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Druids Live with the Beast RAW novel - Chapter (191)
드루이드가 환수와 살아가는 법-191화(191/302)
191화. 바닷속 이야기(4)
은호가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었다.
달라질 거라는 미래도 상상할 수 없었다.
에르쿠나는 시선을 내렸다.
“당신밖에 없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에르쿠나의 부탁에 은호는 잠깐 생각했다.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건 부담스럽지만, 부탁은 괜찮았다.
어차피 자신이 잘하는 일이었다.
“혹시, 다시 돌아가도 될까요?”
씨앗이 필요했다.
자신이 가진 씨앗은 죄다 육지에 있는 식물들이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조금만 달라고 할걸.’
에르쿠나가 설명하는 자연의 대리자 부분에 생각을 뺏기고, 바다 풍경에 정신이 팔렸다.
“……당신도, 안 되는 겁니까?”
절망이 묻은 에르쿠나의 말에 은호는 다급히 손을 흔들었다.
여기저기 거품과 물살이 일어났다.
“아니요, 아니요!”
은호가 급히 부정했다.
이미 바다에서 힘이 통한다는 건 알았다.
이곳 식물들이 자신을 무진장 싫어한다는 것도.
“씨앗을 안 들고 와서요. 부탁하는 걸… 잊었어요.”
은호가 머쓱해하자 위그드라실이 손으로 에르쿠나를 가리켰다.
“에르쿠나가 가지고 있다고? 그 말이야?”
은호가 위그드라실에게 물었고, 에르쿠나는 그제야 긴 숨을 내쉬었다.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가져왔습니다.”
에르쿠나는 고개를 돌려 수호자들을 보았다.
올 때, 뭔가를 쥐고 있었는데, 그게 다 씨앗일 줄이야.
수호자들이 다가와 은호에게 씨앗이 담긴 자루를 넘겼다.
자루를 받은 은호는 금세 웃었다.
“고마워, 친구야!”
해맑은 말에 수호자들은 덩달아 웃다가 다시금 표정을 유지했다.
분명 같이 있던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전혀 낯설지 않았다.
“에르쿠나.”
은호는 자루를 쥔 채 에르쿠나를 불렀다.
“네.”
“솔직히 잘될 거라는 말은 못 해주겠어요. 하지만 최선을 다해볼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혹시, 내가 쓰러지면 빨리 육지로 데려다줘요. 거기에 어둠을 쓰는 멍멍이 형님이 있는데요, 공격할 수 있으니까 긴장해요.”
은호는 혹시나 해 여러 가지 상황을 말했다.
저 검은 것이 새어 나와 바다를 잡아먹었다. 식물도, 동물도 그 무엇도 그곳에 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흙이 오염된 상태라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바다였다.
다 낯설었다.
은호는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오염이 시작되는 곳으로 향해 발을 움직였다.
“…바로 그곳으로 가는 겁니까?”
“그럼요. 여기가 가장 문제잖아요. 다른 곳에서 다시 식물들을 자라게 한다고 해도 원인이 해결되지 않으니, 똑같이 반복될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괜찮아요. 일단 해봐야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잖아요?”
은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앞으로 헤엄쳤다.
에르쿠나가 물결을 움직여 더 쉽게 나아갈 수 있게 도왔다.
재해에 가까이 가자 그저 멀리서 보는 것과 달리 확연한 불쾌함이 아른거렸다.
뭐랄까.
한없은 슬픔 역시 밀려와 당장 눈시울이 뜨겁게 밀려왔다.
‘바다가 울고 있는 걸까.’
은호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뽑은 피를 가방에서 꺼냈다.
이대로 씨앗을 적시려다 멈췄다.
장소가 달랐다.
‘평소대로는… 안 되겠네.’
혹여 피가 바다 때문에 희석될까, 뚜껑을 열자마자 씨앗을 피에 담갔다.
반응이 있었다.
그대로 아래로 부었다.
물결을 따라 움직이는 씨앗을 향해 은호는 지시를 내렸다.
“자라줘.”
물결을 따라 너풀거리던 씨앗은 다리가 달린 것처럼 아래로 움직였다.
땅과 가까워지자 바로 뿌리를 뻗었다.
마치 그리웠다는 듯 땅으로 파고들었다.
바다에 휩쓸리지 않으려 더 단단하게 땅을 꿰뚫으며 위로 자라났다.
하나, 둘 땅에 안착한 식물들은 옆으로 넓게 퍼졌다.
텅 비어버렸던 그곳에 수많은 색이 가득 메워졌다.
은호의 입꼬리가 올라가다 그대로 멈췄다.
사아아아.
느닷없이 서늘함이 밀어닥쳤다.
‘뭐지?’
눈동자를 움직이려던 차, 이상함을 느꼈다.
‘이 느낌은…….’
생각이 멈췄다.
숨조차 멈췄다.
수많은 색을 품었던 식물들이 천천히 시들었다.
왜.
“…괜찮아?”
은호의 손이 떨렸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식물이 시들어버리는 일은.
푸르렀던 잎이 점점 검게 변했다.
“…안 돼, 안 돼!”
은호는 피를 더 주었다.
하지만 죽어버리는 속도는 늦어질 뿐, 시들어갔다.
은호는 바닥을 쓸어내렸다.
그제야 모래와 흙더미에 가려졌던 그 속이 보였다.
거무튀튀했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었다.
은호는 손을 보았다.
에르쿠나가 치료해준 손이 검게 물들었다.
딱 그 부분만 타오르는 것처럼 아팠다.
‘…이것 때문에 안 된다는 거야?’
왜.
은호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자신보고 자연의 대리자니 뭐니하면서 띄워놓지 않았는가.
겨우 땅이 변했다고 아무것도 못 해버리면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태블릿 씨.”
은호의 부름에 태블릿이 튀어나왔다.
“식물들이 죽는 건 다 땅 때문인가요?”
《네. 땅에 오염도가 심각합니다. 이대로는 자랄 수 없습니다.》
“내 피로는 오염도를 낮출 수가 없는 거예요?”
이 피에 많은 게 담겨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은 가능합니다.》
“정말요?”
은호는 화색을 띠었다.
《다만, 현재 많은 양의 피가 요구되며 바다라는 장소 특성상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다른 방법’을 선택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태블릿은 다른 방법에 특히 더 강조했다.
이건 경고였다.
은호는 조용히 생각했다.
분명히 자신의 기억 속에 정화의 힘을 가진 환수가 있었다.
눈을 감았고, 천천히 떴다.
“…세티아. 맞죠?”
《산마와 관련된 정보를 불러오겠습니다.》
《…몸에서 자라나는 식물은 정화의 힘을 가졌으며 이런 힘을 토대로 산과 숲 혹은 호수 근처에 자리를 잡아 자신의 영역을 펼쳐나갑니다.》
《네. 산마가 가진 꽃이 필요합니다.》
“에르쿠나.”
은호는 에르쿠나를 불렀다.
초조하게 지켜보던 에르쿠나는 은호에게 다가왔다.
“오지 말고, 거기서 들어줘요.”
은호는 에르쿠나를 급히 멈춰 세웠다.
이 재해는 가까이하기에 너무 위험했다.
“내 주변으로 잠깐만 물을 치워줄 수 있나요?”
“할 수 있습니다.”
“그럼, 해줘요. 금방 갔다 올게요.”
“어디를 가는 겁니까…?”
“친구한테 도움을 요청하러요.”
세티아가 가진 꽃이 필요했다.
그걸로 토템과 합쳐야 했다.
새로운 식물을 만들어 그 일대를 정화하는 방법이 유일했다.
“준비되면 해줘요. 놀라지 말고요.”
은호는 에르쿠나를 보았다.
머뭇거리다 에르쿠나는 지느러미를 움직였다.
두두두두.
주변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던 그때, 은호의 주변으로 물이 사라져갔다.
수압을 무시하는 힘이었다.
“고마워요.”
은호는 에르쿠나를 보며 공간을 열었다.
그 안으로 사라지자 수호자 중 한 마리가 놀라며 입을 열었다.
“…진짜로 사라질 수 있잖아?”
그때, 은호가 꺼냈던 말이 사실임을 이제야 알았다.
―불가능할 거라 생각해? 아니면 지금 가면 믿으려나. 하지만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대로 사라졌다면 어쩔 뻔했는가.
수호자는 에르쿠나를 힐끔 보며 안도했다.
‘…살았네.’
* * *
뛰어들다시피 왔기에 은호는 바닥으로 굴렀다.
몸이 너무도 무거웠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마스크를 벗었다.
“…하, 하아.”
“일부러 요란하게 도착했는가? 그렇다면 성공했다.”
세티아가 태연하게 물으며 다가왔다.
웃음을 터트렸다.
“왜 물에 젖었는가?”
다가오다 말고 세티아는 걸음을 멈췄다.
은호는 물안경을 벗고 세티아를 보았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바다 냄새가 나는데, 대체 어딜 갔다 왔는가?”
세티아가 발을 굴리자 이곳에서 자라난 식물이 은호를 감쌌다.
이곳은 세티아의 영역 안이었다.
“왜 몸에 재해를 묻히고 다니는 거지?”
“친구야.”
은호는 자신의 몸을 감싼 식물에게서 반짝거리는 빛깔을 보았다.
정화의 힘이 작동한 걸까.
“정화의 힘이 담긴 네 꽃이 필요해.”
“은호. 대답이 먼저다.”
“바다에 갔어. 재해가 모인 곳에 말이야.”
“…….”
세티아는 힘이 빠진 얼굴을 했다.
“누가 너한테 강요했지? 누가 너보고 그런 일을 시켰지? 바다에 사는 존재가 그러했는가?”
“내가 한다고 했어.”
“안 된다.”
세티아는 말을 꺼낸 뒤,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친구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잖아?”
세티아는 은호에게 다가와 그를 안았다.
떨림이 느껴졌다.
“넌 그게 뭔지 몰라.”
“다 봤어.”
“은호. 너를 희생하지 말거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희생이라니. 세티아. 나는 너희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하는 거야. 그게 아니면 하지도 않았어.”
은호는 손을 뻗었다.
세티아라는 이름을 불러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 역시 성장했기 때문일까.
은호가 잔잔히 웃었다.
“나한테 줄래? 혹시, 꽃을 떼면 많이 아플까?”
“…미련하다.”
“미안해, 세티아.”
“평소처럼 당근이나 줄 것이지. 이 무슨 미련한 짓인지.”
혼을 내는 세티아의 말에 은호는 키득거리며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을 닦았다.
“당근은 갔다 와서 줄게. 약속해.”
“인간의 약속에는 강제력이 없다.”
“난 약속은 지켜.”
“…미련한 것.”
세티아는 혀를 찼다.
“얼마나 필요한가?”
“두 개면 되지 않을까.”
은호는 가방에서 토템을 꺼냈다.
토템을 쳐다보던 세티아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텅 빈 그릇이다. 뭐든 담을 수 있고, 무엇이든 내뿜을 수 있는 그릇인가?”
“어떻게 알았어?”
“이걸로 내 힘을 담을 셈인가?”
“맞아.”
은호는 웃으며 토템을 하나 더 꺼냈다.
바닥에 내려놓고, 칼 역시 꺼냈다.
“그건 왜 꺼내는가?”
“피가 필요해서. 놀라지 마.”
은호는 손바닥을 그었다.
푹.
피가 떨어졌다.
“뭐 하는 건가?”
세티아가 기겁했다.
진짜 벨 줄이야.
“내 피가 필요해. 많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으니, 이게 더 빨라.”
은호는 다른 손바닥 역시 상처를 냈다.
두 손바닥에서 피가 후드득 흘렀다.
양손으로 토템을 쥐었다.
동시에 교감의 힘을 터트렸다.
그 힘으로 주변에서 꽃이 자라났다.
수많은 꽃향기가 맴돌았다.
세티아는 입을 아주 살짝 벌렸다.
혼자 보기에 너무도 아까울 만큼 아름다운 힘이었다.
토템이 뜨거워졌다.
성장을 위한 열이 나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은호의 두 손아귀에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감각이었다.
이 느낌이었다.
토템에서 피어난 열기가 은호에게로 흘러들었다.
동시에 두 개는 처음이었다.
버거울 법하나, 뚝뚝 흐르는 식은땀과 별개로 이 역시 견딜만했다.
“…자라나자.”
그 말에 달콤함이 번지듯 세티아의 힘이 넘치는 이 영역에 아무렇지도 않게 봄이 내려앉았다.
밀려오는 바람마저 따뜻해 꽃잎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위그드라실이 주변을 보다 놀라 식물을 닦달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식물이 은호에게 손을 뻗었다.
하나둘 모인 식물은 마치 은호를 독려하듯 그의 몸에 조용히 손을 올렸다.
여기가 아니야.
가야 하는 곳은 여기가 아니야.
식물들이 은호의 귓가에 속삭였다.
‘바다.’
은호는 그곳을 떠올리며 정신을 붙잡았다.
“…세티아.”
은호가 한 손으로 토템 두 개를 쥔 채 손을 뻗었다.
세티아는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자신의 뒤로 자연이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세티아는 고개를 숙이며 두 개의 꽃을 떨어트렸다.
손바닥에 놓인 분홍 꽃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고마워, 세티아. 꽃을 줄 때 많이 안 아팠으면 하는데.”
“지금 누굴 신경 쓸 때인가?”
은호는 빈정거리는 소리에 잠깐 웃으며 그대로 바닥을 향해 공간을 열었다.
바다 냄새가 밀려왔다.
그대로 아래로 들어가려는 걸 세티아가 막았다.
“칠칠치 못하긴.”
세티아는 식물로 은호를 붙잡아 당겼다.
치이이익.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얼마나 거센 열기를 품에 안았는지 몰랐다.
세티아는 침착하게 은호가 벗어둔 물안경과 산소마스크를 씌워주었다.
“고마워.”
은호가 힘없이 웃었고, 그대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풍덩.
세티아는 은호가 사라진 그 공간을 가만히 보았다.
“…해내거라.”
그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 * *
뜨거운 열기에 바다가 증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없는 거품이 일어났지만, 은호는 그저 아래를 보았다.
몸이 너무도 무거웠다.
“…에르쿠나. 날, 아래로 데려가 줘.”
희미한 소리에 에르쿠나가 물살을 움직여 은호를 내려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은호 주변에 퍼진 힘으로 바다가 요동치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알았다.
우우우웅.
새로운 떨림이었다.
위그드라실이 손을 뻗었다.
은호는 두 꽃을 위그드라실에게 넘겼다.
양손으로 꽃을 쥔 위그드라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날 믿어.
굳은 의지를 느끼며 은호는 다시 토템을 양손으로 쥐었다.
둥.
둥.
여전한 열기와 함께 북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무릎을 꿇고 가슴팍으로 가져댔다.
“…자라나자.”
다시금 꺼낸 말을 따라 은호의 주변에 어린 교감의 힘이 위로 올라갔다.
물살이 멈췄다.
바다가 숨을 멈추는 것만 같았다.
위로 모인 교감의 힘이 아래로 흩어져 내렸다.
빛의 비가 내렸다.
그 빛을 따라 땅 아래에 죽어 있던 식물들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
빛이었다.
햇살이었다.
생명들이 빛을 따라 몸을 꿈틀거렸다.
은호는 시선을 내렸다.
두 토템에 새로운 싹이 생겨났다.
빛을 받아들인 듯 반짝거렸다.
뭐가 됐으면 좋겠어.
내가 무엇이 되길 말해줘.
두 토템이 물었다.
평소와 달리 울림이 달랐다.
은호는 토템을 내려놓고는 위그드라실에게 분홍 꽃을 받았다.
‘이 아름다운 바다가 죽지 않게. 네가 막아줬으면 좋겠어.’
분홍 꽃을 토템과 함께 쥐었다.
빠르지 않아도 되니, 저 재해를 지워줬으면 했다.
토템으로 분홍 꽃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혼자 이 모든 걸 다 떠안을 그 친구에게.’
은호는 왕을 떠올렸다.
얼굴도 모르는 왕이었다.
‘…잔잔한 위로가 되길.’
손을 뻗어 재해를 가둔 그곳 앞에 하나의 토템을 내려놓았다.
쿵.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은호는 조용히 헤엄쳐 반대편에 묵직해진 토템을 내려놓았다.
쿠웅!
또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토템은 분홍빛으로 휘감겼다.
간절한 바람을 담은 그 발이 아래로 향했다.
뿌리가 땅을 파고들자 까맣게 물들었던 땅으로 빛이 퍼졌다.
그 빛이 번지고, 번지며 모든 곳을 환하게 채웠다.
봄의 냄새가 바다에서 흘러나왔다.
에르쿠나는 숨을 멈췄다.
바다에서 태어났지만,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였다.
육지에서 봤던 나무라는 식물이 바다에서 자라났다.
‘이게… 가능하다고?’
저 두 나무에서 번졌던 빛이 동그란 모양을 띠며 올라왔다.
하나.
열.
스물.
점점 동그란 빛이 늘어나며 꼭 바다에 떠다니는 생물 같았다.
다시 하나씩 나무로 모였다.
빛이 모일수록 해가 떨어진 듯 찬란해 눈을 뜰 수 없었다.
모든 빛이 모이자 빛이 앉았던 그 자리에 분홍색 꽃이 고개를 내밀었다.
점점 늘어나는 꽃이 분홍 물결을 이뤘다.
바다를 따라 머리가 흔들리자 빛무리가 조용히 내려왔다.
에르쿠나는 두 나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저 바위와 흙만 있던 그곳에 색이 생겨났다.
빨간색.
보라색.
파란색.
수많은 산호초와 여러 식물이 자라났다.
계속, 계속 색이 번지며 수많은 생명으로 빼곡하게 매웠다.
기억 속에 존재했던 그곳이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았다.
‘바다가…….’
에르쿠나는 흐르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바다가, 살아났어.’
눈물로 된 물방울이 점점 더 늘어났다.
수호자들 역시 눈물을 삼키지 못했다.
죽어버린 바다가 다시 돌아왔으니까.
은호는 힘없이 몸을 뉘었다.
물결을 따라 번져가는 빛무리를 보며 웃었다.
《새로운 종이 탄생했습니다.》
성공했다고 알려주는 이 말 역시 기뻤으니까.
《기절하지 말고, 이름을 붙여주십시오.》
태블릿이 이어 다른 말을 보여줬지만, 은호는 무거워지는 눈을 막기가 너무도 어려웠다.
‘붙잡아. 정신 붙잡아. 아직 아니야.’
은호는 몸이 둥둥 뜬 그 기분에 휘감길 것만 같았다.
피가 더 많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에르쿠나.”
목소리가 더 먹먹하게 들렸다.
“다시…….”
“아니. 다른 건 다 필요 없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까만 어둠이 드리웠다.
은호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흑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