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Druids Live with the Beast RAW novel - Chapter (198)
드루이드가 환수와 살아가는 법-198화(198/302)
198화. 절대 삐약(4)
* * *
“…하.”
흑견은 기가 막혔다.
잠깐 잠든 사이에 이런 약속을 제멋대로 체결하다니.
“미안해, 멍멍이 형님. 하지만 한 번만 도와주라.”
“앞발로 짓누르면 죽어버릴 존재를 가지고 뭐 하자는 건가?”
흑견은 삐요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자신의 앞발만 했다.
“진짜로 짓누르라는 게 아니라, 실전 감각을 기르자는 거지.”
은호의 말에 흑견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애초에 이걸 왜 해야 하는 건지 몰랐다.
“그럼, 내가 해줄게.”
윈디드가 끼어들자 흑견은 눈가를 꿈틀거렸다.
“왜 갑자기 끼어드는가?”
“아니, 안 하겠다고 하길래. 작은 친구는 도움이 필요해 보였고, 나도 도와주고 싶어서 그랬지.”
흑견은 윈디드의 말과 행동이 다 거슬렸다.
조금 전까지 무척 평화로웠는데.
“나는 괜찮지, 작은 친구?”
“잘 부탁드리오.”
삐요는 윈디드를 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도와준다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솔직히 까만 존재보다 날개가 달린 존재가 훨씬 나았다.
눈빛부터 달랐으니까.
“아니, 내가 먼저 하겠다.”
흑견이 윈디드를 보며 말했다.
“안 하겠다고 하지 않았어?”
윈디드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하지 않겠다고 말한 적은 없다.”
딱 잘라 말하며 윈디드를 어둠으로 밀었다.
순순히 밀려주던 윈디드는 그대로 은호에게 걸어가 작게 속삭였다.
“나 때문에 그런 거 맞지?”
“정확하지.”
“저 친구가 진짜 날 좋아하나 봐.”
윈디드가 키득거리는 말에 어둠이 날아왔다.
빠르게 펼쳐진 날개가 어둠을 막으며 링에 어린 빛이 퍼졌다.
“…들렸어, 친구?”
“들으라고 한 소리가 아닌가?”
단단히 화가 난 표정에 윈디드는 은호 뒤로 물러났다.
“아니야. 그냥 말썽꾸러기한테만 말한 거야.”
“그럼. 나랑 삐약이랑 말을 나누고 있었는데?”
은호가 끼어들며 웃고 있자 흑견은 분노가 더 치밀어올랐다.
“왜 빨리 돌아왔는가?”
“뭐야. 날 기다린 거야, 친구?”
윈디드는 진심으로 감동했다.
흑견이 평소 좀 삐뚤어지게 말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속은 그 누구보다 따뜻했다.
“누가 널 기다렸다고 그랬는가?”
“티토가 안정됐는지 확인하러 갔다 왔어. 좀 불안했거든.”
폭시의 가족인 티토를 데려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지만, 지금 데려갈 수는 없었다.
상처로 영구적인 장애가 남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벌어진 바닷속 사건도 신경 쓰였다.
‘그리고…….’
―인간들이 어떤 실험을 하고 있어. 너한테는 꼭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은호가 병원에 있을 때 꺼낸 말이 있었다.
어쩌면 가장 신경 쓰이는 문제가 바로 이게 아닐까.
요새 기분이 꽤 가라앉은 상태였다.
“나한테 물어보지 그랬어. 나도 오늘 보고 왔단 말이야.”
은호가 말하자 윈디드는 앞발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생각도 정리할 겸, 날고 싶기도 했어.”
“됐고, 이제 비키거라.”
흑견은 삐요 앞에 섰다.
“넌 다음이다.”
“그럴게, 친구.”
윈디드는 양보했다.
흑견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줄 수 있었다.
흑견은 삐요 앞에 섰다.
“진심으로 하거라.”
“내가 베어도 괜찮소?”
“상관하지 마라. 나도 죽이진 않을 테니까.”
흑견은 삐요를 보았다.
삐요는 자신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좋은 눈빛이다.”
꽤 마음에 들었다.
“덩치는 그저 하나의 수단이라 생각하고 덤비거라.”
삐요는 깃털을 꺼내 공손하게 인사한 뒤, 단단하게 만들어서는 꼭 쥐었다.
“알겠소.”
샛노란 눈동자가 자신을 찌를 것만 같았지만, 삐요는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 * *
“…잘 잤어?”
은호는 삐요에게 인사했다.
창문에 앉아 있는 삐요의 뒷모습은 포동포동한 병아리를 보는 것 같았다.
“고맙소. 진심이오.”
삐요는 은호를 보며 웃었다.
이틀보다 적은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까지 살아왔던 시간보다 더 행복했다.
“밥은 맛있었소.”
인간이 직접 해준 밥이었다.
누군가 해준 밥을 먹은 건 처음이었다.
“잠자리도 따뜻했소.”
은혜를 갚아야 할 존재가 죽고 난 뒤 계속 떠돌아다녔다.
늘 마음이 무거워 그냥 등이 닿는 곳이 집이었다.
하지만 두 번의 밤 동안은 정말 따뜻했다.
피로가 이렇게나 쌓여 있는 줄도 몰랐고, 자신이 얼마나 몸을 혹사했는지도 알아버렸다.
“열심히 생각했는데, 그대에게 뭘 해줘야 할지 모르겠소.”
저 인간은 너무 많은 걸 내어주었다.
이걸 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를 정도였다.
“이미 해줬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줬잖아? 나는 그걸로 충분히 받았어.”
은호는 다가가 삐요를 쓰다듬었다.
삐요와 밥도 먹고, 대화도 나누고, 잠도 같이 잤다.
사람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환수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보답이라는 걸 왜 모를까.
“내가 더 행복했소.”
“네가 행복했다면 나는 기쁜데?”
삐요에게 여러 말을 들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얼 했는지.
긴 시간을 함축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열심히 살았다는 건 변함 없었다.
“시칸이라는 친구가 있어.”
은호는 그 카락을 떠올렸다.
아직도 연구소에 있었다.
“절벽에 매달려서 살아야 하는 존재인데, 그 친구는 태어날 때부터 갈퀴가 없었대.”
선천적인 장애였다.
“그런데 절벽을 올랐어.”
은호는 그때를 생각하며 활짝 웃었다.
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다 이뤄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온다는 걸 알았다.
“무엇도 그 친구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던 거야. 너도 정말 강한 의지를 가졌잖아?”
사실 이 대결은 삐요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삐요는 은혜를 갚겠다는 그 의지 하나로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다시 돌아와서 맛있는 거 먹자. 그때는 더 크게 웃으면서 말이야.”
은호는 ‘승리’라는 말을 올리지 않았다.
이건 이기고 지는 개념이 아니었다.
신념을 담은 대결이었다.
“고맙소.”
삐요는 은호에게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포근함을 느꼈다.
* * *
삐요는 원수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아주 깊은 숲속에 살고 있었다.
나무들이 높고, 빼곡해 해가 있음에도 주변이 꽤 어두웠다.
은인은 어쩌다가 그 존재와 마주쳤을까. 왜 그 존재의 눈에 띄었을까.
그런 의문이 늘 맴돌았다.
삐요는 이곳으로 다시 걸어가는 그 날을 수없이 상상했고, 현실이 되자 밀려드는 감정의 폭은 너무도 컸다.
“내 영역을 벗어난 곳이다.”
흑견이 말을 꺼냈다.
“산책을 갈 때 들리는 곳도 아니다.”
이어 꺼낸 말에 은호는 윈디드를 보았다.
은호의 목에 휘감긴 일렉트 역시 윈디드를 보았다.
윈디드의 등에 꼬맹이들이 쪼르르 다 타 있었다.
“삐약이는 이쪽에 와봤어?”
“날면서 보긴 했어. …아! 누군지 알겠다.”
윈디드는 그제야 삐요의 상대가 누군지 눈치챘다.
“누군뎀?”
레비아탐이 물었다.
이어 폭시와 라비가 윈디드를 지그시 보았다.
“…난폭해 보이던데.”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가 싶더니 한 번 쳐다보고 말았던 존재가 있었다.
그 손아귀에 들려 있던 커다란 돌 역시 생각이 났다.
“난폭하오.”
삐요가 흔들리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사실이었으니까.
흑견이 앞으로 몇 걸음 더 나아갔다.
어둠을 일으켰다.
우지끈.
그 앞에서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 파편이 어둠에 먹혔다.
“누가 내 숲에 더러운 발을 내디디는 거지?”
고릴라를 닮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당히 컸고, 눈빛이 굉장히 매서웠다.
두 발로 서서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짙은 회색 털을 가진 환수의 머리에 날카로운 뿔이 달려 있었다.
몸에 갑옷이라도 입은 것처럼 반짝이는 쇠 같은 게 몸에 박혀 있었다.
커다란 주먹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다.”
흑견은 당당히 말을 꺼냈다.
다짜고짜 공격하니 꽤 불쾌했다.
“왜? 불만이라도 있는가?”
“내 숲이 탐나서 왔는가?”
“무슨 소리인가? 똑바로 영역 표시도 하지 못한 주제에.”
흑견은 환수를 보며 비웃음을 드러냈다.
어떤 놈인가 싶었는데, 딱 봐도 덩치와 위압으로 상대를 짓누르는 얌체 같은 놈이었다.
환수는 눈길을 돌렸다.
인간이 있었다.
큰 환수와 작은 환수들도 있었다.
숫자가 많았다.
“그냥 지나간다면 모르는 척해주마. 내 자비라고 생각하거라.”
‘멍멍이 형님보고 쫄고, 숫자 보고 더 쫄았네. 괜히 자존심을 내세우는 건 덤이고.’
은호는 속으로 웃었다.
어떤 환수인가 싶었는데, 생각보다 치졸했다.
전형적인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환수였다.
삐요는 땅으로 내려왔다.
그대로 앞으로 걸어왔다.
이건 또 뭔가 싶어 환수는 삐요를 쳐다보았다.
“나를 기억하오?”
“글쎄.”
“그대와 대결하기 위해 찾아왔소. 이러면 기억이 나오?”
“푸핫!”
환수는 삐요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찾아온 게 대결을 하기 위해서라니.
이보다 더 웃긴 게 어디 있을까.
“기억났다. 기억났어!”
환수는 삐요를 보며 떠올렸다.
작은 주제에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던 존재가 있었다.
복수니, 뭐니 하던 말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신경질 나서 죽일 뻔했는데, 진짜 살아났네?”
하마터면 약속을 깰 뻔했다.
이렇게 살아 있으니 그건 다행이었지만, 딱 하나가 걸렸다.
“내가 왜 널 보고 신경질이 났더라.”
그 중간이 기억나지 않았다.
대체 왜일까.
“그건 차차 알아보면 되지 않겠소?”
삐요는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혔다.
저런 도발에 휩쓸려봤자, 자신만 흔들릴 뿐이었다.
“나와 대결에 응해주겠소?”
삐요는 조용히 물었고, 환수는 아래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며 키득거렸다.
“대결에는 걸 게 필요하지. 뭘 걸어야 할까.”
환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 은호를 보았다.
아주 흥미로웠다.
가지고 놀기에 딱이었다.
“저걸 주면 되겠네.”
어차피 가지고 놀고 있지 않은가.
“분질러버리기 전에, 그 손가락 내려라.”
흑견이 발끈했지만, 은호가 방긋 웃었다.
“좋아.”
“…뭐, 뭐라고 했소?”
삐요가 놀랐다.
“나는 괜찮…….”
어둠이 은호의 입을 막았다.
“멍청한 인간!”
“아이고, 말썽꾸러기. 진짜 이럴래?”
“맞아! 이건 아니잖아! 어떻게 그렇게 섣불리 정하는 거야?”
“이, 이건 너무 성급했엄! 조금 더 생각해?c.”
“이건 나도 하지 않는 거다! 은호는 바보다!”
“은호! 이건 생각해야 하는 일이야. 생각!”
우르르 말이 쏟아지자 은호는 크게 웃었다.
왜 저렇게 말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성급했다는 말 역시 인정했다.
하지만 은호는 어둠을 내리며 딱 한마디만 꺼냈다.
“나는 저 친구를 믿으니까.”
“좋소.”
삐요는 은호의 마음을 담아 허락했다.
“내가 이기면 나와 같이 그대가 죽인 내 은인에게 사과하러 가는 것이오.”
진심이든 아니든 괜찮았다.
마지막 가는 길에 사과 하나만 딱 듣게 해주고 싶었다.
“좋다. 사과야 해주지.”
그게 뭐라고.
환수는 오히려 신이 났다.
인간을 가지고 놀아본 적 없는데, 저 인간은 자신들의 말을 하고 있었다.
더 깊은 흥미가 감돌았다.
“저들이 개입해도 네가 지는 거야. 알고 있겠지?”
환수는 승부를 보기 전에 먼저 선을 그었다.
개입은 절대로 없다는걸.
“알겠소.”
삐요는 말을 꺼내며 환수를 바라보았다.
“찢어버리거라.”
흑견은 이빨을 드러낸 채 뒤로 물러섰다.
윈디드도 뒤로 물러섰다.
“찢기만 하면 되겠어?”
윈디드의 매서운 시선은 환수에게 향했다.
“그럼, 내가 시작을 외칠게.”
은호가 목소리를 냈다.
환수는 웃었고, 삐요는 차분히 신호를 기다렸다.
“시작.”
그 소리가 은호의 입에서 들리자마자 삐요는 달렸다.
흑견과 윈디드가 실전 연습의 대상이 되어주었다.
둘을 상대하면서 가장 먼저 느낀 건, 거리를 좁혀야 한다는 점이었다.
거리를 벌리면 벌릴수록 불리한 건 바로 자신이었다.
―너는 작다. 가벼운 진동에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되도록 빨리 몸에 올라타거라.
흑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았다.
‘기다려. 내가 가면 안 돼.’
환수의 커다란 주먹이 아래로 내려왔다.
‘지금!’
콰아앙!
땅이 울렸지만, 삐요는 이미 커다란 주먹 위로 올라탄 상태였다.
삐요는 그대로 달렸다.
작은 몸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작은 친구는 작아서 눈으로 좇는 게 생각보다 어려워. 특히 몸에 붙으면 더욱 그래.
환수의 몸이 흔들리자 삐요는 바로 환수의 털을 잡아 매달렸다.
그대로 위치를 옮겨 잘 보이지 않는 팔 안쪽으로 향했다.
―팔 안쪽으로 숨으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분명히 친구를 깔아뭉개려고 안쪽으로 힘을 줄 거란 말이야. 그때, 찌르는 거지.
실전 훈련을 보던 은호가 조용히 꺼낸 말이 기억났다.
바로 그 순간이 오고 있었다.
삐요는 깃털을 꺼내 단단하게 만들었다.
“악!”
팔을 안쪽으로 모으던 환수가 비명을 질렀다.
잠깐 방심하는 사이 삐요는 계속 위로 올랐다.
자신에게 있어 저 환수는 산처럼 높았다.
―이기고 싶다면 목을 노려라. 다만, 그 전에 해야 할 게 있다.
흑견이 꺼낸 말을 당부하며 삐요는 그 무엇보다 오르는 데만 신경 썼다.
얼마나 달렸을까, 두 번의 공격을 피하고는 그대로 어깨에 올랐다.
분해 빠진 환수의 눈빛과 마주했다.
어깨에 붙은 모기를 처리하듯 손을 뻗었고, 삐요는 그대로 어깨를 찔렀다.
―바로 공포다.
흑견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삐요는 더 힘을 주며 뒤틀었다.
“아아악!”
환수는 어깨가 잘려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주 조그만 존재였다.
손으로 으깨면 죽는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자신이 왜 고통을 느껴야 할까.
환수가 다시금 삐요를 보던 차, 목을 향한 날카로운 감각이 느껴졌다.
온몸이 뻣뻣해졌다.
뚝뚝 떨어지는 피가 느껴졌다.
“더 할 것이오?”
“…….”
대답이 없자 삐요는 환수의 목을 향해 힘을 주었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선명한 피를 느끼며 환수는 공포를 느꼈다.
공포를 느끼는 것부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더 할 것이오?”
하지만 그 물음과 함께 목에 느껴지는 고통이 선명해졌다.
진짜 죽일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휘감자 속마음을 읽힌 것처럼 말 하나가 들려왔다.
“나는 잃을 게 없소.”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내가…….”
말을 꺼내며 환수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어떻게든 기회를 노리려 반대쪽 손을 슬며시 움직였다.
재빨리 삐요를 짓누르려던 차, 목에서 깃털을 뺀 삐요의 손이 더 먼저 움직였다.
툭.
무언가 환수의 앞에 떨어졌다.
그게 뭔지 눈동자를 굴려 쳐다보았다.
환수의 입에서 허망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졌다.”
자신의 뿔이 얼마나 단단한지 알고 있었다.
바위마저 부서트리는 뿔을 저렇게 쉽게 벨 줄이야.
“아까 왜 날 보고 신경질이 났는지 물었소?”
“…그래.”
삐요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깃털의 끝이 흔들렸다.
“그때 그대에게 왜… 내 은인을 죽였는지 물었소. 왜 괴롭혔는지 물었소. 이제는 기억나시오?”
“……기억나.”
“왜 그랬소?”
“그냥. 그냥… 눈에 거슬렸어.”
“그게 다요?”
암담한 그 물음에 환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게 사실이었다.
삐요의 감정이 크게 요동쳤다.
밀려드는 감정에 눈가마저 다 시큰거릴 정도였다.
“…알겠소. 약속은 지키시오.”
하지만 삐요는 감정을 삼켰다.
승부는 끝났다.
이걸로 드디어 오랜 바람을 이룰 수 있었다.
환수의 어깨에서 내려와 잠깐 땅을 보았다.
뚝.
눈물이 떨어졌다.
기쁨일까, 허망함일까, 아니면 또 다른 분노일까.
삐요가 급히 눈을 닦던 차, 삐요 뒤로 환수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내가 약속을 지킬 것 같은가!”
환수가 삐요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기 전에 흑견이 달려가 환수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짜악!
그대로 여러 개의 나무를 부서트려서야 멈췄다.
“약속은 지키거라. 내가 보겠다.”
흑견이 환수에게로 걸어가자 주변이 더 어두워졌다.
환수는 그제야 몸을 떨었다.
“아니, 수많은 어둠이 너를 보고 있을 것이다. 기억하거라.”
흑견의 말에 환수는 몇 번이나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밀려드는 아픔보다 몸을 찌르는 감각이 더 고통스러웠다.
“…고맙소.”
삐요가 돌아온 흑견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방심하지 말거라. 처음 방심하지 않겠다고 말한 건 너다.”
퉁명스러운 그 말에 삐요는 웃었다.
다정한 존재였다.
* * *
“…고맙소. 정말 고맙소.”
삐요는 떠나기 전에 모두를 보며 인사했다.
저 환수와 떠나 사과를 듣고 오는 일만 남았다.
“다시 찾아오겠소.”
아직 은혜를 갚지 못했다.
“정말로 다시 올 거야?”
은호가 기뻐하며 묻자 삐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혜를 갚지 못했소.”
삐요의 시선이 움직여 흑견에게 닿았다.
“필요 없다.”
“…잠깐이지만, 많은 감정이 휩쓸었소.”
고작 그런 이유로 괴롭혔는지.
왜 그랬는지.
원망스럽고, 자신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실망했다.
그때도 이길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대들 덕에 이 역시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소.”
삐요는 평온해 보이는 얼굴로 웃었다.
“이거 쓰고 가.”
은호는 모자를 선물해주었다.
삐요의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갓을 닮은 모자였다.
“…가겠소. 신세 지고 가오.”
삐요는 고개를 숙인 뒤, 미련도 없이 돌아섰다.
삐요 뒤에 환수가 죄인처럼 뒤를 따랐다.
처음 봤을 때처럼 삐요 주변에 그윽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마치 늦가을 같은 친구였다.
“다음에 봐!”
은호는 손을 흔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