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Druids Live with the Beast RAW novel - Chapter (265)
드루이드가 환수와 살아가는 법-265화(265/302)
264화. 왕(3)
왕의 말이 떨어지자 아무도 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이미 은호의 삶을 흔들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지.
어떤 말을 하는 건지, 섣불리 꺼내기 어려운 말이었다.
왕은 은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내 말을 알 겁니다.”
은호는 왕이 꺼낸 말에 확신했다.
자신이 이곳으로 오게 된 진짜 이유가 바로 왕이라는 걸.
“…이미 예상하지 않으셨습니까?”“예상했어요. 다만, 정말일 줄은 몰랐어요.”“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흑견의 물음에 은호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꺼내봤자 소용없는 이야기고, 말해봤자 달라질 게 없어서 하지 않았지만, 나는 말이야. 이세계 사람이 아니야.”
은호의 미소가 길어졌다.
“…….”
흑견과 윈디드는 충격을 받았다.
이곳 사람이 아니라니.
“다른 차원에서 왔다는 건가…?”
흑견의 물음과 별개로 윈디드는 그제야 이상했던 사실을 이해했다.
은호는 갑자기 나타났다.
그가 자연의 대리자라는 말을 듣자 더더욱 알 수 없었던 사실이 있었다.
대체 왜 이제야 나타났을까.
그 물음 하나가 가슴에 맴돌았다.
“멍멍이 형님을 처음 본 그날, 나는 이곳으로 왔어.”
“…그때였는가?”
흑견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쩌다 정화자를 만났다.
숨어버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숲에는 다른 존재들이 많았으니까.
유인하며 도망치던 도중에 좋은 냄새를 맡았다.
그곳에서 은호를 봤다.
힘이 없는 인간이 입었다면 죽었을 상처였지만, 인간은 살아 있었다.
아주 작은 흥미가 돌았다.
그래서 도와줬을 뿐이었다.
“내가, 서은호 님을 이곳으로 불렀습니다.”
왕이 말하자 흑견 바로 언성을 높였다.
“인간은 그날, 아주 큰 사고를 당했다! 내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죽었다! 너는, 그걸 바랐는가?”“내가 부르지 않았다면, 서은호 님은 죽었을 겁니다.”“죽었다니? …하. 사고를 당하게 한 건 너다! 교묘하게 말로 덮을 생각인가?”“친구,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들어줘. 잠깐만이면 돼.”
윈디드가 흑견 앞에 끼어들었다.
흑견은 윈디드를 바라보며 배신감을 드러냈다.
“…너는 결국, 왕을 위하는 건가? 인간이 널 위해 무얼 했는지 잊었는가?”“그런 게 아니야. 나도 지금 나오는 말이… 너무 충격적이야. 하지만 왕께서는 이유 없이 그럴 분이 아니셔. 내 모든 걸어도 좋아.”
모든 걸 갖다 바치려는 윈디드의 모습에 흑견은 이빨을 악물었다.
낯선 모습이었고, 실망이 밀려왔다.
왕은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재해를 억눌렀다고 하지만, 도와준 건 결국 은호였으니까.
흑견은 고개를 돌려 은호를 보았다.
“인간은 어떻게 하고 싶은가?”“고마워, 멍멍이 형님.”
은호는 흑견을 어루만졌다.
자신을 위해 화를 내주고 있었다.
흑견은 언제나 그랬다.
“나도 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싶어. 만나게 된다면 내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이유가 왕이었는지를 꼭 묻고 싶었으니까.”“알겠다. 인간이 원하는 대로 하거라.”
흑견은 물러섰다.
이 주제의 중심은 은호였다.
그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게 맞았다.
“그리고 멍멍이 형님. 나는, 왕을 원망하지 않아. 오히려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어.”“고맙다고 생각한다고…? 인간을 멋대로 이곳으로 불렀다. 화가 나지 않은가?”“당연히 황당하지 않은 건 아니야.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너희를 만났잖아?”
“…….”
흑견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 사실이 그렇게 흘러가다니.
“그렇지, 멍멍이 형님?”
은호의 물음에 흑견은 고개로 살짝 은호를 건드렸다.
잠깐 웃음을 터트렸다.
은호는 왕에게 한 걸음 다가가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왕은 그대로 얼어붙은 듯했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당신을 만나면 이 말부터 해주고 싶었어요.”
은호가 웃자 왕의 꼬리가 아래로 늘어졌다.
이 상황이 두려운 듯 보였다.
“…나는 자연의 대리자를 두 번 불렀습니다.”
왕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들어보고 판단하라는 소리 같았다.
“첫 번째는 멸망하던 그 세계에서. 두 번째는 지금 이 세계에서.”“왜 두 번이나 불렀던 거예요?”“우선, 당신이 소유한 힘의 주체가 한 차례 바뀌지 않았습니까?”
왕이 꺼낸 그 말에 은호는 시선을 잠깐 내렸다.
―당신의 탓이 아니니까요. 당신을 원망하는 게 아니라, 그 힘을 원래 받았어야 하는 다른 누군가를 원망하는 겁니다.
‘김태을.’
은호는 그 이름을 떠올리며 왕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힘을 준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힘을 떠넘겼다.
김태을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애초에 왕은 어떻게 알았던 걸까.
“그리고 노선 변경이라는 말이 당신에게 더 와닿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을 부르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멸망한 우리의 세계로 갔을 테니까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 이제 큰일 났다고요! 중세 판타지로 가야 하는데, 어떤 세계로 떨어질지 몰라요!
‘…중세 판타지? 거기가 환수들이 있던 세계였나?’
은호는 자신을 납치했던 그 사람을 떠올렸다.
그래서 중세 판타지였을까.
왕은 말을 꺼낸 뒤, 몇 차례나 망설이다가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왜 나한테 사과해요?”“당신은 원치 않았을 겁니다. 그 힘도, 이곳에 오는 것도. 내 욕심으로 당신을 휘말리게 했습니다.”
왕의 귀가 살짝 내려갔다.
이 모든 걸 다 들으면 원망을 하는 건 당연했다.
자신이 저질렀기에 감당해야 하는 몫이라는 걸 알지만, 은호는 자연의 대리자였다.
그가 돌아서 버리면 다 끝이었기에 왕은 피가 말리는 심정을 느꼈다.
“그런데 말이에요. 내가 가진 이 힘이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는 걸 어떻게 아는 거죠?”“…첫 번째도, 두 번째도 내가 불렀습니다. 재해를 억누르느라 한 번 선택된 힘을 바꾸지 못했기에 그 힘과 얽힌 영혼이 달라진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같은 힘이지만, 그 힘을 소유한 자의 영혼이 달랐다는 말이었다.
“그럼, 혹시 마나석으로 날 불렀나요?”“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전부요.”
은호는 그제야 자신이 어떤 힘으로 올 수 있는지를 이해했다.
환수들이 이세계로 올 때처럼 자신 역시 마나석을 이용해 불렀다.
“그럼,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겠네요?”
은호는 초능력 관리국을 떠올렸다.
그곳은 마나석을 숨기기 위해 크라카들을 쫓아내고 지어졌다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마나석은 그 자리에 있었고, 만약에 그 건물을 드러낸다고 해도 아무것도 없다는 소리가 아닌가.
“맞습니다. 그곳에는 더는 없습니다.”“…그래서 제게 마지막이라는 소리를 하신 겁니까?”
윈디드는 머뭇거리다 물었다.
얼마 전, 왕과 나눈 말이 떠올랐다.
―그분이 마지막입니다. 그분이 죽으면 자연의 대리자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나석이 없다는 뜻은 두 번 다시 누군가를 부를 수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정말로 은호가 마지막이었다.
“맞습니다. 마지막입니다. 더는, 없으니까요.”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호가 사라진다면, 그가 마음을 돌려버린다면 그 어떤 희망도 없다는 소리와 같았다.
은호는 왕의 말을 들으며 더 다가갔다.
“내가 더 빨리 왔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무래도 시간의 흐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달라졌나 봐요.”“시간의 흐름이라뇨?”
왕은 은호가 꺼낸 말에 귀를 기울였다.
“중세 판타지, 그러니까, 너희가 살던 그곳으로 납치되던 중이었거든요. 그러다가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으로 이곳으로 떨어졌어요.”
시간의 흐름이 엉킨 게 아닐까.
은호는 싱긋 웃으며 왕에게 손을 뻗었다.
만져도 될까.
그래도 될까.
망설이던 차, 그냥 안아주었다.
생각해보니, 자신을 먼저 안아준 건 왕이었다.
왕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한마디로, 괜찮다는 말이에요.”
“…….”
“힘들지 않았어요?”
은호가 물었다.
재해를 본 뒤로 쭉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이곳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몰라도, 답답하지 않았어요?”
상냥한 말이 또 흘러나왔다.
왕은 당황했다.
“…왜, 나를 원망하지 않으십니까? 왜 내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주십니까?”“누군가는 원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긴 해요. 갑자기 잘살던 세계에서 끌려왔으니, 열받을 수도 있죠.”
만약에 그런 상황이었다면 왕을 얼마나 원망할까.
노력했던 모든 걸 무너트린 셈이었다.
“그런데 나는 잘 못 지냈어요. 그래서 고마운 거예요. 욕심이든 뭐든, 기회를 준 거잖아요?”
은호는 괜히 웃음이 났다.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웃겼고, 왕의 반응이 생각한 것보다 더 큰 것도 웃겼다.
“이곳은 이제 내가 살아가는 곳이고, 나는 환수의 임시 보호소가 되기로 했어요.”
은호는 세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났다.
“그 속에 당신도 포함되어야 하는 게 맞잖아요?”
손을 내밀었다.
“당신이 지키고 싶은 걸, 나도 지켜주고 싶어요. 뭘, 바라고 있나요?”
은호가 웃자 왕은 입을 다물었다.
자연의 대리자가 이곳에 왔을 때, 반가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락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무리했다.
그 뒤로 식물과 윈디드에게, 약속을 깼던 존재들에게서, 니르바나에게서, 에르쿠나에게서 은호를 들었다.
“…당신은, 왜 이렇게 따뜻합니까?”
실제로 본 은호는 더, 더 많이 다정한 존재였다.
“내가, 당신을 이용할 수 있잖습니까.”“그럴 수도 있는데, 하지 않을 거잖아요. 삐약이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은호는 윈디드를 보며 씩 웃었다.
윈디드가 얼마나 왕을 좋아하는지 눈에 다 보였다.
“저번에 나한테 말을 걸었잖아요. 다음에도 왜 못하겠어요? 그런데 아무것도 나한테 요구한 건 없어요.”
처음 왕이 말을 걸어왔을 때를 생각해보면 기대와 밝은 목소리만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내가 왔어요.”
은호는 자신감을 담아 말을 꺼냈다.
이곳에 왔을 때 느꼈던 그 원망.
그건 분명히 이곳에 있는 식물이 꺼내는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들어왔던 소리와 달랐다.
처음에는 이 커다란 나무가 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은호는 손가락을 뻗어 아래를 가리켰다.
“이 아래, 식물 친구가 있잖아요?”
“맞습니다.”
“함께 가볼까요?”
“이건 둘이서만, 가도 되겠습니까?”
왕이 흑견을 향해 묻자 코웃음을 쳤다.
“마음대로 하거라.”
은호가 용서했는데, 더 말할 건 없었다.
자신의 일과 은호는 별개였으니까.
“…고맙습니다.”
왕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은호는 옆에 나란히 걷고 있는 왕을 보며 물었다.
“라이엔. 내 이름은 라이엔입니다. 그냥 친구라고 불러도 됩니다. …사실, 부러웠습니다.”
라이엔은 미소를 지었다.
감미로운 목소리에 미소까지 이어지자 은호는 눈동자를 어디에다가 둬야 할지 몰랐다.
“뭐, 뭐가 부러웠죠?”“당신이 여러 존재에게 친구라고 불러주는 그 자체가 부러웠습니다. 혹여나 내게 불러주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지요.”
“왕이라서요?”
“맞습니다.”
은호는 그 자리에서 멈춰 라이엔을 보았다.
“엄청, 신성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어떻게 대해야 하나 싶긴 한데, 왕관은 없네요?”“이 자리는 자연이 내려준 겁니다. 아까 말했던 축복을 받아 그저 다른 존재보다 더 많은 힘을 가지게 된 것뿐이죠.”“다른 환수와 다를 게 없다는 거죠?”“그런 의미로 받아주시면 감사합니다. 그리고 태블릿 말입니다.”
라이엔이 말을 꺼내자 은호는 흠칫 놀랐다.
“태블릿 씨를 알아요?”“자연의 대리자를 위한 보조도구라는 걸 압니다. 원래는 사전의 형태였죠. 은호에게 가방의 요정도 함께한다는 걸 압니다.”“…원래 세계에 다 있던 거예요?”“맞습니다. 아마 지금쯤 우리가 살던 세계에 있던 식물을 불러올 수 있을 겁니다.”“그것도 알고 있나요?”
은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물론입니다. 가지고 있는 그 힘은, 전부 자연이 줬으니 겉이 다를 뿐, 속은 거의 다 똑같습니다.”“하지만 사라진 식물을 어떻게 불러올 수 있는 거죠?”“씨앗 덕입니다. 그러니까, 위그드라실 덕이죠.”“위그드라실이요?”
은호가 어깨로 올라탄 위그드라실을 바라보자 당당하게 가슴팍을 두드렸다.
“아산이라는 이름을 붙인 그 식물이 내 오랜 친구를 대신해 은호의 힘이 섞인 씨앗을 넘겨주었습니다.”“오랜 친구가 식물인가요? 내가 그 감각을 느낀 이유이기도 하고요?”
“예리하십니다.”
“식물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죠?”“이동은 우리만 한 게 아닙니다. 수많은 식물이 왔지만, 오직 한 친구만 살아남았습니다.”
씁쓸함이 담긴 소리에 은호 역시 섣불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식물 친구들은 자연의 대리자가 없어서 적응을… 못 했구나.’
환경에 가장 예민한 건 식물이었다.
외부 도움 없이 적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환경과 물 등 여러 가지가 달랐는데.
“그런데 왜 이런 걸 알려주는 거예요?”“궁금하셨잖습니까. 약속도 말입니다.”“궁금하긴 한데, 알려줘도 되는 거예요?”“당신이기에 알려드리는 겁니다. 원래는 안 되는 게 맞습니다.”
라이엔은 말을 끝낸 뒤, 잠깐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지금 있는 곳은 지하였지만, 왕의 존재로 전혀 어둡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알려주지 않아도, 앞으로 만나게 될 내 오랜 친구가 말할 테니까요.”“내가, 자연의 대리자라서요?”“맞습니다. 식물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라이엔은 앞으로 걸었다.
쭉 이어졌던 그 길 끝에 무언가 있었다.
“우리의 야성을 짓누르는 약속이 약해지고 있는 이유는 나와 내 오랜 친구 때문입니다.”“라이엔의 힘이 아니었어요?”“약속이란, 나의 힘과 내 오랜 친구의 힘이 섞여서 만들어진 힘이니까요.”
라이엔은 잠깐 걸음을 멈췄다.
분홍과 보라색이 섞인 꽃이 휘날렸다.
익숙한 꽃잎이었다.
사라진 식물을 부를 때, 자신이 만났던 그 나무가 품던 꽃이었다.
“안녕, 은호.”
익숙한 소리가 들리자 은호는 고개를 돌렸다.
사슴과 고양이를 잘 섞어놓은 가면을 쓴 듯한 환수가 걸어왔다.
머리에 달린 사슴뿔도, 푸른 불꽃으로 이뤄진 망토도 전부 다 익숙했다.
하이프가 활짝 웃었다.