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Druids Live with the Beast RAW novel - Chapter (164)
드루이드가 환수와 살아가는 법-164화(164/302)
164화. 그건 환상이었을까?
은호는 멍하니 호수를 보았다.
벌써 그런 계절이 됐는지, 아침부터 진눈깨비가 내려왔다.
비가 내릴 때 우앙이 찾아온 것처럼 다른 환수가 찾아올까 싶었는데 그러기에는 이제 곧 진눈깨비마저 멎을 것만 같았다.
“왜 여기 그러고 앉아 있는가?”
세티아가 당근을 먹으며 물었다.
“친구한테 당근도 주고, 답답해서 찾아왔지.”
“다쳤나?”
“조금? 거의 다 나았는데, 아윤 씨가 보내줄 생각을 하지 않네. 아, 아윤 씨는 어느새 내 전담 의사가 됐는데, 아주 무서워. 손에 물건을 움켜쥐면, 가루가 된다니까?”
세티아는 하소연하는 은호를 빤히 보았다.
“그래서 지금 여기로 도망쳤는가?”
“도망이라니. 애들도 데리고 왔는데? 이럴 때는 도망이 아니라 소풍이라고 해야지.”
은호는 앞을 가리켰다.
세티아가 있는 이곳은 다른 곳과 달리 춥지 않았다.
호수로 들어가 신나게 물장구치는 폭시와 레비아탐, 그리고 라비가 보였다.
물이라는 말에 일렉트는 기겁해서 도망쳤지만, 전기 토템으로 유인해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은호는 바로 왼쪽을 보았다.
일렉트가 전기 토템을 소중히 안은 채로 입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불만인 건지, 전기 토템이 좋은 건지 헷갈릴만하지만, 꼬리 끝이 흔들리고 있으니 이건 좋은 거였다.
“삐죽이도 있고.”
은호는 일렉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리고.”
은호는 오른쪽을 보았다.
세티아와 자신 사이에 흑견이 누워있었다.
“멍멍이 형님도 있는데?”
흑견은 기가 찬 듯이 은호를 보고 있었다.
따라오긴 했지만, 참 당당하다 싶었다.
“한 존재는 어디 갔는가?”
세티아가 묻자 은호는 깜짝 놀랐다.
“어, 어떻게 알았어?”
윈디드도 같이 오려고 했는데, 하이프 문제로 잠시 자리를 떠났다.
―이번에 도움이 되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말썽꾸러기.
가기 전에도 윈디드는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이번에는 도심 속이라 어쩔 수가 없었는데.
“어렴풋이 그 냄새가 났다.”
“그 냄새?”
은호는 헷갈렸다.
하도 자신에게 여러 가지 냄새가 난다는 말을 많이 들었으니까.
“전기?”
일렉트가 물었고.
“왕.”
이어진 세티아의 짧은 대답에 은호는 앞으로 기어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왕의 냄새가 난다고?”
“네가 가진 냄새는 아니다. 그저 몸에 묻었을 뿐이니까. 이 그리운 냄새는 틀림없이 왕이다.”
“왕의 냄새가 난다니. 늙더니, 코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흑견이 세티아를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왕도 보지 못한 꼬맹이가 할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병아리하고 인간의 냄새뿐이다.”
“은호의 냄새는 왕이 가진 냄새와 아주 흡사하지. 하지만 그 미묘함이 존재한다. 이래서 꼬맹이는 안 된다. 고집만 세긴.”
세티아는 당근을 입에 물며 흑견을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그러면 친구는 진짜로 왕을 봤어?”
은호의 눈이 반짝거렸다.
왕이라는 소리에 일렉트 역시 은호의 머리 위로 날아와 세티아를 보며 물었다.
“봤어?”
“봤다.”
“정말로? 정말로 봤어?”
은호가 물었고, 일렉트가 덩달아 ‘정말?’이라고 물었다.
“너도 보지 않았는가.”
“내가? 내가….”
은호가 당황하며 묻다 말고, 세티아가 앞발로 호수를 가리키자 그는 고개를 돌렸다.
레비아탐과 폭시와 라비가 배만 보인 채 둥둥 떠 있었다.
은호와 일렉트가 놀라며 달려갔고, 세티아는 당근을 씹으며 호수를 바라보았다.
곧이어 아주 큰 웃음소리가 그쪽에서 들려왔다.
적막함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드니 참 기쁘기 그지없었다.
세티아는 날이 선 시선을 느끼며 흑견을 보았다.
“은호에게 왕을 언급한 게 불만인가?”
“그렇다.”
“왕께서 은호를 모를 거라 생각하는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알아도 얽히게 하고 싶지 않다.”
“은호가 위험에 빠진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저 인간은 우리 일에 눈이 돌아간다. 본인이 얼마나 다쳤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얼마 전 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지금은 아니지만, 숨조차 제대로 쉬는 게 어려워 보이면서도 참 잘 돌아다닌다 싶었다.
“나라도 그럴 테지.”
예상하지도 못한 세티아의 말에 흑견은 눈썹을 올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너도 그렇지 않은가. 은호가 인간들의 손에 무너진다면 가만히 보고 있을 텐가?”
“…미쳤는가?”
흑견은 세티아가 내민 가정조차 불쾌했다.
“꼬맹이 너라면 저 인간을 위해 약속마저 깨버리겠지. 그렇지 않나?”
“…….”
흑견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지 말거라. 아무리 어려도,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은 깨면 안 된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깨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는가?”
“자연의 대리자가 사라진 이 세계에서 어떻게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우리가 어떻게 이곳으로 올 수 있었는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왕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생각해본 적 있냐고 묻는 것이다.”
세티아의 시선은 달랐다.
모든 걸 꿰뚫고 있는 듯한 눈동자가 대체 무얼 보고 있는지 몰랐다.
“사라진 자연의 대리자가 나타났다. 이 흐름을 꼬맹이가 네가 막겠다고…….”
“닥치거라.”
흑견은 자리에서 일어나 날을 세웠다.
분노가 가득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인간을 보는지, 우리 일에 끼어들지 않게 하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안단 말인가?”
“나는 너를 이해한다. 네가 왜 이렇게 하는지, 이해한다.”
“날 동정하지 마라, 늙은이!”
“동정이 아니라, 이해다. 꼬맹이.”
흑견과 세티아는 한참이나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니, 둘 다 왜 그래?”
수상쩍은 분위기에 은호가 달려와서야 흑견이 고개를 돌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멍멍이 형님? 어디가?”
“돌고 오겠다.”
흑견은 머리를 식히려 숲으로 걸어갔다.
이게 다 무슨 일이 몰라 세티아를 보았다. 세티아는 측은함을 담아 흑견의 뒤를 눈으로 좇았다.
“내가 잘못한 일이다.”
“친구가?”
“본의 아니게 저 꼬맹이를 자극하고 말았구나.”
“아무래도 내 이야기였나 보네.”
“어떻게 알았는가?”
“…나랑 멍멍이 형님이랑 닮은 구석이 좀 많으니까.”
“가엾은 아이다. 어린아이가 되지 못하고, 성체가 되어버렸다.”
“알아. 하지만 가엾다고 생각하면 진짜로 그렇게 되는 거니까, 적당히 그렇게 봐줬으면 좋겠어.”
부드럽지만, 강한 부탁에 세티아는 앞발을 뻗어 은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자기 왜 그러냐는 시선에 세티아는 손주를 바라보듯 은호를 눈에 담았다.
“너는 참 기특하다.”
묘한 느낌에 은호는 말을 섣불리 잇지 못했다.
뭔가 진짜 할아버지가 쓰다듬는 것만 같았다.
“어, 어쨌든, 내가 왕을 언제 봤다는 거야?”
당황한 은호의 물음에 세티아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왕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좋다. 듣자마자 묵은 감정을 모두 씻겨나갈 정도의 소리지.”
“…어?”
“기억이 났는가?”
세티아가 가볍게 웃었다.
―반갑습니다, 자연의 대리자이시여.
처음 자신에게 그 말을 꺼냈던 존재였다.
목소리가 너무 좋아 귀가 다 간지러웠던 그 기억이 생각이 났다.
초능력을 검사했을 때였다.
―잠깐, 당신을 느껴, 벅찬 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그만 이곳으로 불렀습니다. 놀라게 했다면 너무도 죄송합니다.
“…그 목소리가 진짜 왕이었다고? 정말로?”
은호가 멍한 표정으로 묻자 세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호의 입이 벌어지자 세티아는 다시금 웃었다.
“어지간히도 네가 반가웠던 모양이지.”
은호는 그 말에 미끄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옆에서 당근을 씹어 먹는 소리가 들렸다.
아삭아삭.
‘어쩐지 목소리부터 다르더라니.’
어쩌면 환청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다른 환수를 통해서 본 왕은 어딘가 냉정하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점점 생각이 멀어진 탓도 있었다.
“…친구야.”
“혹시, 왕께 뭐라고 했는가?”
“……반말했는데. 좀 재수 없게 말한 것 같기도 하고. 무서운… 분은 아니지?”
“다정한 분이다.”
“그래?”
세티아의 말에 은호는 길게 한숨을 내쉬다 그대로 드러누웠다.
하늘이 살짝 흐렸지만, 이 정도는 괜찮았다.
“다음에는 직접 보면 좋겠네.”
“왕과 만나면 무슨 말이 하고 싶은가?”
“그냥 너희 좀 덜 울게 해달라고. 그게 전부야.”
은호가 시선을 돌려 호수를 보았다.
또 레비아탐과 라비, 폭시, 그리고 일렉트까지 호수에 둥둥 떠 있었다.
폭시가 은호를 보자마자 앞발을 흔들었다.
“은호!”
조금 전에 빠진 줄 알았는데, 누워서 하늘을 보려고 그랬다는 소리에 웃음밖에 나지 않았다.
같이 하자고 제안했고, 솔직히 혹했지만, 등의 상처를 보고 아윤이 기겁할까 그만뒀다.
은호는 손을 흔들며 세티아를 보았다.
“친구야. 딴 건 몰라도 당근은 진짜 맛있지?”
“맛있구나.”
“또 올게.”
은호가 웃자 세티아는 갑자기 그를 안아주었다.
세티아에게는 포근한 풀 냄새가 났다.
“다정한 아이야.”
“…네 눈에는 어리겠지만, 내가 인간 나이로 어엿한 성인이야. 좀 민망하긴 하네.”
“고맙구나.”
“뭘.”
은호 역시 세티아를 토닥거려주었다.
지금 가장 힘든 건 세티아일 테니까.
* * *
“…서은호 씨.”
가을이 오자 은호는 뻣뻣해지는 몸을 느꼈다. 읽고 있던 책을 내렸다.
“……아무 곳에도 안 나갔어요.”
허.
어디선가 흑견의 기가 찬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해, 멍멍이 형님!’
은호는 그림자로 시선을 돌렸다.
“이상하게도 찔리는 표정입니다.”
“아, 아니에요. 갑자기 와서 진짜 놀랐을 뿐이에요.”
“노크했습니다. 꽤 여러 번이나요. 책을 읽다 말고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 환수의 왕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혹시 가을 씨는 본 적 있나요?”
“박사님은 보셨을 겁니다.”
“진짜, 치사하네요.”
은호의 대답에 가을은 잠깐 웃었다.
태호나 은호나 똑같았다.
은호의 시선이 오자 가을은 다시 무표정한 채 제안했다.
“서은호 씨, 저랑 잠깐 가시겠습니까?”
“진짜 나가도 되나요?”
“그렇습니다. 정아윤 씨에게 허락받았습니다. 잠깐의 바람은 좋을 거라면서요.”
“아윤… 씨가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은호는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에요?”
은호는 이내 가을에게 물었다.
이렇게 순순히 자신을 보내줄 사람들이 아닌데, 나가자고 제안하고 있지 않은가.
“혹시, 연구소에 무슨 일이 생겼나요?”
“맞습니다.”
목소리를 낮춘 가을의 대답에 은호는 그게 뭘까 생각했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봐도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환수 밀렵꾼과 관련된 일은 지금 환수 관리국에서 처리하고 있었으니까.
“아!”
은호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뒷말을 꺼냈다.
“구출해야 할 환수들이 있는 거죠?”
며칠 전에 지혜가 와서 6곳을 털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구출된 환수들이 환수 연구소로 오기까지 기본적으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환수 밀렵꾼이 팔아넘긴 환수의 숫자와 데리고 있는 숫자 등 확인해야 할 것들이 많다고 했다.
자신도 폭시 일로 무척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그 일은 박사님께서 말씀해주실 겁니다.”
“그 일이 아니라면… 뭘까요?”
“연구원들과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가을이 말을 꺼냈다.
표정이 살짝 굳어져 있었다.
“그럼, 가을 씨가 곤란하잖아요.”
예상하던 은호의 태도와 달랐다.
상관없는 일에 왜 자신을 부르냐는 차가움까지 보일 것만 같았는데, 아니었다.
가을은 흘러내린 안경을 올리며 잠깐 생각했다.
태호가 얼마 전에 자랑하지 않았는가.
―은호 씨가 나한테 약간 벽을 허물었어. 이게 기분 탓이 아니라니까?
‘박사님의 기분 탓이 아니었네.’
가을은 은호를 보았고, 그는 잠깐 눈을 가늘게 뜨다 다시 말을 꺼냈다.
“많이… 곤란한가요?”
“무척 곤란합니다. 제 힘으로도 닿지 않으니까요.”
연구원들이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냥 붕 떠버렸다.
“가을 씨 힘이 통하지 않는다고요?”
“…하이프 문제로 제 이야기 역시 박사님께 들었겠지만, 그 일은 명백히 제 실수입니다.”
“네? 형은 가을 씨가 적응할 때쯤에 벌어진 일이라고 했는데요?”
“박사님이 절 감싸준다고 꺼낸 말입니다. 처음에 서은호 씨한테 제가 환수 연구원의 여러 편의와 전반적인 부분을 담당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억하십니까?”
“그랬죠. 앞처리와 뒤처리도 담당하고 있고요.”
“그렇습니다. 저는 그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연구원의 배신으로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똑같은 일을 반복할 순 없습니다.”
가을은 옷자락을 쥐었다.
하이프 일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구원이 사라진 이 상황에 초조했다.
“추적이 되지 않습니다. 또 배신일 수 있고, 어쩌면 환수가 얽혀 있을 수도 있기에 서은호 씨와 함께 가는 게 가장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내렸습…….”
“가요.”
은호는 가을의 말이 끝나기 전에 그제야 웃었다.
“가을 씨가 곤란하다는 데 가야죠.”
“환수와 얽혀 있기도 하고요?”
“뭐, 그렇기도 하죠.”
착.
은호는 책을 닫았다.
“지금 가면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