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Druids Live with the Beast RAW novel - Chapter (155)
드루이드가 환수와 살아가는 법-155화(155/302)
155화. 알려줄게(2)
은호가 놀란 표정을 하자 위그드라실이 다가와 발끝에 매달려 손을 톡톡 두드렸다.
위로일까.
은호는 자리에 앉았다.
위그드라실이 위로 올라와 은호의 무릎에 누웠다.
다리를 흔들며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저희는 눈이 없습니다. 볼 수도 없지요. 마찬가지로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저 당신에게 밀려오는 말과 행동을 느껴서 판단을 합니다.
“…아, 내 말을 듣는 게 아니라, 느낀다는 거지?”
맞습니다. 저희와 당신 사이에 맹세는 피로 이어져 있고, 그 피에 담긴 힘은 너무도 익숙한 그리움을 몰고 왔습니다. 그래서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당신을 원망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자연의 대리자가 있는데, 그 자연의 대리자가 너희들을 어떤 이유로 배신했고, 내가 지금 오해를 받고 있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저희와 나눈 그 맹세는 영구적이니 따를 수밖에 없지만, 그 마음은 다를 테니까요.
“이거 상당히 억울하네? 난 그 배신자가 아닌데.”
은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도 않은 일로 오해를 받는 건 질색이었다.
당신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부디, 우리의 슬픔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알아달라고 하지만, 사실 은호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덤터기를 쓴 셈이니까.
“그런데 너는 내가 그 존재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안 거야?”
전 그분을 봤습니다. 다시 돌아온다는 마지막 약속 역시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하고 다른 느낌을 받은 거구나.”
그렇습니다.
“…하.”
은호는 길게 숨을 내쉬다 나무에 기댔다.
뭘 잘못했나 싶었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다니.
이 나무가 기억하는 걸 보면 아주 까마득한 옛날에 벌어진 것 같았다.
“이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은호는 나무를 만진 손을 꼼지락거리며 생각했다.
우선 그게 먼저이지 않을까 싶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오해가 풀리고 있으니까요.
“풀려가고 있다고? 왜?”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당신의 힘을 받은 이 아이가 있으니까요. 분명히 다른 존재라는 걸 점점 알아갈 겁니다.
나무는 위그드라실을 바라보는 것처럼 머리를 흔들었다.
꽃잎이 떨어지자 위그드라실은 내려와 꽃잎을 잡으려 이리저리 움직였다.
무슨 의미인지 은호는 몰랐지만, 그간 꽉 막혔던 게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나를 싫어한 게 아니었구나.’
은호는 시선을 돌렸다.
천천히 다른 식물들을 눈에 담았다.
이유 없이 미움을 받는 건 좋은 감정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니 여러 식물이 전보다 더 싱그럽게 느껴졌다.
‘…나도 오해한 거고.’
살면서 오해가 만들어내는 많은 일이 있었다.
오해가 풀리는 일도 있지만, 풀리지 않은 채 영원히 끝이 나는 것도 있었다.
후자는 마음에 수많은 상처를 내어버리곤 했다.
그렇기에 은호는 이 오해를 풀고자 바닥으로 손을 뻗어 식물들에게 먼저 사과했다.
“미안해. 너희가 나를 싫어한다고 오해했어.”
위그드라실이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과하지 말라고…?”
은호의 물음에 위그드라실은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뭔가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만, 은호는 웃으며 위그드라실을 쓰다듬었다.
“누가 먼저 사과하면 어때? 오해를 푸는 게 가장 중요하지. 그렇지?”
은호는 바닥을 몇 번이나 두드렸다.
저 오래된 나무가 저들에게 어떤 말을 한 건지 몰라도 사방에서 줄기가 뻗어왔다.
은호가 손을 뻗자 손에 휘감겼다.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은호는 자신의 손을 흔드는 이 행동이 화해를 향한 첫걸음 같아 눈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식물 친구들에게 자신을 소개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은호는 처음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반가워. 나는 서은호야.”
은호가 손을 감싼 가지를 흔들며 인사했다.
다른 가지들이 또 뻗어오며 은호는 아주 큰 나무로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 있는 다른 식물들이 자신에게 마음을 돌린 건 모두 다 저 나무 덕이었다.
“친구야. 네 이름을 알려줄래?”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 누구도 불러주지 않고, 부를 이유도 없고, 불릴 일도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내가 붙여줘도 될까?”
그렇게 해주신다면 영광입니다.
나무가 천천히 흔들렸다.
“…아산은 어때?”
그냥 자연스럽게 떠오른 이름이었다.
좀 더 멋진 이름이 떠오르면 좋은데, 왠지 잘 어울렸다.
“이상하면 말해줘. 다시 생각해볼게.”
나무는 가지를 뻗었다.
마치 두 팔을 뻗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무는 은호를 안았다.
…감사합니다.
머리에 울리는 목소리가 떨려왔다.
긴 시간 동안 이곳에 머물렀지만, 이보다 더 기쁜 순간은 아마 앞으로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잔잔히 퍼지는 그 말에 은호 역시 앞으로 아산이 될 나무를 안아줬다.
* * *
“…안녕.”
은호가 하이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가만히 앉아서 꼬리를 흔들던 하이프는 그를 보자마자 축 늘어트렸다.
딸랑.
꼬리에 달린 방울이 울렸다.
“매일 내 얼굴 보는 게 지겹지도 않아?”
“그렇게 까칠하게 말하지만 않으면 정말 좋을 텐데.”
“네가 좋아할 만한 행동을 내가 왜 해야 하는데?”
“내 바람을 말했을 뿐이지, 꼭 해달라고 강요하는 건 아니야. 너도 나만 보면 투덜거리잖아?”
“여기에 갇혀보면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을 텐데?”
“그건 네 잘못이고. 내가 날이 선 말을 하면 너도 기분이 나쁠 거면서.”
“해.”
하이프는 얼굴을 찌푸렸다.
“뭘 하라는 거야?”
“날이 선 말을 속 시원하게 내뱉으라고. 맨날 실실 웃는 얼굴보다 낫겠네.”
“그래? 상처받아도 난 모른다?”
“상처? 내 마음은 이미 갈가리 찢겼는데, 뭐가 더 아플까. …아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자면 너, 왜 자꾸 웃는 건데?”
하이프는 은호를 빤히 보았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것보다 웃는 게 낫잖아.”
“너 내가 어떤 힘을 쓰는지 몰라? 오늘은 그 검은 개도 데려오지 않았고.”
“몰래 왔지. 그래서 오래 있을 순 없을 거야.”
태연하게 대답하며 저 인간은 또 자신의 옆에 앉았다.
하이프는 은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너 원래 안 웃었잖아.”
“폭시도 아무 말이 없었는데, 너도 보여?”
은호는 본인의 얼굴을 살짝 만졌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어느새 습관이 됐다.
“보여. 그러니까 가식 그만 떨어.”
하이프가 세게 말했음에도 은호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다.
“얼마 전에는 가식일지 몰라도 지금은 가식이 아니야. 그래도 널 웃는 얼굴로 보고 싶으니까.”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
“잘 알지. 솔직히 폭시를 건드린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나.”
“그런데 왜 이러는 건데? 나한테 화를 내란 말이야! 소리치고, 분이 풀릴 만큼 때려!”
“그러면 네 마음에 편해져?”
“그래! 네가 이렇게 오는 게 너무 불편해서 죽을 것 같아!”
하이프가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치다 이내 주먹을 쥐었다.
저 인간만 오면 불편했다.
너무 마음이 요동쳐서 짜증이 났다.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십 번이나 했다.
“네가 왜 불편한지 알아?”
“네가 와서.”
“나한테 미안해서 그런 거야.”
은호는 웃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인상이 빠르게 바뀌었다.
이상하게 밤이 찾아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너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야. 네가 했던 일이 너무도 커다랗게 변해서 감당하기가 어려워졌으니까. 지금도 도망치고 싶어?”
“도망칠 생각이었으면 일찌감치 쳤겠지.”
“아니, 너는 어떤 식으로든 도망칠 수 없어. 내가 허락하지 않을 거니까.”
이 숲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단호한 소리와 함께 하이프는 또 수많은 시선을 느꼈다.
밀려드는 압박감에 하이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네가 수많은 친구를 구했겠지만, 결국, 그건 네 욕심이었어. 네 머릿속에 있던 건 복수뿐이었을 테니까. 그 결과가 어땠을까 생각하니 죽을 맛이지?”
은호의 목소리는 더는 따뜻하지 않았다.
마치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귓가가 간지럽고, 이상했다.
“네가 아무렇지도 않게 정신을 조종했던 환수들이 떠올라 미칠 것만 같지?”
비웃는 것 같았지만, 은호는 웃지 않았다.
“그게 죄책감이라는 거야.”
은호는 손을 뻗어 하이프의 가슴을 가리켰다.
쿵. 쿵.
어쩐지 가슴이 요동쳤다.
“너를 괴롭히려고 왔냐고? 아니. 나는 너한테 이 죄책감과 고독을 알려주려고 찾아왔어. 너는 앞으로 내가 찾아오지 않는 시간에 아주 짙은 고독을 느낄 테니까.”
하이프는 너무도 차가운 밤이 되어버린 은호를 보며 조금 전 발언을 후회했다.
왜 웃지 말라고 그랬을까.
진짜 맞는 것만 아픈 게 아니었다.
흘러들어오는 말이 너무 아팠다.
어느새 자신은 정말로 저 인간을 눈에 담고 있었다.
있다 없으니 마음이 더 시렸다.
인간이 두고 간 그 꽃을 온종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하는 건데?”
하이프는 떨리는 목소리를 이어갔다.
“그래야 네가 포기할 테니까.”
“뭘……?”
“너 자신을 죽이는 일 말이야.”
은호가 눈을 깊게 감았고, 다시 떴을 때, 조금 전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죽을 생각이었지?”
“…….”
하이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지 말라고. 네가 어떤 미련이든 잡을 수 있게 하려고 그랬어. 죄책감과 고독은 가장 짙은 미련이니까.”
이미 하이프는 강한 복수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희석할 수 있는 건 죄책감과 고독이라는 감정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너를 너희의 왕에게 보내지 않은 이유는 네 바람을 너 대신 내가 이뤄주고 싶어서야. 너는 그게 끝나면 죽을 테니까.”
“…왜 그걸 아는 건데? 왜 네가 알아버린 건데?”
탈을 뒤집어쓴 것 같은 얼굴이 천천히 무너졌다.
가장 들키기 싫은 저 인간에게 이 마음을 들켜버렸다.
“왜 알겠어?”
은호가 웃었다.
하지만 하이프를 쓰다듬어주지 않았다.
“살아. 죽지 말고.”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어. 나는 끝을 각오하며 여기까지 온 거니까.”
“늦지 않았어. 아직 되돌아갈 수 있어.”
“나는… 너무 많은 존재의 정신을 괴롭혔어. 나도, 내가 감당이 안 돼. 몇 년간, 죽이고 싶은 그 인간의 얼굴만 떠오르는데, 내가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돌아오더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더라고.”
이 역시 겪어봤다는 얼굴에 하이프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 인간이 대체 얼마나 깊은 절망을 본 걸까.
“말을 봤어.”
“말…?”
“일 때문에 찾아간 곳인데, 거기에 말이 있더라고.”
지금은 볼 수 없는, 제주도를 찾아갔다.
지치고, 여전히 회색빛이 물들었던 세상에서 그 말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뛰어노는 말 한 마리를 보는데 묻어두고, 지웠던 기억이 생각이 나더라.”
“무슨 기억인데?”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가 기억났어. 그때, 내가 어떤 생각을 했을 것 같아?”
하이프는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대답은 뻔했다.
하지만 그 뻔한 대답이 본인이 아니라 타인의 것이라고 하니 입이 무거워졌다.
그 감정이 이토록 무거웠을까.
“그런데 한순간, 정말 아름다운 존재를 보니, 낯선 감정부터 몰려오더라.”
은호는 흑견을 떠올렸다.
짙고 검은 그 몸에 둘린, 찬란하고 아름다운 금빛에 눈이 멀 것만 같았다.
“궁금했어. 너희가 어떤 존재인지 너무나도 궁금해지던 차에 노란 꽃을 받았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자신에게 온 낯선 따스함이었다.
“……살아가고 싶더라. 잘 살아가고 싶었어. 아주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나를 찾고 행복이 뭔지 알고 싶어졌어.”
나른함이 담겼던 은호의 눈은 강한 생기가 담긴 듯 반짝거렸다.
번지는 미소에 어쩐지 하이프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저 인간을 꽉 끌어안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휩쓸었다.
“너도 그런 날이 올 거야. 그러니까, 너 자신을 던지는 복수는 그만두라고.”
은호는 말을 끝내고 평소처럼 실실 웃었다.
“아, 친구야. 전부터 궁금했는데, 그 방울은 누구한테 받은 거야?”
“…내 남편한테 받았어.”
하이프는 꼬리를 만지작거렸다.
―인간이 달던 건데, 너무 예쁘더라. 오다가 네가 생각이 나서 가져왔어. 인간의 돈은 없지만, 보석도 주고 왔으니 훔친 게 아니야.
해맑게 웃던 남편의 미소가 생각이 났다.
왜 그간 잊어버렸을까.
가장 소중한 기억인데.
하이프는 꼬리를 소중히 쥐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떨림을 따라 눈가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아직 그 무엇도 흘리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숨을 내쉬다 입을 열었다.
“…알려줄게.”
“뭘?”
“네가 원하는 정보를 주겠다고.”
하이프는 각오를 다지며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