급히 할아버지를 부른 것도 들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너무 부끄러웠다.
“친구야. 할아버지가 널 기다리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시켰어?”
“아니, 부탁받았어. 널 데리고 와달라고. 엄청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어.”
“나 안 가.”
산북은 고개를 휙 돌렸다.
그 대답에 흑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기껏 찾아왔더니 왜 가지 않겠다고 저러는 건지.
혹여나 싶어 윈디드가 흑견을 힐끔 바라보았다.
“우리 친구. 할아버지 대신 내가 와서 속상했어?”
“…….”
산북은 은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거짓말쟁이야.”
“친구를 꼭 찾아주기로 약속했나 보다.”
“맞아! 내가 어디에 있든 할아버지는 날 찾을 수 있다고 했는데, 할아버지는 못 찾아. 나는 맨날 할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데.”
투정이 섞인 소리에 은호는 속으로 키득거렸다.
할아버지 산북을 찾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은호는 아예 엎드려 손주 산북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친구를 얼마나 속상하게 한 걸까?”
“많이. 진짜 많이!”
손주 산북은 앞발을 크게 크게 펼쳤다.
툭 튀어나온 입과 커다란 눈망울에 담긴 화는 누가 봐도 ‘나 화났어’하고 자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할아버지가 친구한테 속상한 말을 했어?”
“…어떻게 알았어?”
산북은 고개를 더 빼꼼히 내밀어 은호를 바라보았다.
“속상함이 보이는데?”
“너도 아는데, 할아버지는 왜 몰라? 할아버지가 나를… 싫어하나 봐.”
“그렇지 않아. 할아버지가 널 정말 아낀다는 걸 가장 잘 알잖아?”
“하지만. 하지마안! 나는 할아버지랑 여기서 계속 살고 싶은데, 할아버지는 자꾸 나보고 떠나래. 나는 하나도 이해가 안 가는데, 그래야 한다고 해.”
산북은 말을 꺼낼수록 감정이 복받쳤다.
모르는 얼굴로, 낯선 말을 꺼내는데, 뭔가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마저 느꼈다.
“역시 저 아이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말이었나 봐. 어떻게 생각해, 친구?”
윈디드가 흑견을 슬쩍 건드리려고 하자 흑견은 옆으로 물러섰다.
절대로 좁혀지지 않는 그 거리를 보며 윈디드는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윈디드와 흑견을 잠깐 쳐다본 은호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에 안도하며 산북에게 물었다.
“그래서 친구는 도망친 거야?”
“응. 할아버지가 할아버지 같지 않았어.”
얼굴을 숙인 채 산북은 고갯짓했다.
“혹시, 무섭기도 했어?”
걱정을 담아 따뜻하게 바라보자 산북은 조금 더 기어 나왔다.
“너 왜 이렇게 내 마음을 잘 알아?”
“그래? 그거 기쁜데?”
은호는 웃으며 자연스럽게 산북을 쓰다듬었다.
아직 많은 환수를 봤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산북은 다른 환수보다 좀 더 특이했다.
어떤 힘을 쓰는지, 어떤 성격인지, 그런 것보다 ‘여행’이라는 그 자체에 모든 게 쏠렸으니까.
태어나서부터 쭉 여행하고, 원하는 장소에 흙으로 사라지는, 말 그대로 떠돌이가 아닌가.
할아버지 산북은 이미 덩치가 커졌고, 이곳에서 사라지려고 터를 잡은 것 같았다.
시간이 없다는 것도 그런 의미이고, 곧 땅으로 사라질 걸 생각해 손주 산북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 걸까.
“있잖아.”
산북은 은호를 힐끔 보더니 괜히 근처 돌멩이를 만지작거렸다.
“응.”
“…할아버지가 나 진짜 많이 걱정했어?”
“그럼. 물론이지.”
은호의 대답에 산북의 얼굴에 또 수줍음이 드러났다.
“혹시, 할아버지가 평소에도 자주 걸어 다녔어?”
“아니. 맨날 누워 있어. 옛날에는 그래도 조금씩 걸었는데, 요새는 더 많이 자. 그땐, 진짜, 진짜 즐거웠어!”
산북의 얼굴에 깃든 설렘을 보자 은호는 가슴이 꽉 막혀오는 것만 같았다.
윈디드 말대로 무언가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어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할아버지 산북이 이걸 몰랐을 리가 없었다.
‘다 알았는데, 조바심이 난 걸까.’
두 환수 사이에는 애초에 접점이 없었다.
―땅이 된 산북은 또 다른 산북을 낳으며 주변 땅을 정화합니다.
태블릿에 적혔던 그 말대로라면 할아버지와 손주라는 관계 자체가 만들어질 수가 없었다.
즉, 서로 남이란 소리였다.
그럼에도 둘은 서로에게 애틋했다.
은호는 여러 감정을 미뤄둔 채 손주 산북에게 제안했다.
“그럼, 친구야. 잠깐 하늘 좀 날아볼까?”
“하늘?”
산북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이 났다.
“이모랑 아저씨도 나 많이 태워줬는데, 나 하늘은 못 날아봤어!”
설레는 저 표정에 윈디드가 눈치껏 걸어와 날개를 펼쳤다.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은호에게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었다.
“할아버지가 얼마나 널 좋아하는지 알아볼 기회야. 그렇지, 삐약아?”
은호의 제안에 윈디드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늘에서 보면 오늘 할아버지가 얼마나 많이 걸었는지 알기에 아주 좋은 기회지. 널 태워다줘도 될까?”
“아저씨! 나 볼래! 볼래!”
산북은 신이 나는지 배를 깔고 빙그르르 돌았다.
“그럼, 친구야. 삐약이랑 잠깐 보고 있어.”
“인간은 같이 안 가?”
“나는 할아버지한테 잠깐 들리고 올게. 그래도 널 만났다는 말은 해야 하니까. 너도 이 이상 걱정 끼치게 하고 싶지 않잖아.”
“……응.”
산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욱’하고 나왔지만, 할아버지를 걱정시키려는 건 아니었다.
“…그냥 날 찾아주고, 미안하다고 말해줬으면 했어.”
그렇게만 해줘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 텐데.
“그럼, 그 흔적을 볼까, 작은 친구?”
윈디드는 앞발을 뻗으려다 주저했다. 날카로운 손톱이 가득했으니까.
“응응! 출발!”
“내가 올려다 줄게.”
은호가 산북을 들어 몸을 낮춘 윈디드의 등에 내려다 주었다.
“꽉 잡고.”
“응! 꽉 잡을게.”
산북은 배시시 웃었다.
“고마워, 삐약아.”
은호는 윈디드를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냈다.
나중에 설명해달라는 눈을 하며 윈디드는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
“…무슨 생각인가?”
흑견이 입을 열었다.
“태블릿 씨가 알려준 정보에 따르면 산북의 크기에는 제한이 없다고 나와 있어. 제한이 없다는 건 한계가 없다는 소리잖아? 커지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똑같이.”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저렇게 커진 존재를 줄일 수 있단 말인가?”
“모르겠어. 그걸 물어보려고.”
은호는 흑견의 털 같은 어둠을 붙잡고는 살짝 머리를 기댔다.
“저 둘, 남이야. 그렇다고 가족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야. 그냥 조금 더 같이, 오래 지내게 하고 싶어. 이건 내 욕심일까?”
“왜 인간답지 않게 주저하는가? 내가 무어라 말해도 해볼 참이 아닌가.”
흑견은 엎드리며 콧바람을 내쉬었다.
저 고집쟁이가 어디 갈까.
“맞아.”
은호는 실실 웃으며 흑견의 등에 올라탔다.
“태블릿 씨. 산북의 크기를 줄이는 방법도 있을까요?”
《존재합니다.》
희망찬 대답을 들으며 흑견이 발을 굴렸다.
* * *
허망함이 담겨 있는 것처럼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던 산북이 밀려오는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친구야!”
은호였다.
손을 흔들며 방긋 웃는 저 얼굴을 보자 세상을 가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무사해!”
다른 그 어떤 말보다 가장 필요한 소리를 언급했다.
“저, 정말…….”
산북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휘청거리는 은호의 행동에 입을 다물었다.
‘……아, 깜박했다.’
은호는 밀려드는 통증과 어지러움에 머리를 붙잡고는 몸을 덜덜 떨었다.
코밑으로 떨어지는 뜨거움에 허탈한 웃음이 났다.
잠깐인데, 이렇게나 아플 줄이야.
산북 주변으로 환수들이 왜 도망갔는지 이렇게 또 이해하게 될 줄이야.
“인간. 그 힘을… 두르지 않았는가?”
흑견이 은호를 내리며 다급히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 호기심에 풀었으면, 진짜 죽었겠네.’
은호는 바로 교감의 힘을 퍼트렸다.
코피를 쓱 닦고는 흑견에게 속삭였다.
“죽을 것 같은데, 죽진 않아.”
떨리는 손으로 흑견을 토닥거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 입꼬리를 올렸다.
“…정말이야, 친구야. 손주는 정말 무사해!”
은호의 대답에 금세 요동치는 두 눈동자와 함께 목소리가 아주 옅게 흘러나왔다.
“같이… 왔는가?”
은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말에 산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 아이가, 내가 싫어졌다고…….”
“친구야. 네가 손주한테 한 그 말, 무슨 소리인지 알았어. 나는 이해했지만, 그 아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일렀어.”
“내게 얼마나 시간이 남았는지 모른다네.”
“아직 한참 남았어.”
“그렇지 않다네. 나에게 남은 시간은…….”
“아직 많아.”
은호가 확신을 담아 웃자 산북은 그가 다른 소리를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손주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잖아?”
땅을 밟았다는 이유로 산북은 덩치가 수없이 커졌다.
날개가 없기에 땅을 밟지 않지 말라는 건 살아가지 말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다만, 아플 수 있어.”
은호는 주저했다.
산북이 커진 이유는 흙으로 이루어진 등껍질 때문이었다.
산북은 걷기만 해도 땅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데, 도리어 산북 본인이 불행해지는 건 너무도 우스운 게 아닌가.
“…그건 불가능하다네.”
산북은 무겁던 입을 열었다.
이제 그 방법을 말하려던 은호는 숨을 삼킨 뒤 물었다.
“방법을… 알고 있었어?”
“우리는 땅의 바람으로 탄생했다고 들었다네. 땅이 움직이지 못하니, 대신 움직여 이곳저곳을 살피라고. 그래서 몸에 여러 정보가 쌓여서 커지는 거라고. 이 정보를 비워줄 존재가 있었는데,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네.”
정보를 비운다는 게 정확히 와닿지 않았지만, 은호 자신이 태블릿을 통해 본 정보는 하나였다.
―산북의 등에서 자라난 식물들은 모두 등껍질인 흙과 생명을 같이 하기에 가득 움켜쥐고 있습니다. 그들을 내려오게 지시하십시오. 산북의 등이 아닌 땅에 뿌리를 뻗으라 지시하십시오. 이 과정에서 산북이 고통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산북의 등에 있는 식물에게 지시를 내려라.
이걸 할 수 있는 건 지금으로서는 자신뿐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거 혹시, 자연의 대리자를 말하는 거야?”
다른 말로 드루이드라고 했다.
은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산북이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어떻게 알았는가?”
“…으음, 그거 나라고 하더라.”
“…….”
묘한 침묵이 흘렀다.
은호는 산북과 함께 흑견의 시선마저 쏠리자 어색하게 웃었다.
“누, 누, 누구한테.”
산북은 올라가려는 목소리를 다시금 억누른 채 말을 꺼냈다.
“들었는가…?”
“아주 예쁜 호수를 가진, 내 친구한테서?”
세티아가 그렇게 알려줬다.
다시금 밀려오는 침묵에 은호는 더 당황스러웠다.
드루이드라는 존재의 의미가 얼마나 깊길래 저럴까.
“친구야. 일단 당황하는 건 두 번째로 미뤄야 하지 않을까? 내가 한 번도 안 해봐서 솔직히 이게 될지 자신이 없긴 해.”
은호는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드루이드고, 자연의 대리자고 간에 할아버지와 손주를 오래오래 볼 수 있게 해주는 게 제일 중요했다.
“아프다고 하니까, 너무 괴로우면 말해줘.”
은호는 산북의 등으로 고개를 돌렸다.
산북의 시선이 따라왔지만, 은호는 집중했다.
저기는 기존 땅과 달랐다.
새로운 땅 같은 느낌이라 그런지 몰라도 저곳에 자란 식물들은 자신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어딜 봐도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다.
‘신기하네.’
은호는 입꼬리를 올렸다.
“식물 친구들아.”
자신의 부름에 다들 눈을 초롱초롱 뜬 것처럼 순수함을 담아 바라본다는 게 느껴졌다.
묘한 감정이었다.
왜 다를까.
그런 의문을 잠깐 멈춘 채 은호는 다음 말을 꺼냈다.
“이 친구를 위해서 이제 땅으로 내려올래? 이런 부탁을 하게 되어서 정말 미안해.”
식물들에게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생을 산북의 등에서 살아왔는데, 갑자기 터전이 바꿔 달라고 하니 얼마나 놀랄까.
산북의 등에 있던 식물들이 저마다 잎을 뻗어왔다.
은호를 위로하려는 듯 머리카락을 건드리고, 볼을 쓰다듬고, 어깨를 두드리는 등 다양한 반응이 일어났다.
은호는 놀라며 주머니에 있는 위그드라실을 조심스럽게 데려왔다.
자고 있는지 미동이 없었다.
‘위그드라실이 한 것도 아니야.’
늘 자신을 미워하던 식물들이 달라지자 꼭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환수와 다른, 벅찬 감정이 가슴 속에 밀려왔다.
식물들은 산북의 등에 있는 흙을 뿌리로 쥔 채 산북의 뒷발을 타고 일 열로 내려왔다.
참 낯설고 신기한 상황에 산북조차 눈을 떼지 못했다.
식물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할 만큼 몸이 가벼워졌으니까.
시선의 높이고, 땅을 가리고 있던 자신의 그림자도 작아졌다.
“아프지 않아?”
은호의 물음이 들려오자 그제야 산북은 정신을 차렸다.
몸이 뜯겨나간 고통이 왜 아프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은 기쁨이 너무나도 컸다.
보는 시각이 낮아진 만큼 다시 또 많은 걸 손주와 함께 볼 수 있었으니까.
“괜찮다네.”
산북은 흘러오는 감정을 막지 못했다.
사실 자신은 그 무엇도 준비되지 않았다.
손주와 헤어질 준비도, 손주를 세상에 혼자 보낼 준비도.
이곳에 터를 잡게 된 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아버지. 나는 여기가 좋아요. 이곳에서 땅이 될래요.
아들처럼 길러온 그 아이가 자신보다 먼저 땅이 되고 말았다.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몰랐다. 조금 더 둘러봐도 될 텐데, 더 많이 봐도 될 텐데.
그렇게 훌쩍 손주만 남기고 떠나버렸다.
‘……그랬구나.’
산북은 그제야 자신이 손주에게 어떤 말을 해버렸는지 알아버렸다.
사랑하는 존재를 너무도 빨리 떠나보냈기에 그저 조바심으로 내뱉은 말일 뿐이라는 걸.
손주와 마주하기보다는 먼저 간 아들을 따라가고 싶었다는 걸.
“나는, 정말 괜찮다네.”
손주의 가슴을 할퀴었는데, 뭐가 더 아플까.
은호는 고요한 호수처럼 깊어진 산북의 눈빛에 여러 감정을 느꼈다.
그중 가장 또렷한 건 후회와 반성이었다.
“걱정하지 마. 손주는 아직 죽음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
너무 어릴 때, 죽음이 무엇인지 알아버리면 두 번 다시는 어린아이가 되지 못했다.
그저 어린아이의 껍질을 덮어쓴, 어른도 되지 못한 가엾은 존재가 될 뿐이었다.
“…정말인가?”
“정말이야.”
은호의 대답에 산북이 그제야 활짝 웃었다.
산북의 몸집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자 흑견이 은호를 물고는 아래로 내려왔다.
아직 흑견보다 5배는 더 컸지만, 원래 크기의 절반 이상이나 줄어들었다.
계속 줄어들 것만 같았던 산북의 크기는 멈췄고, 덩달아 식물들의 움직임도 멈췄다.
이 이상은 위험하다고 알리는 것처럼 더는 내려오지 않았다.
은호는 그제야 산북이 꾹 참은 고통을 마주했다.
“아프면 말을 해달라고 했는데, 왜 참았어?”
산북은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다. 안타까움에 은호의 목소리가 커졌다.
“괜찮다네. 이건 아픔이 아니니. 정말, 정말, 그대에게 고마울 따름이라네.”
산북은 은호에게 인사하고는 몸을 돌렸다.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작아진 몸으로 누군가를 시선에 담았다.
“할아버지!”
언제 화가 났냐는 듯 손주가 크게 산북을 불렀다.
윈디드가 할아버지 산북에게 다가오다 말고, 잠깐 멈칫했다.
크기가 왜 이렇게 줄어들었는지 몰랐다. 은호가 뭘 했을까.
윈디드가 산북에게 가까워질 무렵, 손주 산북은 힘차게 뛰었다.
할아버지 산북의 머리에서 굴러 등으로 떨어졌다.
많이 해봤는지, 키득거렸다.
자연스럽게 할아버지 산북의 머리로 기어와 물었다.
“할아버지. 나 찾았어?”
“그럼. 엄청 찾았지.”
“나 위에서 봤다? 할아버지가 엄청 많이 움직인 거 다 봤다? 내가 본 할아버지 중에서 가장 많이 움직였어.”
밀려드는 기쁨이 너무도 컸다.
할아버지가 정말, 정말 자신을 좋아한다는 게 그 발자국으로 느껴졌으니까.
“그런 말을 해서 미안하구나.”
“내가 더 화내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봐줬다. 다음에는 그러면 안 돼.”
“고맙구나. 정말 고맙구나.”
“그런데 할아버지.”
“그래.”
“왜 이렇게 작아졌어?”
“우리 아가랑 더 많이 움직이려고 작아졌지. 저쪽 꽃밭에도 가보고, 계곡에도 들어가고, 아가 뒤를 졸졸 따라다니려고 작아졌지.”
“정말?”
손주 산북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정말이구나. 우리 손주랑 보고 싶은 게 너무도 많아서 작아졌단다.”
“그런데 땀은 왜 이렇게 많이 나?”
“…우리 손주 찾느라고, 숨이 너무 차서. 정말 잘 숨던데?”
“내가 진짜, 진짜 잘 숨는다고 했지?”
“그래.”
“하지만 다음에는 잘 보이는 곳에 숨을게. 그래야 우리 할아버지 숨이 덜 차지.”
손주 산북은 뒷발을 흔들며 배시시 웃었다.
해맑은 웃음에 할아버지 산북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
무엇이 슬퍼서 저 어린 것을 두고 그렇게 빨리 떠나려고 했는지. 저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
“…할아버지 왜 울어? 나 때문이야?”
“아니. 너무 좋아서. 우리 손주가 너무 좋아서.”
“아닌데? 내가 더 좋은데? 내가 더, 더 할아버지를 좋아하는데?”
이제야 할아버지 산북은 작은 몸으로 힘껏 안아주는 그 온기를 선명히 느꼈다.
“…아가.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자꾸나.”
할아버지는 산북은 떨리는 목소리로 손주에게 말했다.
손주의 두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오래오래.
모든 걸 다 떠나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으니까.
“응!”
손주는 활짝 핀 웃음과 함께 힘차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