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Druids Live with the Beast RAW novel - Chapter (223)
드루이드가 환수와 살아가는 법-223화(223/302)
223화. 날 기억해
‘…역시나 그냥 이름만 빌려준 거였어.’
가을은 안경을 잠깐 벗어 미간을 꾹 눌렀다.
이도현이 봉사단체로 위장한 정화자에게 후원한 적 있었다.
직접 후원을 한 건 아니고, 수많은 사람을 통해 전달했다.
거쳐간 모두를 다 조사해봤지만, 그저 이름만 빌려준 것뿐이었다.
가을은 태블릿을 만지작거렸다.
―가을 씨. 초능력 관리국은 진짜 위험해. 따로 조사하고 싶은 마음은 아는데, 이건 안 돼.
태호가 뜯어말렸다.
상대는 초능력 관리국이기에 당연했다.
초능력을 이용한 해킹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지만,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긴 하잖아요, 박사님.’
적이 누구인지 알았는데, 알면서도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참 거슬렸다.
가을은 태블릿을 보았다.
분한 표정이 비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호의 말이었다.
그가 말리는 건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나서면 곤란해지는 건 태호였으니까.
‘…짜증 나네.’
자신의 처지가 짜증이 나 가을은 젤리를 입에 넣어 우물거렸다.
“가을 씨!”
“네.”
가을은 은호의 목소리에 태연하게 대답했다.
“…놀랄 줄 알았는데요.”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가을은 고개를 돌리며 젤리를 권했다.
두 개를 꺼내 하나를 입에 넣고, 하나를 그림자로 내미는 은호를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부탁을 좀 하고 싶어서요.”
“부탁이요?”
“초능력 관리국의 이동 경로 같은 거 있잖아요. 그것 좀 알고 싶은데요. 혹시 괜찮을까요?”
은호는 태연하게 물어봤지만, 가을에게는 전혀 태연하게 들리지 않았다.
“뒷조사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박사님께서 말리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알죠. 알지만,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가을 씨?”
“마음은 이해합니다.”
가을은 차분하게 말하고는 옆에 차를 마셨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부탁을 들어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은호의 대답에 가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더 달려들 줄 알았다.
그게 은호였으니까.
“너무 놀라지 않아도 돼요.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요.”
“알면서도 오셨습니까?”
“네. 가능할 수도 있잖아요? 만약에 안 되더라도 깔끔하게 거절당하고, 다른 방향을 찾는 편이 더 좋아서요.”
“초조하십니까?”
“저보다 가을 씨가 더 초조해 보이는데요?”
은호가 물어보자 가을은 그대로 시선을 움직였다.
표정은 바뀌지 않았는데, 혹시나 티가 났던 걸까.
“서은호 씨. 일탈하면 느낌이 어떠십니까?”
“일탈이요…? 전 일탈 같은 거 안 해봤는데요?”
뻔뻔한 건지, 정말 자각도 없는지, 은호가 눈을 깜박거리자 가을은 기가 막혔다.
“계속 하고 계시잖습니까.”
“제가요…?”
은호는 깜짝 놀랐다.
“지금, 저는 그 일탈이 그리워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초능력으로 해킹하는 거라 이를 역추적 당하면 자신임이 들통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몇 번 건드려보았다.
뚫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태호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지켜야 할 게 많다는 건 참, 귀찮습니다.”
“하지 마세요.”
은호는 가을을 말렸다.
가을은 눈을 깜박거렸다.
“가을 씨가 무리해서 할 필요가 없어요. 이도현을 붙잡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만들면 그뿐이니까요.”
“그래서 초능력 관리국의 이동 경로를 물어보신 겁니까?”
“맞아요. 물살을 한번 일으켜보고 싶었거든요.”
은호는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했으면 했는데.
저게 바로 본인은 모른다는 일탈이기도 했다.
“위험한 걸 알았는데, 제가 그 부탁을 더더욱 들어드릴 이유는 없습니다.”
가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거절했다.
앞으로도 거절할 거라는 의사 역시 확고히 밝혔다.
“괜찮아요. 다른 방법도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은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간을 보는 거지만.’
저번에 환수 관리국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도 그랬다.
앞으로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싶었다.
가을이 정보를 내어줄 수 없다면 지혜에게 가서 물어볼 수도 있었다.
“은호 씨도 하지 마십시오. 이지혜 국장님에게 가려는 거 아닙니까?”
“그래도 전 해야죠.”
“잃을 게 없다는 겁니까?”
저번처럼 또 그 말을 할까.
마치 본인을 내던지는 말을.
“아뇨. 백수라서요.”
은호가 실실 웃자 가을은 그대로 멈칫거렸다.
이내 한숨이 나왔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이게 원래 시간이 남아돌아야 할 수 있는 거거든요.”
입질하도록 미끼를 살살 던지며 기다리는 건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이도현.
그와 얽힌 건 있지만, 딱 본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가 없으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다행입니다.”
가을이 웃었다.
정말로 안도하는 미소에 은호는 장난을 치려다 멈췄다.
“은호 씨가 백수라서요.”
뒤이어 꺼낸 가을의 말에 은호는 눈가를 좁혔다.
“그건… 무슨 말이죠?”
“공식 일정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정말요?”
은호가 활짝 웃었다.
“이틀 뒤, 오후 6시쯤에 박사님과 이지혜 국장, 그리고 이도현. 이렇게 저녁 식사 자리가 있습니다. 하루하고 15시간쯤 남아 설득할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가을 씨도 가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 대답에 은호의 미소가 길어졌다.
살짝 불안한 미소이기도 했다.
괜히 알려줬다 싶은 생각이 맴돌았다.
“왜 그렇게 웃는가?”
보다 못해 흑견이 물었다.
“아니, 그냥 웃는 건데, 뭐어.”
“그냥 웃는 게 아닌 거 안다.”
흑견은 눈을 가늘게 떴다.
또 뭔가 있었다.
저 머릿속으로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을 씨.”
은호는 흑견의 입을 잡으며 불렀다.
“설득은 저 말고 박사님한테 하셔야 할 겁니다.”
“아뇨. 설득이야 직접 해야 하는 게 맞는데, 갑자기 문득 든 생각이라 느닷없을 순 있겠다 싶네요.”
“물어보십시오.”
“왜 ‘소장님’이 아니라 ‘박사님’이라고 하는 거예요?”
박사님이라고 태호를 부르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적어도 은호가 아는 한 연구소 내에도, 밖에서도 태호를 박사님이라고 부르는 건 가을이 유일했다.
“그때는 박사님이었으니까요.”
“꽤 오래전에 형을 만났나 보네요?”
“네. 제가 비소속 초능력자였을 때 만났으니까요.”
“……?”
은호는 그대로 정지된 채 가을을 멍하니 보았다.
“자발적인 비소속 초능력자가 아니었습니다. 고아였으니까요.”
가을은 대수롭지도 않게 뒷말을 꺼냈다.
“놀라셨습니까?”
“…그, 어, 음.”
은호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질 않았다.
“저와 은호 씨. 사실 그렇게 다르진 않습니다. 저도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록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생각보다 태연했던 건가?’
은호는 첫 만남을 떠올렸다.
기록이 없다는 사실에 가을은 태연했다.
“은호 씨도 하루빨리 기억을 되찾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이 담긴 가을의 말에 은호는 가슴이 찔렸다.
사실을 말할 때일까.
하지만 은호의 입술이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 * *
태호는 은호를 빤히 보았다.
은호는 입꼬리를 올리며 태호를 보았다.
‘가을 씨가 웬만하면 이런 걸로 입을 열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구워삶았을까?’
태호는 신기하면서도 동시에 난감했다.
얼마 전에 이도현에게 연락이 왔기에 가볍게 저녁을 먹기로 했다.
자리를 마련한 건 자신이었다. 일부러 마련한 자리이기도 했다.
환수 관리국이 환수 밀렵꾼과 정화자를 관리하게 되면서 타격이 꽤 컸던 모양이었다.
―설태호 소장님. 이런 일을 벌이기 전에 저한테 먼저 말씀을 해주셨으면 정말 좋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정말 많이, 섭섭합니다.
섭섭하다는데 어쩌겠는가.
달래줘야지.
환수 관리국과 이 이상의 갈등과 오해가 없도록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자리를 은호 씨가 냄새를 맡고 찾아왔단 말이지.’
태호의 표정이 굳어지자 은호는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렇게 보지만 말고, 같이 가게 해줘요, 형.”
“뭘 하려고?”
“뭘 하다뇨?”
“뭔가를 하려고 가려는 거잖아.”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가려는 거예요, 형.”
태호는 저 대답에 반사적으로 그만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찼다.
“꿍꿍이 없다는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네. 내가 언제 믿음을 주지 않았던 적이 있나요?”
은호가 맑은 눈동자를 드러내며 온화한 미소까지 겸비했다.
“은호 씨.”
“네, 형.”
“그 머릿속에 든 걸 꺼내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은호 씨를 하루 이틀 봤어?”
“눈도장을 찍으려고요.”
“눈도장?”
“네. 나는 이도현에게 있어, 포섭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포섭? …잠시만. 지금, 그러니까, 은호 씨 본인을 미끼로 삼겠다는 거야?”
“정확한데요?”
“미…….”
“미쳤는가, 인간?”
버럭 소리를 지른 건 흑견이었다.
태호는 소리치려다 머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인간을 이용하려고 하는가?”
흑견이 무어라 말하자 태호는 이에 용기를 내 더 목소리를 키웠다.
“흑견도 안 된다고 하잖아. 흑견도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은호 씨한테 뭐라고 말하잖아.”
“형. 놈을 죄기만 하면 안 돼요. 우리도 허점을 드러내야 해요. 알잖아요?”
은호는 즐거움을 드러냈다.
도현이라고 환수 관리국과 환수 연구소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모르겠는가.
“이도현은 환수 관리국과 환수 연구소의 내부를 흠집 낼 사람이 필요하고, 저는 새로운 인물로 제격이잖아요.”
틀린 소리가 아니었다.
틀린 소리가 아니기에 태호는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은호 씨. 다른 걸 다 떠나서 이걸 내가 허락하겠냐고.”
“허락할걸요? 아니, 허락할 수밖에 없을걸요? 이도현의 멱살을 쥐는 게 생각보다 힘들 테니까요. 무엇으로 쥘 건데요?”
은호가 주저 없이 묻자 태호는 말문이 막혔다.
이런 식으로 찔러올 줄이야.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내밀어도 이도현이 빠져나갈 수 있다는 건 형이 더 잘 알잖아요?”
국장이었다.
초능력자와 비초능력자를 관리하는, 아주 거대한 곳.
딱 봐도 굉장히 어려운 곳이었다.
“형. 딱 하나만 버리면 되는 거예요. 어떤 것도 희생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건 없잖아요.”
“알아. 안다고. 은호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내가 왜 모르겠어? 아는데,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 거잖아. 은호 씨도 알고 있잖아요.”
버려야 하는 그 한 가지가 은호였다.
이게 말이 되는가.
“지금 은호 씨를 버리라는 거잖아?”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형.”
은호는 태호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며 바로 부정했다.
자신을 버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니야?”
“아니죠. 혼나는 거 아는데, 내가 그러겠어요? 버려야 하는 건, 내 이름이에요.”
은호가 방긋 웃었다.
서은호.
이 이름만 버리면 그만이었다.
“형. 날 아는 사람은 없어요.”
사람이 싫어 앞에 나서는 일 없이 지냈던 나날들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여기 연구소에 도는 소문 알잖아요.”
자신을 우연히라도 본 사람들 사이로 퍼진 소문은 아직도 돌고 있었다.
뭔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었고.
“그것도 이용해보고, 가을 씨한테 부탁해서 신분도 다시금 조작해달라고 말하는 거예요.”
태호는 그제야 은호의 제안을 다르게 보았다.
‘…확실히 괜찮은 방법이야.’
은호를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가 환수 연구소와 환수 관리국을 오가며 본 사람은 있겠지만,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형. 날 증명하기 위해서는 딱 두 사람이면 돼요. 이지혜 국장님하고, 형이요. 나머지는 그럴듯한 정보를 흘리면 되는 거예요. 사람은 직위와 그 사람이 입는 옷, 그리고 말투에서 흘러나오는 지식을 보고 판단할 뿐이니까요.”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방법에서 이걸 벗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설득하는 자리에 가장 깔끔한 차림과 미소, 그리고 자신감 넘치는 말을 사용하는 게 아닌가.
“…이게 참, 사기의 기본? 그렇게 들려오는데.”
태호는 고개를 좌우로 기울였다.
마치 사기꾼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봐요. 형이 허락한다고 했죠?”
은호의 입놀림에 태호는 ‘하’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러면 말이 다르긴 하지. 은호 씨의 이름만 버린다는 건 조금 찝찝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아.”
은호는 바로 손을 내밀었다.
태호는 그 손을 보았다.
“역시 우린 한 편이에요.”
은호가 활짝 웃었다.
“은호 씨. 과거에 사기라도 쳤어?”
“기왕이면 영업이라고 해주실래요?”
“은호 씨, 솜씨라면 이달의 사원은 기본이겠네.”
태호는 기가 찬 듯이 웃으며 손을 잡았다.
“아뇨. 나는 호구였어요.”
은호는 태호의 말을 부정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자발적 호구.
그게 맞지 않을까.
“…그게 무슨 소리야?”
태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뒤통수를 치면 쳤지, 절대로 당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바로 은호였다.
은호는 잠깐 망설이다, 이내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준비하러 가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