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Druids Live with the Beast RAW novel - Chapter (168)
드루이드가 환수와 살아가는 법-168화(168/302)
168화. 그건 환상이었을까?(5)
니르바나는 입을 벌렸다.
이곳에서 공간이 열리다니.
마치 왕과 같은 힘이었다.
아니.
인간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만둬.”
니르바나는 은호를 말렸다.
신비한 힘을 가졌다는 건 충분히 알았다.
“혹시 왕도 저쪽이 아닌, 내가 가진 힘과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는 거야?”
―물론이지. 나의 탄생을 가장 먼저 알았고, 내가 살아갈 수 있게 이곳으로 안내한 분이니까.
왕은 니르바나를 이곳으로 안내했다고 했다.
―기억해. 이곳에 날 찾아오는 유일한 분이니까.
왕은 니르바나를 찾아옴에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잊지 않을 방법이 존재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널 잊지 않아 보려고.”
가을이 향한 그곳으로 가는 게 아닌, 공간 자체를 넘어오면 어떻게 될까 궁금했다.
어쩌면 왕도 이런 꼼수를 썼을 수도 있었다.
“말해줘, 친구야.”
은호는 알고 싶었다.
“그게 맞다면, 뭘 어쩌려는 거야?”
“널 잊지 않으려고.”
니르바나는 저 대답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또 찾아올 때 민망하게 빈손으로 오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그래서 물어봤지.”
은호가 활짝 웃자 니르바나는 낯설고, 또 낯선 감각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대라는 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거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기억을 잃지 않으면 또 오겠다는 거야?”
“그럼.”
“왜? 네가 그래야 할 이유는 없잖아.”
“없지. 그런데 너와 있었던 이 짧은 시간을 기억할 수 있음에도 굳이 지워야 할 이유도 없잖아?”
확고함이 담긴 소리에 니르바나는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리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헛수고라는 걸 왜 모를까.
어차피 기억을 잃으면 이 노력은 헛된 게 될 뿐이었다.
“괜찮아, 친구야. 말해줘도 돼.”
“…왜?”
니르바나의 물음에 은호는 많은 말을 삼켰다.
외로워 보인다는 말은 니르바나를 동정하는 것만 같았고.
또 만나고 싶다는 말은 너무 갑작스러울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간절해 보였던 그 모습을 외면할 수 없다고 말하면 이 역시 이해되지 않는 소리로 치부될 게 뻔했다.
“이곳에 더 많은 꽃이 필 테니까.”
은호는 가방에서 씨앗을 꺼내며 웃었다.
대답은 이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둡고, 어둡기만 한 이곳이 조금은 찬란해져도 되지 않을까.
니르바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빛을 품은 꽃이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네 생각이… 맞아.”
니르바나의 대답에 은호는 주저하지 않았다.
억지로 열어 닫혀버린, 공간을 다시 열었다.
끼이이익.
니르바나가 가진 영향인지, 이 공간의 여파인지 몰라도 불안정해 보였다.
은호는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공간이 닫히자 니르바나는 흑견을 보았다.
“…왜 말리지 않는 거지?”
“원래 그런 인간이다.”
“뭐?”
“그리고 속인 건 너다.”
공간 자체의 비틀림으로 발생하는 이 현상을 알려주지 않는 건 니르바나였다.
“인간이 뭘 하든 잔말 말고 입 다물어라. 분명 신난 얼굴로 올 테니까.”
저런 존재가 뭐가 좋다고 이렇게까지 하는지 몰랐지만, 그게 은호였다.
“하지만 인간이잖아?”
“그냥 인간이 아니다. 너도 분명, 눈을 빼앗길 테니까.”
흑견은 귀를 쫑긋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끼이이익.
불쾌한 소리를 내며 은호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공간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꽃잎이 휘날렸다.
니르바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있는 은호를 보았다.
“이거 꼼수 맞았어!”
은호가 당당하게 소리쳤다.
“니르바나. 나는 널 기억했어. 멍멍이 형님이도 기억할 거고.”
은호는 손가락 세 개를 올렸다.
“이제 널 기억하는 존재가 늘어났지?”
은호가 씩 웃었다.
니르바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공간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꽃내음이 콧속으로 들어왔다.
바스락거리는 풀 소리가 귀를 간질였고, 하늘이 반짝거렸다.
“또 올게.”
니르바나는 그 소리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먹먹함이 금방이라도 올라올 것만 같았으니까.
* * *
니르바나는 어둡고, 어두웠던 이곳을 밝게 비춰주는 꽃을 따라 가지각색을 뽐내는 여러 꽃나무를 바라보았다.
진짜 어처구니없는 인간이었다.
기어코 이곳에 식물을 심고 갔다.
대체 얼마나 심었는지 몰라도 걷고 또 걸어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보고도 이게 말이 되는 힘인지 몰랐다.
하지만 눈시울을 찌를 만큼 아름다웠다.
“…예쁘네요.”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르바나는 누구인지 알기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존재의 등장으로 어둡던 이곳은 아침처럼 환하게 빛이 났으니.
“제힘에 휩쓸린 어떤 인간이 그런 겁니다. 참 이상한 인간입니다.”
니르바나는 은호를 떠올리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저한테 ‘또 올게’라고 말한 것도 모자라 ‘또 보자’라고 말했습니다. 사그라졌던 기대를 일으키는데 미웠습니다. 전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요.”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어떤 악의도 없을 테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복잡해집니다. 기대는 저한테 독이니까요.”
“말과 달리 엄청 기뻐하고 있는 게 보이는데요?”
정곡을 찌르는 물음에 니르바나는 괜히 헛기침했다.
“그분은 그대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어지는 말에 니르바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아시는 인간입니까?”
“알고 있습니다. 직접 만나고 싶은 분이기도 합니다.”
“직접 만나러 가면 되잖습니까.”
“지금 갈 수도 없고, 섣부르게 접근해 미움받을까, 두렵네요. 그저 이따금 소식을 들으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누가 감히 당신을 미워합니까, 왕이시여?”
니르바나는 고개를 돌려 찬란한 빛과 마주했다.
“많이요. 점점 날이 선 감정이 밀려오는 게 느껴집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왕이 걸어오자 바람이 불 수 없음에도 꽃나무가 흔들렸다.
가지마저 뻗어왔다.
꼭 위로를 해주는 것만 같았다.
“…이곳을 나갈 수 없어, 제가 도움을 드리지 못합니다. 늘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대에게는 그대의 사명이 있듯이 나 역시 그런 겁니다. 미안한 건 나예요. 늘 그대를 외롭게 했어요.”
“아닙니다. 이제 이만 가시지요. 여기도 무리해서 오시는 걸 압니다.”
“조금만요. 아주 조금만요.”
왕은 흩날리는 꽃을 보며 그리움을 아주 조금만 드러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토록 마음이 따뜻해지는 힘은 달리 볼 것 없이 자연의 대리자였다.
“…그분의 힘은 참, 아름답네요.”
왕은 앞발을 올려 나무를 만졌다.
빛이 나는 새하얀 발을 따라 나무 역시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 * *
은호는 눈을 깜박거렸다.
눈앞에 자동차가 보였고, 어디선가 시끄럽게 울리는 경적에 은호는 다급히 도로를 벗어났다.
사람들이 길거리에 지나다니며 밤을 밝힐 만큼 환한 빛이 가로등에 붙어 있었다.
‘…니르바나.’
그 이름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내 미소가 번졌다.
은호는 저절로 쥐어지는 주먹을 막지 않았다.
니르바나를 여전히 잊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꺼냈다.
오후 9시 27분.
시간 역시 흘렀다.
그제야 은호는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음을 느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힐끔 보다 풀어진 운동화 끈을 매는 것처럼 몸을 낮춘 채 흑견에게 물었다.
“멍멍이 형님. 혹시 니르바나를 기억해?”
자신은 기억했지만, 흑견은 아닐 수 있었다.
그림자가 흔들리더니, 동그라미를 만들어냈다.
은호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걸 할 수 있었구나.’
“서은호 씨.”
들려오는 가을의 물음에 은호는 고개를 돌렸다.
가을이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분명히 연구원들과 같이 나갔음에도 그 위치가 바뀌지 않았다.
조금 전 일이 정말로 환상 같았다.
“운동화 끈이 풀렸습니까?”
“네. 잠깐 풀렸네요?”
“이 근처에서 연구원들의 추적이 끊어졌습니다.”
가을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행동에 은호는 정말로 가을의 기억이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참 씁쓸하게 느껴졌다.
“…이번 일, 환수가 그랬을까요?”
“가을 씨. 괜찮다면 다시 추적해보실래요?”
“이미 여러 차례 추적해봤지만, 이곳에서 사라진 것처럼…….”
가을은 태블릿을 건드리며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추적이 되고 있었다.
놀란 눈으로 은호를 보았다.
“이번 일, 환수가 일으킨 거 맞아요. 그 친구를 만났고, 해결했어요. 보시다시피 연구원분도 무사하고요.”
“그럼, 왜 전 기억하지 못하는 겁니까? 이것도 환수의 힘입니까?”
“기억이 지워진다는 걸 뒤늦게 들었어요. 그래서 꼼수를 썼고, 성공했어요.”
“그 환수, 다정한 환수였나 봅니다.”
“어떻게 알았어요?”
“은호 씨 표정을 보면 압니다.”
은호는 누군가를 무척이나 안쓰러워하고 있었으니까.
멋쩍은 미소가 은호의 입가에 남았다.
“사실, 후회하고 있어요.”
“저한테 그 꼼수를 쓰지 않은 일 말입니까?”
“그것도 있고, 좀 더 그 친구를 도와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아 있네요.”
가을은 은호에게 다가가며 손을 내밀었다.
은호에게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충분합니다.”
“네?”
“서은호 씨는 이미 충분할 정도로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 이상 바라는 건 강박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강박이요?”
“서은호 씨에게 이번 일을 부탁한 제가 드리기에 적합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무엇이든 잘 해내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제가 조금 더 하면…….”
“이미 충분할 정도로 잘하고 있습니다. 대체 누가 환수를 위해 몸을 갉아 먹을 정도로 합니까?”
가을은 조금 엄하게 은호를 보았다.
무언가를 너무도 좋아하는 사람은 이럴 수 있었다.
좌우를 살피지 않고, 앞만 보는 사람 역시 이럴 수 있었다.
가끔 제어를 못 할 수 있었다.
“서은호 씨가 얼마나 환수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발만 뒤로 가서 지켜보십시오. 때로는 그럴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옆에서 꾸준히 은호를 본 가을은 오늘이 바로 그때라는 걸 알았다.
기억이 지워져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일이 은호의 어떤 버튼을 누른 게 아닐까 싶었다.
멍하니 가을을 보며 눈을 몇 번이나 깜박거렸다.
은호는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를 천천히 내리다 웃었다.
‘내가… 너무 개입하려고 했네.’
사실 많은 걸 할 수 있었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던 건 아닐 테지.
그럼에도 하지 않은 건, 그 상태에 적응하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환수 친구를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도 그랬다.
니르바나가 바라지도 않은 일을 자신이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한 건 아닐까.
너무 개입한 건 아닐까.
고민이 하나씩 쌓였다.
“혹시, 웃었습니까?”
가을이 물었다.
“네…?”
“그 환수가 웃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가을의 물음에 은호는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니르바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웃었어요.”
“그럼 된 겁니다. 우리는 웃게 해주지 못했으니까요. 그건, 서은호 씨만 할 수 있는 겁니다.”
가을은 흘러내린 안경을 올리며 슬그머니 웃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아가면 되는 일입니다.”
놀란 기색이 가득한 은호의 눈을 보다 가을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럼, 서은호 씨는 근처에 잠깐 계십시오. 이제 저 혼자 가도 됩니다.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가을 씨.”
“네?”
“하이프 일이라면 이제 놓아줘요.”
“제가 그 말도 했습니까?”
“비슷한 말을 하긴 했어요.”
은호는 니르바나에게 가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전에는 환수에게 어떤 말도 해주지 못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았으니까요. 더 큰 오해로 돌아올까,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놓기 어렵습니다.”
“그 친구가 괜찮다고 했어요.”
“언제 돌아옵니까?”
“모르겠어요.”
“그럼, 그때, 괜찮아지겠습니다.”
가을은 단단한 표정을 지은 채 앞으로 걸어갔다.
은호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주 강인한 사람이었다.
은호는 주머니에 손을 찌르며 더 크게 미소를 흘렸다.
“네. 연락 주세요.”
무거웠던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은호는 조금 전, 니르바나를 만나기 위해 걸었던 그 길을 떠올리며 걸어갔다.
가게를 따라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눈길을 돌리니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리고 있던 환수와 눈을 마주했다.
은호는 환수를 보며 웃었고, 환수 역시 살짝 웃다 사라졌다.
한 번 환수를 의식하니 도시 곳곳에 퍼져 있는 그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들은 왜 사람들이 있는 공간으로 흘러왔을까.
그런 호기심으로 걸어가다 옆으로 지나가는 환수를 보았다.
갓구운 빵을 쥐고 있었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자신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도로롱과 어딘가 닮았지만, 달랐다.
“안녕.”
은호가 말을 걸자, 환수는 고개를 돌리다 흠칫 놀랐다.
하지만 이내 환히 웃어주었다.
“안녕! 이거 인간한테 받았는데, 나 대신 고맙다고 전해줄래?”
환수는 뒤를 가리켰다.
가게 밖으로 고개를 내민 한 아주머니가 보였다.
걱정 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이 친구가 고맙대요.”
은호가 소리치자 환수는 기뻐했다.
“고마워!”
힘찬 그 소리를 내뱉고는 다시 부지런히 달렸다.
어쩌면 도시에서 살기에 사람들의 거부감이 덜한 건지 몰랐다.
‘…아니면, 사람들이 좋은 건가?’
왜냐는 물음은 이제 삼켜졌다.
자신도 조금씩 알게 됐으니까.
은호는 니르바나가 있을 장소에서 걸음을 멈췄다.
공터였다.
땅이 좀처럼 팔리지 않는지, ‘급처’라는 팻말이 박혀 있었다.
은호는 그곳에 서서는 바라보았다.
방금 벌어진 일이 환상인 것처럼 니르바나도, 그곳에 심은 꽃나무들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환상이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은호는 눈을 감았다.
그곳에서 씨앗을 심고, 나무가 자라자 니르바나는 깜짝 놀랐다.
벚꽃을 닮은 연분홍 꽃이 피어나고, 니르바나는 꽃을 처음 보는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은호는 미소를 짓은 채로 눈을 떴다.
‘다음에 찾아가면 무슨 꽃을 심어줄까.’
멈췄던 진눈깨비가 조용히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