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Druids Live with the Beast RAW novel - Chapter (256)
드루이드가 환수와 살아가는 법-256화(256/302)
255화. 바닷속으로(3)
* * *
에르쿠나가 만든 물살을 따라 모두가 손쉽게 움직였다.
바닷속 생물들이 구경이라도 온 것처럼 한 마리, 두 마리씩 모이더니 그들을 빤히 보았다.
에르쿠나가 있기에 사람이 섞여도 무섭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르르 모인 바닷속 생물들의 등장에 말 그대로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쿠아리움, 그 이상의 공간으로 들어온 기분이었으니까.
“왠지 웃기네요.”
은호가 키득거렸다.
“…뭐가 웃깁니까?”
가을의 눈은 휘둥그레 커진 상태였다.
눈앞에 벌어진 일을 믿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신기하게 보고 있잖아요.”
태호와 가을은 물고기를 비롯한 환수들을.
환수들과 물고기들은 자신을 포함한 태호와 가을을.
그만큼 서로가 낯설다는 의미였다.
특히 바다이기에 더 닿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음에는 서로가 서로를 따뜻하게 보면 좋겠어요.”
그럼에도 서로 잘 지냈으면 했다.
어렵다는 것도 알고, 현실적으로 너무도 큰 숙제라는 걸 알지만, 그랬으면 했다.
“말이 통하면… 조금 더 서로를 따뜻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가을은 헤인을 떠올렸다.
요새 헤인은 글자를 훨씬 더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자신의 이름도 써줬다.
어느 날,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건네주었다.
「가을. 고마어.」
아무 이유 없이 쓰인 ‘고마워’라는 글자를 보자 그대로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태호가 왜 헤인이가 준 글자를 소중히 보관하는지 그때 알았다.
마음이 통한다는 걸 알자 동시에 아쉬웠다.
말을 나누고 싶었다.
자신이 이걸 받아 얼마나 기뻤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헤인이가 편지를 줬나요?”
은호가 묻자 가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사실 믿기지 않네요.”“나한테는 안 주던데. 진짜 가을 씨하고 형하고 좋은가 봐요.”“…뭐야? 정말이야?”
태호가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보글보글.
거품이 거칠게 올라왔다.
헤인이 은호에게 주지 않았다니.
“정말이에요.”
조금 섭섭하긴 하지만, 그건 헤인의 마음이었으니까.
갑자기 키득거리는 웃음이 들렸다.
라비였다.
은호는 고개를 돌렸고, 폭시가 라비의 꼬리를 쥐자 눈썹을 꿈틀거렸다.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폭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 묘했다.
“말썽꾸러기.”
윈디드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말문을 열었다.
“응?”
“말썽꾸러기가 이곳을 구한 거야?”
윈디드의 눈동자에 기대가 어렸다.
“당연하다.”
흑견의 말이 떨어지자 은호는 당황했다.
손을 휘젓자 물살이 일어났다.
“…아, 아니야. 그런 거창한 말까지 꺼낼 건 아니야.”“거창하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은호, 당신 덕입니다.”
에르쿠나가 이 말의 화제를 물었다.
“응! 은호는 대단햄. 나도 알암.”
레비아탐이 다가와 으쓱거렸다.
훌륭하고, 또 훌륭한 게 은호였다.
“…한 번이었어.”
은호는 괜히 머쓱해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 한 번으로 많은 게 달라진 게 보이지 않습니까?”
에르쿠나는 지느러미로 아래를 가리켰다.
물살의 움직임이 변했다.
아래로 향했다.
아래에서 빛 알갱이가 요동치며 하나씩 올라오는 게 보였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빛 알갱이가 점점 많아져 시야를 가린 그때, 감탄이 흘러나왔다.
“…와아아아아.”
일렉트의 소리였다.
물살을 따라 탱글탱글하게 올라온 산호초들이 사방에 깔려 있자 일렉트는 넋이 나갔다.
어떤 건 달디단 양배추를 닮아 있었다.
어떤 건 붉은 전기가 내리친 것처럼 사납게 뻗어 있었다.
또 어떤 건, 막대 과자를 수십 개나 붙인 것처럼 보였다.
사방에 뿌려진 빛 알갱이로 다들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곳에 식물 친구들이 있었나?’
은호가 의문을 가졌다.
“기억나십니까, 은호? 여기가 바로 재해의 영향으로 모든 게 사라졌던 그 장소의 시작점입니다.”
에르쿠나의 말에 은호는 충격을 받았다.
공허하기만 했던 그 장소라니.
“나무의 힘이 여기까지… 영향을 미쳤다고요?”
은호가 경악하며 묻자 에르쿠나는 그저 웃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희망을 준 겁니다.”
변할 수 있다는 희망.
자연의 대리자가 나타났다는 희망.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
이 모든 걸 주었다.
* * *
물살을 따라 얼마나 갔을까.
태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처구니가 없네.’
정말 기가 찼다.
말이 되지 않았다.
이건 불가능했다.
존재할 수도 없었다.
바닷속에 나무라니.
나무처럼 생긴 바다생물이 아니라, 이건 진짜 나무였다.
무척 아름다운 꽃나무.
여기까지 흘러오면서 보았던 그 빛 알갱이가 모두 저 두 나무에서 흘러나왔다.
“…박사님.”
가을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 꿈을 꾸는 겁니까?”“휴가 가는 일 빼면 꿈이 아니야.”
“…아.”
가을은 휴가라는 말에 바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오늘도 일로 왔지, 휴가로 온 건 아니었다.
“은호 씨. 여기에 재해가 있었던 거야?”“맞아요. 여기에 있었어요. 바로, 이 장소였어요, 형.”
은호는 두 나무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흐리멍덩하게 봤던 그 나무들이었다.
은호는 신나는 마음으로 다가갔다.
발끝에 닿는 산호초를 보며 잠깐 흠칫거렸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날을 세우지 않네?’
오히려 바닷속에 들어왔을 때, 포근함을 느꼈다.
은호는 몸을 숙여 손을 내밀었다.
산호초들이 은호의 손아귀를 잡으며 얼굴을 비비는 것처럼 흔들렸다.
아무렴 어떨까.
다들 기분이 좋아 보이니 됐다 싶었다.
은호는 아예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주변에 있던 산호초들이 길게 자라나며 은호에게 뻗자 가을과 태호는 눈을 의심했다.
자연과 하나.
되게 흔한 말이었지만,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 바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곳에 깔린 식물들이 모두 은호를 보고 있었다.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본 모습은 절대적으로 비밀이라는 걸.
자신들이 은호를 지켜야 한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다짐하고 있었다.
‘…아름답다.’
윈디드는 두 사람처럼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멀리 보아야 더 아름답기에 뒤쪽으로 물러섰다.
꼬맹이들도, 인간들도, 이 모습에 빠진 게 웃겼지만, 이해됐다.
이곳에 도착한 순간, 장엄함이 느껴졌다.
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생명력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에너지는 대체 뭘까.
윈디드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에르쿠나에게 향했다.
언제부터 쳐다보고 있던 건지 에르쿠나가 눈웃음을 지었다.
“지금 느끼고 있는 거대한 생명력은 바다입니다.”
조용히 윈디드에게 다가와 에르쿠나는 입을 열었다.
“이 힘이, 바다…라고요?”“바다를 생명의 어버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거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생명이 탄생할 겁니다. 바다에도, 육지에도 말입니다.”
‘…이걸, 은호가.’
윈디드는 그제야 자연의 대리자가 왜 위대한지 알았다.
생명을 터트릴 수 있었다.
“수호자여.”
갑자기 나온 말에 윈디드가 놀라자 에르쿠나는 지느러미를 들어 이마에 가져댔다.
윈디드의 이마에 있는 왕의 표식이 선명히 보였으니까.
“아…….”
에르쿠나가 바다를 관리하나, 같은 수호자였다.
보이는 게 당연했다.
“바다가 술렁거립니다. 육지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에르쿠나의 질문에 윈디드는 잠깐 자리를 옮겼다.
아무래도 왕이 알려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윈디드는 말을 꺼내기 전에 은호를 바라보았다.
이 모든 일은 은호가 알아냈으니까.
은호는 쏠리는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산호초들을 만져주다 나무를 바라보았다.
“안녕. 그때 이후로 처음이네.”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아산에게.
손바닥이 닿자마자 목소리가 바로 흘러나왔다.
여전히 또렷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아산’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놀랐다.
플라빗이 꽃을 키운 커다랗고, 오래된 나무였다.
아산은 자신이 붙인 이름이었고.
들었습니다.
“아산을 알아?”
압니다.
“어떻게 알아?”
아산은 육지에 있었다.
애초에 바다와 전혀 관련이 없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땅을 통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
그래서 아산이 그렇게 말했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오해가 풀리고 있으니까요.
오해가 풀려가고 있었다.
“있잖아. 한 가지만 말해줄 수 있어?”
은호는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다가 속삭였다.
“이전에 있던 자연의 대리자는 어디로 간 거야?”
차마 아산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가장 오래됐다는 말은 이 땅에 있는 식물 중 가장 슬퍼할 수도 있는 나무라는 소리이기도 했으니까.
절망했습니다.
사라졌습니다.
은호는 그 대답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았다.
‘……죽었구나.’
무엇에 절망했을까.
식물들에게 미안해서 기약 없는 약속을 내뱉었던 걸까.
그 진실은 전 자연의 대리자만이 알 수 있는 일이 되어버렸다.
식물이 자신의 속마음을 완전히 읽을 수 없는 것처럼 그 자연의 대리자도 똑같지 않았을까.
“고마워.”
은호는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괜찮다면 내가 이름을 붙여도 될까?”
감사합니다.
두 나무는 기꺼이 은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름은…….”
은호는 말을 꺼내다 말고 잠깐 숨을 멈췄다.
뭐가 좋을까.
화려할 이유는 없었다.
그냥 느낌대로.
“해홍.”
잔잔한 물결을 따라 두 나무에 분홍 꽃이 흔들렸다.
“해홍으로 하자. 괜찮아?”
은호의 물음에 꽃잎이 떨어졌다.
기쁜 걸까.
괜스레 세티아가 생각이 났다.
《새로운 종인 ‘해홍’을 등록합니다.》《다음번에는 이름을 짓고 기절하는 걸 권장합니다.》
태블릿이 떠올라 불만을 털어내자 은호는 웃음을 터트렸다.
* * *
라비가 꼬리를 말았다.
폭시는 은호의 팔에 매달렸다.
레비아탐 역시 어깨에 올라타 일렉트를 꼭 안았다.
조금 전 장소와 달랐다.
그곳은 빛 알갱이가 가득하고, 가지각색의 색과 여러 모양으로 된 산호초들이 있는 곳으로 수많은 물고기가 있어 바라보는 것만으로 신났는데, 여긴 이상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적막했다.
귓가에 들어오는 파도의 소리부터 달랐다.
무서웠다.
다가가면 안 될 거라는 본능이 심장을 거세게 흔들었다.
“…은호. 나, 가고 싶지 않느니라.”
라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절로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이 너머는 이상해. 은호, 정말 이상해.”
폭시는 날이 선 반응을 내보였다.
분명히 살아 있는 생명이 아닌데, 주변이 거무튀튀했다.
“…나도. 다시 거기로 돌아가고 싶어.”
일렉트는 버거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지? 괜히 따라왔지?”
은호는 꼬맹이들을 보며 씩 웃었다.
세티아의 힘과 결합해서 만들어진 식물인 해홍이 있는 곳과 재해가 맴도는 곳의 차이는 심했다.
저 너머에 그때 보았던 검은 것이 저기에 있을 테니까.
“은호는 괜찮암…?”
레비아탐이 은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괜찮아. 여기 보여?”
은호는 손가락을 뻗었다.
이곳까지 빛 알갱이가 흘러왔다.
해홍이 내뿜는 힘이었다.
겨우 두 그루지만, 가지고 있는 힘이 굉장했다.
“날 지켜주려고 왔나 봐.”
은호가 웃자 레비아탐은 머뭇거렸다.
“돌아가도 괜찮아. 삐약이도 말했잖아? 더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맞아, 작은 친구들. 은호도, 나도, 저 친구도 누누이 말렸어.”
윈디드는 꼬맹이들을 빤히 보았다.
꼬맹이들이 성체가 되지 못했기에 약했다.
더 심한 영향을 받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레비아탐이 실망하자 은호는 볼을 잡아당겼다.
깜짝 놀란 레비아탐이 앞발을 휘적이자 거품이 가득 일어났다.
“괜찮아. 애초에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좋은 모습이 아니니까.”
은호는 공허해 보이는 에르쿠나를 바라보았다.
한 곳을 정화했다고 해서 다른 곳이 멀쩡한 건 아니었다.
그만큼 재해는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자신이 한 일은 그저 한 번 더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일뿐이었으니까.
“에르쿠나. 부탁 좀 많이 해도 돼요?”
“물론입니다.”
에르쿠나는 은호를 보며 웃었다.
억지로 웃는 것만 같았다.
“일단, 꼬맹이들부터 돌아갈까?”
은호는 말을 꺼내며 에르쿠나를 바라보았다.
그때처럼 주변에 바다를 물려주었다.
공간을 열자 꼬맹이들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기 임시 집이다.”“바다에 너무 오래 있었어. 이제 집에 갈 준비를 해야지. 저기 아까 따뜻한 곳 있지?”“어디인지, 기억하고 있어. 몸을 녹이면 되는 거지?”
폭시가 물어보자 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출발하자.”
“은호도 오는 거 맞지?”
일렉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당연히 따라가지. 형이랑 가을 씨도 데리고 가야 하는데?”
“빨리 와.”
일렉트가 말을 끝내고는 가장 먼저 공간 너머로 뛰어들었다.
뒤이어 라비와 레비아탐이 뛰었다.
폭시가 남았다.
은호의 감정을 보고 말았다.
“은호. 있잖아, 저 재해를 정화할 거야? 그 나무를 만들어낼 거야?”
조심스럽게 건넨 말에 은호는 폭시의 이마에서 머리 뒤로 크게 쓰다듬었다.
“해야지.”
은호의 뒤로 빛 알갱이가 있었다.
퍼지고 있었다.
저 빛 알갱이가 지나갈 때마다 무겁던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을 느꼈으니까.
은호의 힘이었다.
“바다가 아프니까. 조금이라도 덜 아프면 좋잖아?”
“…나는, 싫은데.”
폭시는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 풍경은 예뻤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냥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금방 올게.”
은호가 토닥거리자 폭시는 공간으로 뛰어들려다 말고 쳐다보았다.
“…은호는 치사해.”
폭시는 울먹거리며 공간 너머로 뛰어들었다.
“……큰일이네. 폭시가 화났어.”
“꼴 좋다.”
흑견이 심술을 부렸다.
“그래도 왔는데, 보고 지나칠 수 없잖아. 그렇지?”
은호는 윈디드에게 답을 구했지만, 고개를 돌렸다.
“기분이, 좋진 않아.”
윈디드의 대답에 은호는 토닥거렸다.
폭시 말대로 참 치사했다.
은호는 안절부절못하는 에르쿠나에게도 다가갔다.
“괜찮아. 오늘은 내 의지니까.”
말을 건넨 뒤, 태호에게 다가갔다.
“형.”
은호가 태호를 불렀다.
주변을 가을과 찍고 있었다.
“재해를 볼 준비됐어요?”
“그래.”
태호는 힘껏 대답했다.
* * *
“…하.”
태호는 긴 숨을 내쉬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재해를 볼 준비됐어요?
그 의미가 그런 의미일 줄은 몰랐다.
태호의 시선 끝에 은호가 있었다.
두 손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드르륵.
병실 문이 열렸다.
“박사님. 은호 씨는 괜찮다고 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내가 너무 쉽게 봤어.”
재해는 끔찍한 것이었다.
이걸 인간이 만들어낸 거라니.
보는 순간, 토악질이 일어날 뻔했다.
역겨웠다.
혐오스러웠다.
그걸 은호가 정화했다.
“……그런 게 수없이 많다고?”
태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걸 왕이 억누르고 있었다니.
대체 사람은 환수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 걸까.
이건 악몽이나 마찬가지였다.
“정화 말이야. …그 일을 은호밖에 못 하는 거지?”
“맞습니다.”
가을은 텁텁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가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이건 희생이었다.
제 몸을 갈아 만드는 희생.
“…이게 은호가 보던 세계였어.”
태호는 고개를 올렸다.
이 말도 안 되는 세계를 보고도 은호는 담담했다.
자연스럽게 재해를 입에 올렸던 자신이 한심해질 정도였다.
“박사님.”
가을이 입을 열었다.
“은호 씨가 우리에게 보여준 겁니다. 세계가 이렇다고요.”
동시에 신뢰이기도 했다.
“앞으로 쳐부숴야 할 놈은 명확합니다.”
허태인.
전 HMW의 회장이자 현 정화자와 환수 밀렵꾼의 수장.
“그리고 놈들이 저지를 일도 확실합니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을은 주먹을 꽉 쥐었다.
털어버려야지.
지혜가 하나율에게 받은 명단을 넘긴다면, 그건 곧 자신의 무기가 되는 셈이었다.
“제가 뚫어드리겠습니다.”
허태인까지 가는 길을.
“해야지.”
태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생이 저러고 있는데, 형이 뭘 망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